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강은교의 문학적자전

by 자유인 posted Feb 04,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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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스트레스 받았을 테니 이 글 읽고 푸세요)---자유인


매혹
---그 여자의 요즘 며칠

* 밤 2:00

그 여자는 일어났다. 어둠속의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들이 마치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또는 땅에 흰띠를 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다 기슭을 하얗게 감싸며 달려오는 것을 본다.
어둠속에 누워 있을 수평선 께에 한 번 눈을 준다.

두 나무에게로 간다. 키 큰 홍콩야자와 벤자민. 거의 민머리가 된 벤자민의 초콜릿빛 마른 가지에 걸어놓은 종을 한 번 두드려 보고 나무잎을 올려다 본다.
오늘은 다행이도 벌레 똥이 보이지 않는것 같다.
열심히 들여다 본다. 아, 저기 있군.
불빛에 비쳐 보이는 나뭇잎에 까만 점같은 것이 보인다.얼른 의자를 끌어다 놓고 올라가 잎을 닦아준다. 벌레똥인지 그 까만 점이 없어졌다.
혹시 잎이 찢어지기라도 할까봐 조심해서 닦는데 드디어 잎 한쪽이 약간 찢어졌다.
그 여자는 '아...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도 그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아주 단단히 나무가지를 잡고 있다. 미안, 미안,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여자는 옆의 잎도
문질러 준다. 나이 먹은 잎들은 불빛에 거의 검은 초록으로 빛난다.
그러고 보니 아주 작은 잎들이 곳곳에서 솟아 나오고 있다.
아주 작은 연록색 잎, 잎들......그것들도 나뭇가지를 꼭 붙잡고 있는지 그 여자가 다른 잎을 닦느라 나뭇잎을 좀 잡아당긴 것 같았지만 잘 붙어 있다.
벤자민도 홍콩야자도 거의 민머리가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 여자는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오가면서 소독약이나 뿌려주었었다. 그러나 벌레들은 끝이 없었다. 나뭇잎들은 어느새 누래져서 떨어지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 그 여자는 결심을 하고 잎을 다 잘랐다. 하긴 처음엔 벌레 먹은 잎만 골라내려는 심산이었지만, 그렇게 하다보니 나무 전체가 훠언 - 하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벤자민도 그랬고 그 옆의 홍콩야자도 그랬다. 이제 더 이상 자르기는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닦아주기 시작한 것이다. 홍콩야자에는 작은 손바닥같은 잎들이 곳곳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잎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나뭇잎들은 출렁이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것은 출렁인다. 살아있는 것은 젖어서 출렁인다.
그 작은, 다섯 손가락의 홍콩야자잎도, 아기 얼굴같이 해말간 연녹색의 벤자민 아기 잎도.
그 여자는 의자 위에 올라가 먼 수평선과 작디 작은 아기 잎을 번갈아 바라본다.
하늘이 어느새 훤해 온다. 큰일 났다. 글은 언제 쓰지?
그 여자는 요즘 어디선가 청탁받은 '문학적 자전을 쓰는 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 꽃을 만나보지 않을 수가.
그 꽃이란 그 여자의 부엌 창가의 일일초를 말한다.
일일초 조그만 화분에 드디어 진홍빛 꽃이 핀 것이다.
그 여자는 일일초 꽃잎을 만져주고 잘 보이도록 화분을 돌려 놓는다.
1000원짜리 화분이다.
부엌 창가에 놓인 풍란이며 베고니아등 화분들도 일일초를 응원하는 것 같다.
고맙다. 고맙다고 그 여자는 꽃핀 일일초에게 절을 한다.
하긴 지난 6월에도 세 송이 피었었지만 다 져버린 뒤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절을 해야 할 데가 너무나 많다.
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그 여자를 살아있게 하는 모든 것들에게 그 여자는 절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생각한다. ___ 내가 쓴 시들 중에 그래도 괜찮은 것이 있다면 그저 고마울 뿐,
저 일일초 진홍 꽃잎 하나보다 못한 나에게, 저 풍란 구불구불한 뿌리 5센티보다 못한 나에게.



* 아침 5:00



그 여자는 아직도 글의 첫줄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커피를 마신다,
컴퓨터를 검색한다, 하다가 시 제목 하나를 발견한다. '문학적 자전'은 아무래도 좀더
기다려야겠다. 우선 시를 쓰고......,
그 여자는 마음이 급해져서 그 파일을 연다.


<가을이 오는데 누가>라는 제목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그 우체국은 거기 그대로 있군요, 훨씬 단장이 잘 되어서 골목길도 잘 있군요.

이제는 차들도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빵집은 편의점이 되어 있구요. 로터리에는 탐스런 물줄기가 뻗어 오르고 있습니다.


자장면 집이 하나 새로 생겼군요...... 그 산은 깎여서 길이 되었군요.


그 집은 헐리고 새 이층집이 들어앉았군요. 5층 건물도 하나...... 학원이군요.


단과반. LG대리점도 한개.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꽃집도 한 개, 그 국민학교 자리엔 모르는 10층 빌딩,..........그런데 그 찻집은


그대로 있군요...... 삐꺽거리는 계단도 그대로, 베토벤도 그대로..... 모찰트도


그대로.....비발디가 구름을 끄집어내던 의자도,.......브람스의 탁자도......


흠집 투성이가 되어 앉아 있군요......아니, 물집 투성이가 되어,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저기엔 플라타너스 그늘이 있었는데, 그 그늘을 만지곤 했었는데......



푸른 녹들이 점령해버린 지붕들.... 아 한 번 만져 봅시다....



그런데 지금, 그 우체국 문은 닫혀 있다.



나는 플라타너스 잎을, 잎의 그림자를 질겅질겅 씹는다.


가을이 오는데


누가 기타를 켜네


아무도 없네


아무도 없이



기타를 켜네


'그곳'에 관한 시이다. 그 여자는 우체국이라는 글자를 보자,얼른 H동이 떠오른다.
누구나 어린 시절의 잠들이 묻어 있는 곳은 잊을 수 없겠지만 그 여자에게도 그런 곳은
몇 군데 있다.
그중 아마도 가장 그 테두리가 가장 길게 그리고 진하게 칠해진 곳은 H동이리라. H동 로터리, 그
여자는 그곳의 우체국이며 빵집, 성당, 로터리. 영화 촬영을 하던 골목길, **극장,
도스토예프스키, 전차, 지바고, 이층집, 어느 날 갇혀 버렸던 산길,
꽃밭의 파초...... 그런 것들을 영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우체국은 특히 눈오는 날과 늘 겹쳐 생각나는 곳이다. 왜냐하면 눈이 몹시 내리거나
아주 춥거나 할 때면 학교에서 오다가 그 여자는 거기 들어가 눈을, 잠시 추위를
잠시 피하곤 했기 때문이다. 비오던 날은 비를 피했고........ 그리고 그 앞에서 그 여자는
누구인가를 만나곤 했다. 머플러를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마리아 셀처럼 묶고, 그 우체국 웅성거리는 어둠 속에서 약간 어깨를 으쓱 하며 우체국 앞
로터리 커브 길로 나서곤 했다.
그 여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 여자는 아버지와 식구들 몰래 만나 우미관이라든가 그런 곳으로 전차를 타고 가곤 했다.
우체국에는 늘 어디로인가로 가는 사람들과 소포들과 봉투들이 있었으니까..... .
그 여자는 우체국을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그 유리창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유리창들이 그 갈색 창틀들과 함께 번득거린다. 그 여자는 그 번득거림을 만지려 하는
것처럼 손을 어둠 속으로 내민다. 그러나 어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없다.........

H동 집은 안방 벽장이 갈색 창틀이 달린 유리창들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식 기와집에,
어느 부분의 구조는 일본식으로 개조된.....그런 옛날 집. 그 여자는 식구들이 전부 나가길
기다려 그 유리창이 많은 안방을 점령하곤 했다. 그리고 유리창에 그 여자의 몸짓을 비추어보며
'지휘'를 하곤 했다. 그 여자네 집 문화생활을 대변하는 전축 한 대가 있었기에 그 여자는 식구
들이 전부 나가면 될 수 있는대로 그것의 볼륨을 크게 올려놓고, 그리고 지휘를 했다.
유리창에는 그 여자의 지휘하는 모습이 실제보다 훨씬 근사하게 비춰지곤 했다.
드볼작도 그래서 친했고, 브람스도 그래서 친했다. 지휘를 하고 나면 괜히 큰 일을 하고
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가 우쭐했다. 그때의 버릇은 지금도 남아있다. FM에서 좋은 곡이 흘러
나오기라도 하면 그 여자는 바다를 보고 지휘한다. 수평선을 가슴 께로 끌어 당긴다. 파도의
리듬을 심장의 리듬 곁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H동 집에는 '유리창'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잡풀이 키만큼 자란 사랑채가 있었다. 그 사랑채에는 그 사랑채만의 대문이 달려 있을
정도로 안채와는 결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쓰지 않아서 사랑채는 을시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자는 그리로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군데 군데 구석진 곳에 거미줄이 있던 그 사랑채의 방으로 책상을 옮겼다.
거긴 방이 두개였다. 자그만 뜰이 잔뜩 잡풀들을 안고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그 여자가 살던 한달새 더욱 커버렸던, 그래서 그곳 작은 뜰로 나갈 엄두도
못 내게 했던 그 잡풀들, 그 여자는 그 잡풀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 것들이 얼마나 살찌고
기름져 있었던가를. 아마도 여름 이었을 것이다. 별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되는.
툇마루에 나와 앉으면 빗방울이 파초 잎에 뚜르르륵 떨어지곤 했다. 거기서 그 여자는 소설의
첫머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소설이 어떻게 시작되었던 지는, 지금 그 여자는 다 잊어버렸다.
왜 그걸 썼었는지도......그러나 아무튼 그것은 그 여자가 쓴 최초의 문학적인 글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랑채는 그 여자에게 문학을 주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곧 소설
쓰기를 집어치우고 말았다.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같이는 되지 않았으니까.......그보다,
그 여자는 지금도 그렇지만 진짜 글이란 아마도 완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방을 또 옮기고 노트도 바꿔, 그렇지만.......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도 그랬다. 몇 번이나 집어치웠을 뿐 아니라, 아무도 그 여자가 시 쓴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철저히 감췄으니까, 그래서 항상 '그때 쓰는 시가 마지막 시'이곤 하였으니까.
그런 시를 아직도 쓰고 있다니.......그 여자는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튼 잡풀은 그 이후 그 여자의 시에, 산문에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곳 작은 뜰에 드리웠던 잿빛 하늘과 함께, 아버지의 골목과 함께, 그 여자는 거기서 짙은
생명과 고독과 매혹을 보았다.
그 여자는 그곳을 떠났을 때에도 이 세상의 작은 잡풀들이 그 여자의 피 속으로 걸어들어 오는
것을 허락하곤 했다. 아아, H동.

* 낮 1:00
모래밭으로 나간다. 모래밭이 그 긴 목소리로 그 여자를 부른다. 한없이 부드러운 모래밭,
모래밭으로 나가는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일종의 중독이다. 마약같다. 매혹이다.
'문학적 자전'을 비롯, 몇 가지 글빚 때문에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모래밭으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면 모래밭에는 진한 햇빛과 게가 있기 때문이다. 게를 보면 그 어떤 글이든 첫부분이 스르르
풀릴 듯해서이다.
그 여자는 카우보이처럼 끈이 달린 청색 진 모자를 쓰고 운동화를 신는다.
그 모래밭이 뻘밭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초콜릿빛 모래밭 사방에 작은 구멍이 송송 나있다.
바로 게들의 구멍이다. 구멍 주위에는 동그랗게 토해 놓은 모래흙 덩이들이 소복소복히 쌓여있다.
어떤 것들은 햇빛에 말라서 회색으로 변했다. 무엇인가 희끗거린다. 게들이다. 게들은 바람을
만지러 나왔는지 가끔씩 멈춰 섰다가 또 부지런히 옆걸음으로 달린다. 자기는 똑바로 달리는 줄
알겠지. 그런데 마침 한 마리의 게가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 게를 따라갔다. 어이, 어이,
부르며. 게는 마치 내 부름을 듣기나 한 것처럼, 더 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그림자를 던지며 너무 가까이 오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서서 발들을 하늘을 향해 올렸다.
나는 그것이 왜 그러나 하고 내려다 보았다. 다음의 시는 그러니까, 그 녀석을 내 시에
앉혀 보려고 며칠이나 애쓴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그것의 분노한, 그러나 작디작은 분홍
집게발을 잊지 않으려고. 물론 아직도 나는 그것의 집게발을 완전히 내 시로 포획하지
못했다. 용용, 약이 오르지? 그녀석의 놀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모래밭으로 갔다. 어디인가로 바삐 가는 작은 게 한마리를 만났다.

'어이___ ' 나는 작은 게를 불러 세웠다. 내 그림자가 그 녀석 위로

폭포같이 쏟아졌다.

위험을 감지한 게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그림자를

옮겨주었다. 작은 게는 헐떡거렸다. 그러다 더 도망가도 소용없다고

깨달았는지, 나를 향해 발딱 돌아섰다. 발들이 하늘을 향하여 일어섰다.

그중 한 개가 공중으로 우뚝 올라섰다. 집게발이었다. 분홍집게발, 헉헉

숨소리가 뿌려졌다.

의외의 사태에 놀라 내가 그림자를 조금 옮겨주자 그 녀석은 집게발을 내리고

다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힐끗힐끗 뒤돌아보며. 나는 다시 따라갔다.

그 녀석 다시 분개하여 분홍 집게발 - 위로 한껏 올림 - 나는 잠시 그림자를 치워줌.

그 녀석 다시 달리기 시작. 나 다시 따라감. 그 녀석 다시 집게발, 하늘로 솟구친

작디작은 분홍 집게발.


바람 하나가 지나다가 물었다.

꿈은 원래 그렇게 숨가쁜거야? 하늘 가슴에 솟구친 저 분홍 집게발처럼.



그 여자는 그 <집게발>을 버리고 섬으로 올라간다. 며칠 전부터 그 보라빛이 눈에 활짝 띄기
시작한 엉겅퀴는 섬으로 올라가는 길 옆에 아직도 보라빛으로 피어 서 있다.
풀들은 잔뜩 물이 올라 무서울 정도로 초록으로 빛나고 있다. 그 여자는 물웅덩이를 건넌다.
어제 온 빗물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여자는 웅덩이를 조심히 지나 다리를 건너간다.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이어주고 있는 다리, 다리밑으로는 오랫만에 물이 무성한 풀 사이를
흐르고 있다. 섬에는 다리가 몇개 있다. 흔들다리도 있다.
무덤들도 몇 개 있다. 무덤들은 수풀 속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마치 죽음이 부끄럽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여자는 무덤 하나를 지날 때마다 안녕, 하고 중얼거려 준다. 무덤은 부르르 몸을
떨며 자기의 등에 솟은 풀들을 흔든다. 하긴 이장한 무덤들도 있다. 그런 것들은 동그랗게
가운데가 파인채 하얀 팻말들을 잔뜩 둘러 세우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나타날 때는 손을 흔들어준다.
오늘은 모르는 길로 들어선다. 이 길로 가보자고 생각한 것은 참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항상 그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역시 늘 다니던 길로 갈 걸, 하고 그 여자는 후회한다. 모르는 길이 너무 길다.
돌아서자니 너무 많이 와 버렸다. 마치 등산을 할 때처럼, 도로 내려가기도 곤란한, 너무 많이
와버린 그런 등산길처럼. 수풀사이로 햇빛이 얼룩얼룩하게 비쳐든다.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자들. 길게 자란 풀들........그 여자는 P동을 생각한다. P동 집의 풀들과
그 풀잎에 올라앉던 얼룩얼룩한 그림자의 옷들...그 집은 꽤 컸다. 산 하나가 뒤에 붙어 있었다.
덕분에 뒤곁에는 산길 비슷한 것도 있었고 시냇물도 있었으며 얼룩얼룩한 햇빛 그림자가 많았다.
여름 방학이면 식물채집을 그 뒷산에서 하곤 했다. 신문지 사이에 잎들을 눌러 놓으면 신음
소리가 긴 복도를 울렸고, 잠 속에서도 들리곤 했다.

그런데 그 풀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두 마리의 거위가 그 여자는 생각났다.
그 두 마리의 거위는 세퍼드가 사람을 문 다음에 키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집을 참 잘 지켰다. 낯선 사람이 오면 옷깃을 물고 놓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그 여자는 응접실 커튼 뒤로 그것들의 부리부리한 눈과 잿빛 털, 오렌지빛 부리를
바라보면서 늘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에 빠져들곤 했다. 그것들의 뒤뚱거리는 걸음은
그 여자의 그런 느낌을 더욱 깊게 하곤 했다. 왜냐면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새였으나 날 줄
모르는 새였기 때문이다. 날개는 잿빛 털에 싸여 등에 찰싹 붙어 있기만 했다.
그것들이 날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 커단 것들이 난다면? 그것들의 부리부리한 눈이
구름을 만진다면?
그것들의 검은 눈동자는 구름 속 어디인가를 쓰다듬으며, 그들의 활짝 펴진 날개는 구름 너머
어디인가로 갈 것이다. 어디인가로.
나중 그 여자는 P동 뜰의 그 두마리의 큰 거위가 마치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회상하곤 했다. 그 거위들은 어쩌다 지상에 잘못 떨어진 알바트로스였다.
그 여자는 더 커서는 <비리데기>와 아주 친하게 되었는데, 그 거위___알바트로스들은
이 세상의 정상적인 모든 공간으로의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그 여자가 친하게 된
비리데기의 여러 성격들과 비슷한, 말하자면 소외된 자의 뒤뚱거리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아마도 P동을 떠날 때부터, 그곳의 풀드를 잃은 시절부터 시작된 그 여자의 비리데기성---어제
그 여자는 그 여자의 옛시절의 시들을 다시 읽을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낑낑대면서 그것들을
다시 워드프로세스로 쳤다. 다른 할 일들을 다 제껴두고 말이다. 영 그, 옛시의 뜰을 방문하는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매혹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집을 만드는 곳에서 선한 시중에는
그 여자가 70년대에 쓴 <비리데기의 여행노래>라는 시가 있었는데, 그 시들에는 그 여자가 떠난
집들과 풀들과 그리고 그 거위____알바트로스 날개들의 꿈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그 일곡(一曲)을 소개한다.


비리데기의 여행노래



게 누가 날 찿는가 날 찿을리 없건마는

어느 누가 날 찿는가

베려라 베리데기 던져라 던지데기

깊은 산중 퍼버려라 퍼버려라

(黃泉巫歌 중 '비리데기'의 일절>




一曲 . 廢墟 에서



일어나자 일어나자

저하늘은

네 무덤도 감추고

꽃밭에서는

사람 걷는 소리 들린다.

오늘 아침 바람은 어느 쪽에서 부는지

한 모랭이 두 모랭이

삼세 모랭이 지나가면

사람 걷는 소리는 산 쓰러지는 울음으로 변하고

누워 있는 땅은 조금씩

아, 조금씩 흔들리는데

몸덥힐 햇빛도 없는 곳에서

길은 한켠으로 넘어진다.

그리고 밤이 오면

저 무서운 꽃밭에서 들리는

누구 머리칼 젖히는 소리

옷고름이 탁하고

저고리에서 떨어지는 소리

새벽에도 그치지 않고

잠 속에서는 더 크게크게

그렇구나,나는 어느새

몹쓸 곳에 누워 있다.

달빛도 멀리 지나가 버리는
무덤 위에서
가끔 반딧불 하나가

드러누운 빈 길로 달려나간다.

모래이불을 펴고

오늘밤도 돼지꿈이나 기다릴까.

산이 바다로

다시 산으로 설마

변하지는 않겠지만

한 마리의 배고픈 돼지는

만날 수 있으리라.

열 두 모랭이 눈감고 기어가면

어디서 울고 있는 신령님이라도

만나지 않으리.

꽃밭에서 아직

걷는 사람이여

어디에 누울까 누울까 말고

가벼히 떨어지는 옷고름위에

하늘과 함께 나의 뼈를 뉘어다오.

가만히 소리나지 않게

발자국도 없이 一世紀를.


그 여자는 이제 하루의 순례를 끝낸다. 항상 순례의 끝에선 비리데기와 만난다. 그 여자의
비리데기는 언제나처럼 '피 샐 꽃, 살생길꽃, 숨터질꽃'을 가지고 온다. '시영산 약물'을 가지고
온다. 생명의 여신으로서의 비리데기, 매혹의 여신으로서의 비리데기. 그 여자는 생큐, 생큐하고
중얼거린다. 새삼 일일초에 절을 한다. 거기 벤자민 가지에 걸어놓은 종을 한번 흔들어 준다.
종에는 다섯개의 작은 종과 한 개의 큰 종이 달려있다. 아주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생큐,
이 모든 매혹에 생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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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처럼 아름답게 출렁이는 시인---강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