강의13 “야곱은 무엇과 싸웠는가” (성경7기)

 

 

창세기 강해를 절반 약간 넘게 마쳤습니다. 그렇지만 다 한 것으로 봐도 됩니다. 요셉 이야기는 참 은혜로운 이야기인데 시간이 안됩니다. 다음 기회에 요셉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셉 이야기 속에도 배울 게 정말 많습니다. 오늘은, 야곱이 축복받은 후의 이야기와 야곱의 환란에서 끝을 낼까 합니다.

 

이제 야곱은 정말 죄인으로서 사단이 그를 짓누르고 정죄를 막 합니다. 하나님이 짓누르지 않습니다. ‘네가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훔쳤지?’라고 계속 괴롭힙니다. 야곱은 어쩌면 헷갈릴 겁니다. 속인 것이 아닌데 어떻게 보면, 만져보자고 했었고..야곱은 진리를 다 모르기 때문에, 만져야 된다고 했었고 또 그러고 보니까 속인 것도 같기도 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속인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입장은 우리도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죄인인데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의의 옷을 만져보시고 의롭다고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보면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왔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창27:35]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그래서 그 간교란 게 그런 차원에서의 간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간교라기 보다는 상당히 영적인 면에서의 간교는, 내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인데 의인이라고 하는 것도 속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속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진실입니다. 정말 성경의 진리라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너무나 스스로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절대로 안 떠납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어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누가 이 약속을 포기해 버립니까? 우리가 이 약속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절대로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을 우리는 잊어 버립니다. 왜? 내가 죄를 짓고 나면 그것이 거짓말처럼 들립니다.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죄속에 있을 때는, 천만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롬5:20]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입니다. 야곱 자기 같은 죄인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십니다. 지금 자기는 죄의 덩어리입니다. 정말 어려서부터 너무도 얌체였었고 사기꾼이었고 속에서는 항상 나쁜 게 왔다 갔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서 훌륭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물질보다는 무엇이 낫다고 생각했습니까? 그 명분이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것 참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지요? 영적으로 완전한 것을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명분이 더 낫다라고 하는 그것으로 영적인 생명이 유지되어 왔던 겁니다.  이제부터가 야곱의 영적 시작점입니다. 진정한 영적 인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작점에 와서도 보니까 야곱 자기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에게 내놓을 게 없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아 너는 주신 것입니다.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꿈에 사닥다리가 나타났습니다. 저 사닥다리는 죄의 세상과 하늘을 잇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다는 말은 참 좋은 말입니다. 사망에 처함 이 세상에, 그 땅 위에 서신 사닥다리가 바로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사망의 세상에 서셨습니다.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우리는 그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우리가 아무리 죄가 많을지라도 사닥다리는 올라가야 됩니다. 사람들이 사닥다리만 쳐다보고 ‘그럼 나는 올라갈 수 있어. 나는 저 사닥다리 때문에 구원을 받았지’라고 그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올라가는 것은 내가 해야 합니다. 일단 사닥다리에 올라가서 붙으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딱 붙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해줍니다. 그런데 내가 사닥다리에 올라가서 천사들이 도와주려고 할 때, ‘놔라, 놔라..’라고 한다면 떨어지고 맙니다. 이게 히브리 정신입니다. 헬라 정신은 그냥 관념적으로, 지식적으로 이야기 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에서 끝납니다. 우리가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 차원에서 끝내버립니다. 왜? 그 차원이 우리에게 편안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게 내가 사닥다리를 올라가는데 힘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내가 악용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라는 말을 엉뚱한데에 쓰게 됩니다. 나는 전혀 고통도 받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그런데에다 적용하는, 아주 이기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해나갈수록, 이 사닥다리가 높아질수록 어떻습니까?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닥다리에 붙어 있으면 되는데 자꾸 놓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닥다리를 기억하세요.

 

그래서 이후부터의 야곱의 일생은 사닥다리를 기어 오르는 일생입니다. 올라가다 보면 피곤합니다. 피곤해서 그만 올라갈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시 내려갈까 싶기도 해집니다. 이러한 일생을 야곱이 삽니다. 그렇게 사는 모습을 야곱이 보여 줍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죄를 짓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야곱이 잠이 깼습니다. 야곱은 그 밤에 광야에서 얼마나 혼자 무서웠겠습니까? 그 당시에 경찰도 없었을 터이고 오히려 짐승, 강도 등이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지 않으시면 이건 완전히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서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사단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닥다리를 보여 주시면서 히브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헬라적으로는 이런 표현 못합니다. 사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를 사용했지마는 내용은 히브리 이야기이고 정신은 히브리 정신입니다. 이원론의 언어를 썼지만 나타나는 정신은 일원론의 정신입니다.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기서 야곱은 처음으로 절대적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의 덩어리에게 하나님은 사닥다리를 보여주면서,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럴 때 야곱은 그제서야 잠이 깼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계신다고 하는 것은 자기와 함께 바로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와아, 이런 줄은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꿈으로 보고 이제 정말 실질적으로 체험하는 장면입니다. 히브리 신앙은 체험하는 신앙입니다. 공부의 체험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라고 고백하는 야곱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2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가 이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라도 나와 함께 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찬양했는데 야곱은 이제 깨닫고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한 마디 한 마디가 은혜 덩어리입니다. 이러던 야곱이 뒤에 가면 또 엉뚱한 짓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은 참 정직한 책이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책입니다.

 

자, 여기를 기억하세요. 여기서 분명히 ‘아, 내가 이것을 몰랐는가’라고 했었는데 완전히 깜빡 잊어버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여러분, 저 두려운 것은 에서가 두려운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오기 때문에 죽을 것 같아서 무서운 것과는 다릅니다. 와아 과연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한 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너무 너무나 성스러운 곳이구나, 이 성스러운 곳에 나같은 죄인이 여기 있다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절대적인 사랑을 깨닫고 자기가 이때까지 살아온 방법과 수단들을 생각하니까 이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너무도 놀랍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두려워해보지 않는 사람, 놀라보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없으면 우리가 절대적인 사랑을 찬양하면서도 항상 그 쪽으로 가기 보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금방 세상 쪽으로 향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하나님 쪽으로 가고 싶다고 하면서 투쟁하여야 됩니다. 사단은 사닥다리에서 끌어 내리려고 하고 나는 사닥다리를 올라 가려고 하는 것 그게 투쟁입니다. 그럴 때 기도하면 하늘의 사자들이 도와줘서 올라가게 합니다. 여러분, 사닥다리를 기억하세요. 그냥 항간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공로는 아무도 필요 없단다,라고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관념적으로는 다 맞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렇게 해결해도 됩니다. 그러나 내 실생활 속에서 그렇게 해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을 믿고 올라가는 거지요. 이것은 내 힘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니까요.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놀랍다, 이곳이 이런 곳이었구나!’라고 경탄을 하는 야곱입니다. 여러분, 페루에 있는 마추 픽추라는 곳에 가보셨어요? 저는 인터넷으로 찾아본 적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곳을 다녀와서 써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곳은 다 파괴해도 그곳만은 보존해놨으면 좋겠다’라고 썼더군요. 그 글을 읽으니 아따 그렇게도 좋은 곳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상당히 인상을 강력하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쓸 만큼 와아!라고 한 것을 두렵다라고 합니다. ‘아이고 무섭다’가 아닙니다. 와아!라고 할 때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너무 너무 엄청날 때 하는 말입니다.

 

28: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이런 것을 우리가 형식이라고 합니다. 요새는 형식을 자꾸 배제하자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히브리 사상이니까 이렇게 형식이 있는 겁니다. 왜? 히브리 사상은 체험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하기 보다는 거기에다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그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땅위에 선 돌, 그리고 기름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하늘에 성령과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런 모든 것은 야곱이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은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실제로 내 생활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사닥다리로 올라오르도록 해주겠다는 계약입니다.

 

그 다음 장부터는 야곱이 결혼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도 다 좋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입니다.

 

29:16 라반이 두 딸이 있으니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29:17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안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안경 끼었다는 말입니까?

 

(한글KJV) 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우나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얼굴도 예쁘더라.

라헬이 눈매가 부드럽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얼굴도 예쁜데 눈매에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영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봅시다.

 

(표준새번역) 29:17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었으며,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가 예뻤다.

 (공동번역) 29:17 레아는 부드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진짜 눈매라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KJV) 29:17 Leah [was] tender eyed; but Rachel was beautiful and well favoured.

(NKJ) 29:17 Leah's eyes were delicate, but Rachel was beautiful of form and appearance.

(RSV) 29:17 Leah's eyes were weak, but Rachel was beautiful and lovely.

그러니까 부드러운 게 weak한 거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라헬은 눈매가 강한 인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즉 부드러운 면을 느끼게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29:18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춘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봉사하리이다

이제 무슨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상대적 사랑의 시스템 속에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벧엘에서 만났던 시스템에서 점점 벗어나서 이제 죄의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댓가로 7년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외삼촌도 그런 사람이고 만나는 거의 많은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절대적 사랑으로 다른 무엇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29:19 라반이 가로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그때 세상은 여자 마음을 물어보지도 않고 남자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고 사고 팔고 합니다. 나중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기고 고생이 하나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레아를 라헬인 것처럼 꾸며가지고 야곱의 방에 들어가게 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보니 옆에 있는 사람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29: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29:26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9: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 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그래서 칠일을 채우고 나니까 라반이 라헬도 주었습니다. 칠일 만에 갑자기 아내가 둘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얻긴 얻었는데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라헬을 얻은 시스템과 레아를 얻은 시스템은 다릅니다. 레아를 아내로 받은 시스템은 완전히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스템입니다. 라헬의 경우는 우선 받는 시스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스템입니다. 성경이 한 토막 한 토막이 다 그런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29:29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29: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야곱의 골치 아픈 인생이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이게 여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입니다. 사랑할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보세요. 이제 야곱에게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 시작되는지를 보세요.

 

29: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NKJ) 29:31 When the LORD saw that Leah was unloved, He opened her womb; but Rachel was barren.

 

(개역개정)29: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한글KJV) 29:31 주께서는 레아가 미움받는 것을 보시고, 주께서 그녀의 태를 열어 주셨으나, 라헬은 임신하지 못하더라.

 진짜 남은 자손들이 나오는 그 줄에는 애가 안나옵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이 성령의 역사로 맺어주는 열매로서만, 그 길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라헬이 아기를 못낳게 한 것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단이 남은 자의 줄을 끊기 위해서 라헬이 지은 모든 죄를 빌미로 잡아서 사단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29: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이것도 철저히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라반같은 아버지 밑에서 배웠으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배웠을 리가 없습니다.

 

29: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이렇게 레아는 질투 속에서 살아 갑니다.

 

29: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30:1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자식들을 하나도 낳아 주지 못함을 보고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말하기를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으리라." 하니

 

30:2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네게서 태의 열매를 못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겠느냐?" 하니

 

30:3 그녀가 말하기를 "내 종 빌하를 보고 그녀에게로 들어가라. 그녀가 내 무릎 위에 아이를 낳아 주리니 그러면 나도 그녀로 인하여 자식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하며

이래서 아내가 세명이 됩니다.

 

 

30:4 그녀가 그에게 자기의 몸종 빌하를 아내로 주었더니 야곱이 그녀에게로 들어갔더라.

 

30: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았더니

 

30:6 라헬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시고 내 목소리도 들으시어 내게 아들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단이라 불렀더라.

 

30:7 라헬의 여종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야곱에게 둘째 아들을 낳았더니

사랑한다고 얻어놨더니 골치만 아픕니다. 엉뚱한 일만 생깁니다. 야곱은 여자들 틈에서 스트레스가 많았을 겁니다.

 

루벤이 누구입니까? 제일 맏이입니다. 장남이 상당히 엄마를 사랑한 효자였던 것 같습니다. 자귀나무라고 하는 아주 귀하고 비싼 나무를 잘라다가 엄마 레아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라헬이 레아에게 말하기를 "부탁하노니, 언니 아들의 자귀나무를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30:15 레아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자귀나무도 빼앗고자 하느냐?

일일이 이렇게 세상적인 차원에서는 이렇게 싸웁니다. 인격들이 이렇다는 겁니다. 달라고 하니까 몇년 묵은 한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이년아 네가 내 남편을 빼앗아 놓고도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말을 뱉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는 겁니다.

라헬이 말하기를 "그러므로 언니 아들의 자귀나무 일로 인하여 오늘밤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더라.

그 나무가 라헬은 굉장히 탐이 났던 모양입니다. 언니가 그 자귀나무를 자기에게 주면 ‘오늘은 남편을 네 방에 넣어준다’고 까지 말합니다. 남자가 이거 할 일이 아닙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니 말입니다. 그랬더니 레아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반드시 내게로 들어와야 하는도다. 이는 내가 분명히 내 아들의 자귀나무로 당신을 빌렸음이라."라고 레아가 야곱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야곱은 마치 남창된 기분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이 다 무너져 가는 겁니다. 이 세속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존엄성, 명분 이런 것들은 다 무너져 갑니다. 그래서 남편을 파는 여자와 남편을 사는 두 여자의 모습입니다.

 

30:17 하나님께서 레아를 들으셨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다섯째 아들을 낳았더라.

아들을 잘 낳습니다. 낳았다 하면 아들입니다.

 

30:18 레아가 말하기를 "내가 내 여종을 내 남편에게 주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내 삯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칼이라 하였더라.

여종을 준 것을 굉장히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 내 남편을 잘도 공양했다 그럼 그 댓가로 아들을 낫게 해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세상적 사고 방식입니다. 철저한 미신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들의 이름들이 다 그렇고 그런 이름들입니다. 좋은 이름들이 아닙니다.

30: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야곱에게 여섯째 아들을 낳았더니

 

30:20 레아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선물을 주셨도다. 내가 내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아 주었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룬이라 하더라.

 

30:21 그 후에 그녀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드디어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이 딸 하나 낳은 것이 나중에 굉장히 골치를 썩히게 만듭니다.

 

30:22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들으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으니

라헬이 기도를 한 모양입니다. 이게 뭔지 라헬은 모릅니다. 자귀나무 때문에 아기를 낳았는지 아니면 기도해서 응답으로 아기를 낳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도의 응답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던 거지요.

 

30:23 그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치욕을 제거하셨다." 하고

기껏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이제 분풀이를 했다는 겁니다. 죄의 세상을 역력히 나타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좋은 선물을 주셔도 그것을 분풀이에 사용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값어치 없게 여긴 겁니다.

 

30:24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고 말하기를 "주께서 내게 또 다른 아들을 더해 줄 것이라." 하더라.

이렇게 될 때 야곱이 라반에게 ‘나는 떠나야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고향땅으로 돌아갑니다. 이 형편없는 영적인 상태에 있던 식구들을 거느리고 돌아갑니다.

 

여기서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여기에도 구질 구질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32:1 야곱이 그의 길을 계속 가더니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만났더라.

야곱이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차원에서 의미 있습니까?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벨론에 포로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이고 동시에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혼란된 종교로부터 진리의 한 무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사실 여기 보면 이게 다 요한계시록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과 이번에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조용히 맞추어 보니까 딱딱 잘 들어 맞습니다.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들어 맞는 것 같습니다.

 

32:2 야곱이 그들을 보고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자, 자기들은 별 볼일 없는 일당 한 무리지만 하나님께서 그 천사들을 보내서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자기들에게 보냈다는 것을 야곱은 보았습니다. 자, 보세요. 아까 벧엘에서 하나님이 절대로 자기를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신다는 것도 알고 지금 여기 두번 째 지금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내서 자기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이게 중요합니다.

 

32:3 야곱이 에돔 지역의 세일 땅에 있는 그의 형 에서에게 자기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며

 

32:4 그들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고할 것이니 '당신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더불어 기거하며 거기에서 지금까지 머물렀나이다.

 

32:5 내게는 소들과 나귀들과 양떼들과 남종들과 여종들이 있는데 보내어 내 주께 전하고 내 주의 목전에서 은총 받기를 바라나이다 하더이다.' 하라." 하였더라.

이제 옛날에 죄 지었던 것, 사기쳤던 것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지금 야곱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한테 기도도 안해보고 자기가 가진 재물을 뇌물로 바치려고 합니다. 금방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도 까먹어버렸습니다. 성경 공부할 때에는 바로 이런 것을 발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 보여주실 것이라고 믿으면 되는데 그게 안되는 거예요.

 

그랬더니

32:6 심부름꾼들이 야곱에게 돌아와서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형 에서에게 갔더니 그도 사백 명을 데리고 당신을 만나러 오더이다." 하니

와아 진짜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러 옵니다. 가슴이 꽝꽝 뜁니다.

 

32:7 야곱이 몹시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여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과 양떼들와 소떼들과 낙타들을 두 무리로 나누고

살 궁리를 찾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32:8 말하기를 "만일 에서가 와서 한쪽 일행을 치면 남은 다른 일행은 피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바로나 아비멜렉에게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속였을 때 바로나 아비멜렉에게 양심은 남아 있습니다. 그 양심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그 양심을 이용해서 그들로 하여금 보호하게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셔서 좋은 일을 또 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을 건드려서는 해가 된다는 것을  바로나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깨닫도록 해줍니다. 이렇게 하면 다 해결되게 되어 있는데 구태여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등 잔꾀를 부립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손을 쓸 수가 없게 만듭니다. 지금도 야곱은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놓고 이때 야곱이 기도합니다. 진짜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드디어 기도합니다.

 

32:9 야곱이 말하기를 "오 내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네 고향 네 친족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를 잘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모든 진리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받을 가치가 없사온데,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무리나 이루었나이다.

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나의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구하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혹 그가 와서 나와 처자들을 칠까 함이니이다.

겁이 났습니다.

 

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선을 베풀어 네 씨가 많아서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 같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더라.

 

32:13 야곱이 그 밤을 거기서 유숙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자기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택하니

 

32:14 암염소가 이백 마리요, 숫염소가 이십 마리며, 암양이 이백 마리요, 숫양이 이십 마리며,

 

32:15 젖나는 낙타 삼십 마리와 그들의 새끼들이며, 암소가 사십 마리요, 황소가 열 마리며, 암나귀가 이십 마리며, 그 새끼 나귀가 열 마리더라.

 

32:16 그것들을 떼로 나누어서 자기 종들의 손에다 맡기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기를 "나보다 앞서 건너서 떼와 떼 사이에 간격을 두라." 하고

 

32:17 맨 앞에 선 자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물어 말하기를 '네가 뉘 사람이냐? 네가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에 있는 이것들은 뉘 것이냐?' 하거든

 

32:18 그때에 네가 말하리니 '그들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이오며 그것은 나의 주 에서에게 보내는 선물이옵니다. 또 보소서,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32:19 또 둘째와 셋째와 그 떼들을 따라오는 모두에게 그렇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이같이 그에게 말할 것이니라.

야곱은 에서에게 충분한 뇌물을 보냅니다. 시간도 충분히 법니다.

 

자, 이래서 야곱이 홀로 남았습니다.

32:24 야곱이 홀로 남았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서 야곱과 날이 샐 때까지 맞붙어 싸우다가

 

32:25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치니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싸울 때에 위골되었더라.

자, 이 순간은 어떤 순간과 같은 순간일까요? 야곱이 맨 처음에 시작할 때 도망갈 때의 순간과 같습니다. 다시 무엇으로 꽉 잡혀 있습니까?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다시 잡혀 있습니다. 일단 기도는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기서 야곱과 날이 샐 때까지 맞붙어 싸우다가

이 어떤 사람이 나중에 보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천사입니다. 왜 하나님의 천사가 여기에 왔습니까? 기도에 응답하려고 왔습니다. 기도에 응답하려고 왔는데 야곱은 에서의 스파이가 자기를 죽이려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과 싸우는 겁니까? 자기의 죄책감과 싸우는 겁니다. 죄책감과 싸우면서 누가 누구를 구원하려고 하는 겁니까?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 모두가 이런 환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도 깜빡한다는 겁니다. 왜? 사단이 끝까지 우리에게 그 일생 동안 지은, 나도 몰랐던, 나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했던 것을 눈앞에 보여 줍니다. ‘네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이냐’라고 사단은 상대적 입장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럴 때 절대적인 사랑을 깜빡 잊어버리고 있으면 죄책감에 그만 내가 넘어져 버립니다. 포기하고 버립니다.  사다리에서 떨어집니다. 참으로 우리의 인생은 사다리 인생입니다.

 

32:25 그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을 치니 야곱의 넓적다리의 우묵한 곳이 그와 싸울 때에 위골되었더라.

우리 유전자 속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꽉 박혀 있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가 진짜 힙듭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계속 야곱에게 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계속 죄책감을 불러 일으켜서 사다리에서 떨어뜨리게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은 하나님과 사단의 대쟁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천사를 보내서 죄책감과 싸우고 있는 야곱을 지금 계속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죄를 생각나게 하면, ‘물론 그것도 용서 받았지. 물론 그렇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적어도 절대적인 사랑 안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야곱으로 하여금 결국에 가서는 사다리를 포기하게 만들려고 계속 공격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절대적인 사랑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아니 하신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쪽에서, 이 천사들 쪽에서 봤을 때는 일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에서 이미 구원이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용서를 받았는데..속으로 씨름하면서 아직도 혼자서 투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천사는 날이 밝아서 천사가 할 일을 다하고 야곱은 이제 이겼습니다. 이제 가야 되니까 천사가 졌다는 거지요.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이 싸움에서 우리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책감은 우리 속에 너무나 너무나 뿌리가 깊기 때문에 천사가 이렇게, 쳤다는 것은 자기가 간다는 뜻도 있지만, 이것을 탁 쳐야될 뜻이 있습니다. 야곱에게 이것은 끝난 이야기인데 야곱은 지금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쳤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상황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알려주는 그 과정에서 죄인이 쉽게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에게 좀 아픔이 될지라도 ‘아아, 승리했구나’하는 것을 죄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될 정도로 우리들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말로 부드럽게만 해가지고는 못알아 듣기 때문에 쳤던 것입니다. ‘끝났어, 자식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열중해 있던 야곱에게 찬물을 부어서 정신이 확 들게 만든 셈입니다. ‘아아 다 끝났네’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더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방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런데 밀물이 서서히 몰려 오면서 바닷물이 밀려 옵니다. 그것을 야곱이 막아냅니다. 무엇으로 막아냅니까? 절대적인 사랑으로 막아내는 겁니다. ‘하나님,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단 말이야’라고 하면서 힘껏 막아냅니다. 그 나를 죽이려고 오는 그 바닷물을 내가 막고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막고 있는 거지요. 이제 천사가 와서 믿음으로 그 물을 썰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물을 빼줄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바닷물을 빼서 낮추어 줄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물을 낮췄는데 우리는 죽을 힘으로 물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자 됐다. 안 막아도 된다고 천사가 알려 줍니다. 그런 과정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별볼 일 없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십자가만 붙들면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나마 뿌리칩니다.

 

32:26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새니 나로 가게 하라." 하니 야곱이 말하기를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였고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자기의 부족한 믿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직접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못간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32:27 그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야곱이니이다." 하더라.

 

"야곱이니이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죄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32:28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네 이름이 더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아니할 것이요, 이스라엘이라 불리리라. 이는 네가 통치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니

 

32:29 야곱이 그에게 물어 말하기를 "내가 간구하오니 당신의 이름을 말해 주소서." 하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며 거기에서 야곱을 축복하더라.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너와 함께 한다고 약속한 하나님이 아니냐, 고 하신 겁니다.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지만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아플 것을 알면서도 칠 수 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구원의 확신이 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병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 뿐인 상처인 것입니다.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살았습니다. 드디어 이겼습니다.

 

32:31 그가 브니엘을 통과할 때에 해가 그 위에 솟았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더라.

 

브니엘을 통과할 때에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 대면한 곳을 살아서 통과할 때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해서 사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그래야 브니엘이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32:31 그가 브니엘을 통과할 때에

그가 부니엘을 통과할 때에,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통과할 때에

해가 그 위에 솟았고 그는 그의 넓적다리를 절뚝거렸더라.

 

이게 굉장히 멋있는 이야기입니다. 해가 그 위에 솟았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빛, 절대적인 사랑의 빛을 의미합니다. 그 밤 내내 투쟁하고 결국은 절둑발이가 되었지만 야곱이 가는 그 앞길을 은혜와 사랑의 빛으로 비춰주시는 예수님을 뜻하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길을 가면 세상에서는 병신같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모자라는 바보같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의의 태양이 비치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남은 자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저희들의 아버지.

아무리 주님께서 절대적 사랑으로 저희들의 모든 죄를 책임지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사단이 이 세상 끝날에, 또 우리의 인생의 끝날에 집요하게 우리를 죽이는 죄의 홍수의 물을 우리에게 덮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믿는, 참으로 작은 믿음으로 완전히 이기지 못하고 그저 겨우 겨우 이기고 있을 때, 그것도 주님께서 도와 주시면서 이기고 있을 때, 우리가 그 홍수의 물을, 그리고 제방의 구멍을 막으려고 하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완전히 주의 품에 안길 때, 그것을 하지 못하고 계속 주의 힘과 우리의 힘을 합쳐서 싸우려고 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래도 떠나시지 아니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미 이겨 놓으시고 이제 우리에게 그만 싸우라고 할 때에도 좀처럼 말리지 못하시는 당신이십니다.

주님.

정말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이 인생 동안에 주님과 그렇게 싸우지 않아도 될 그런 믿음을 쌓으면서 나아가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환도뼈가 부러지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을 멈출 수 있고 안식할 수 있는 우리들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 생활 매일 매일 일과 속에서 이것을 적용할 수 밖에 없사오니

주님.

저희를 도와서 한 순간 한 순간 그 사다리 하나 하나를 올라가는 것을, 우리가 그런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삶을 살 때 물론 고생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아플 것입니다. 물론 원통하고 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의 천사를 붙잡아 주셔서 주님, 우리를 당신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