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가?

by 정회근(J J) posted May 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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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경험과 교회의 경험                                                     저자: 강명수 장로

요즘 생애의 빛에서 세계 경제가 몰락해 가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예수께서 오실 때가 매우 가까웠다는 말씀을 전하자, “성경에 어디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계 경제가 파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가?”라는 질문들이 나오고 있다. 세계 경제의 몰락은 예수께서 곧 오신다는 징조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세상 끝에 경제적 파탄이 올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가?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잠시 그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오른쪽 박스에 제시된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마다 마지막 시대에 세계 경제에 극심한 어려움이 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세계 경제의 극심한 어려움이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나타나는 징조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걸어야 할까? 신앙은 길을 걷는 것이다.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질문-숫자)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3-24).

“그리스도인 생애에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부드러운 인내, 온유, 친절이라는 말 가운데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은혜들이 필요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보다 용기와 힘과 활동력과 불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길은 좁은 길이요 자아 부정의 길이다. 이 길에 들어가서 시련과 낙담을 제압하려면 연약함을 능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전도, 479)

그리스도인은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고, 또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 통과해야 할 그 문과 길이 어떤 길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을까? 또 그것이 얼마나 좁기에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하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왜 좁게 느껴질까? 이러한 질문들은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림 교회의 선구자들에게 재림교회가 남은 교회로서 갖고 있어야 할 중요한 진리들을 주셨다. 복음과 계명에 대한 이해, 안식일 문제, 영혼과 죽음의 문제, 마지막 시대를 위한 예언 문제 그리고 성소 기별 등등…. 이러한 진리들을 보여 주시면서 그 진리를 붙잡고 길을 걸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경험을 통과하게 될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진리를 주시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또한 계시를 통하여 보여 주신 것이다.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한 하나님이신가?

1868년, 화잇 부인은 좁은 길에 관한 계시를 꿈을 통하여 받았다. 그 계시는 장로교인이나 감리교인들이 걸어야 할 길에 대한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남은 교회에게 주신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계시이다. 개인이 통과하게 될 영적 경험 뿐 아니라 재림 교회가 통과하게 될 어둠의 경험을 경고하고 있다.

300년 전 존 번연은 베드포드 감옥에서 천로역정이라는 역작을 기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인생의 길을 묘사했는데, 화잇 부인의 이 꿈은 마지막 시대에 재림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로역정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지만, 화잇 부인은 좁은 길을 “짐을 버려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였다.

인상적인 꿈 (교회 증언2권, 594)

인상적인 꿈: “1868년 8월, 배틀크릭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꿈을 꾸었다. 이 모인 무리 중 일부는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진리를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중 적은 무리만 좁은 길의 여행을 떠나려고 준비하였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매력이 없어 보이고, 가시와 찔레가 있는 길처럼 보여서 그 길을 걸으면 고생을 심하게 할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쾌락을 부정하도록 요구하는 길이기 때문에 매우 좁게 느껴진다. 그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주께 사로잡힌 자들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넓은 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용모와 의복과, 그 길에서 얻는 쾌락 등에 몰두한다. … 왜 극기와 겸손의 생애가 그처럼 어려운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하는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을 살기가 더 쉽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애굽의 파와 마늘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세상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늘에 가고 싶어한다. 그들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들은 좁은 문과 좁은 길로 들어가지 않는다.”(청년, 126)

넓은 길을 걷다가 처음 좁은 길을 들어설 때에는 용모, 옷, 말, 행동, 애굽의 음식들이 이슈가 된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치 좁은 길의 여행에 있어서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여행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좁은 길 여행에 있어서 시작일 뿐이다. 좁은 길을 가면 갈수록 투쟁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에서 마음속에 있는 문제로 옮겨진다.
인상적인 꿈: “우리는 짐이 무겁게 실린 마차들을 갖고 있었다.”

좁은 길을 여행하는 마차 속에 실린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 이기적인 자아의 짐이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짐이 된다. 왜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가?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떤 사람도 자만과 자기 의지와 기만과 거짓과 부정직과 정욕과 더러운 욕정의 짐을 가지고는 이 길을 걸어갈 수 없다. 이 길은 매우 좁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뒤에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넓은 길은 죄인들이 자신의 온갖 죄악된 성향을 지니고 여행할 만큼 충분히 폭이 넓다.”(교회 증언 4권, 364).

넓은 길에서는 짐을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늘 가는 길이 좁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끌고 가는 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늘 가는 길을 일부러 좁고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좁은 길이 아니라 내가 마차에 싣고 가는 짐이, 등에 지고 가는 짐이 너무 많아서 길이 좁고 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해야만 진리와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없어지게 된다.

인상적인 꿈: “길 한편으로는 깊은 낭떠러지가 있었고 다른 편은 높고 미끄러우며 흰 벽이 마치 석회로 마무리해 놓은 방의 벽과 같이 있었다.”

여행길의 한편에 있는 깊은 낭떠러지는 무엇인가? 진리와 예수님께 대한 첫사랑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위험을 만나게 된다. 진리를 선택하지 않고 오류를 선택할 때마다, 좁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넓은 길을 선택할 때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때로는 잘못된 복음을 따라감으로써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다. 진리가 요구하는 시련과 희생이 두려워서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둠 가운데로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도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문제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똑같은 문제와 시험을 계속 허락하신다.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문제를 갖고 있는가? 습관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계속 실패하는가? 우리가 그 문제를 정복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같은 종류의 문제들을 우리의 생애 속에 계속해서 허용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는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시험에 빠지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쪽에 있는 매우 미끄러운 하얀색 벽은 무엇일까? (질문) 그것은 순결한 의를 상징하는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누추한 인간의 의로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매우 높고 미끄러운 벽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좁은 길의 시작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법을 잘 배우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생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습관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좁은 길을 걸으려고 애를 쓸지라도 오랫동안 넓은 길을 걸어왔던 습관 때문에 자꾸 실수하게 된다. 좁은 길의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인간의 의가 있다. 그리스도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자마다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자. 선과 악의 투쟁 속에서 처절한 실패와 낙담을 경험한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된다. 그들은 세상의 좁은 길을 걸으며,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동안 쓰라린 투쟁을 경험한다. 그들은 극기를 감내해야 하며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죄의식을 일깨워 주고 죄로 인한 비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므로, 그들은 죄를 가증하게 보게 된다.”(산상 수훈, 30).

인상적인 꿈: “길을 계속 갈수록 길은 더욱 좁아지고 가파르게 되었다. 어떤 때는 너무 길이 협착해서 짐을 실은 수레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장소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수레를 떼어 내고, 수레에서 일부의 짐을 내어 말 등에 얹고 말을 타고 길을 계속 갔다.”

길이 점점 좁아지고 가팔라지는데 여행객은 짐을 버리지 않는다. 길이 좁아져서 수레를 버려야만 전진할 수 있는 곳에 이르러야만 할 수 없이 수레를 떼어 버리게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수레를 버릴지라도 버리고 싶지 않은 짐들은 꺼내서 말 등에 옮겨 싣는다.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좁은 길의 긴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길이 좁아질 때마다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대열에서 낙오하게 된다.

되돌아가는 사람들: 길이 점점 좁아지고 가팔라지자 계속해서 수레에서 짐을 내려놓아야만 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내려놓을 수 있고 내려놓아도 별문제 없는 짐들을 내려놓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아끼고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수레를 떼어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들이 생긴다. “수레까지 버릴 바에야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말머리를 돌리는 여행객들이 생긴다.

주저앉아 쉬는 사람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길이 좁아져서 수레를 절벽 아래로 버려야만 했을 때, 그 자리에 마차를 세우고 쉬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마차에 실려 있는 짐들에 대한 애착과 마차가 주는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길이 좁아질 때마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이제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까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쉬자!"라고 말하면서, 마차에 걸터앉아 쉬기로 결정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좁은 길을 전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좁은 길을 막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좁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니고 아예 넓은 길을 찾아서 가 버리지도 않는다. 좁은 길의 여행자들 속에 섞여서 그 길의 여행을 방해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도 기만하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도 방해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전진 아니면 퇴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 따르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아니한다. 넓은 길에도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나오길 열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애착과, 교만과, 성화 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과 구주 사이에 담이 된다.”(산상 수훈, 143).

인상적인 꿈: “우리가 전진할수록 길은 더욱더 좁아졌다. 우리는 좁은 길에서 벗어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벽에 꼭 붙어서 가야 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 말 등의 짐이 벽 쪽으로 쏠리는 바람에 우리는 절벽 쪽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하늘이 가까울수록 길은 더욱더 좁아진다. 길이 좁아지기 때문에 벽쪽으로 바짝 붙어 있지 않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길이 좁아져서 매우 위험한데 말 등의 짐을 모두 버릴 생각은 안 하고 벽 쪽에 붙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행객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짐을 포기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달라고 하신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절대 놓지 않는다. 말 등에 앉아서 짐을 꼭 붙잡은 채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고난과 시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통과해야만 짐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벽에 붙어 있는가? 그것을 내려놓아야 생명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다.

설교가 없고 성경 공부가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바닥부터 뒤집어엎는 시련과 고통이 없으면 우리는 깊이 숨겨져 있는 이기심과 탐욕의 정신을 알 수 없고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속상함과 원통함이 우리의 영혼을 뿌리부터 흔들어 대는 시련을 만나야만 어쩔 수 없이 짐을 내려 놓게 된다.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노예 상인에게 팔려서 모래 사막 길로 끌려가는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무런 죄 없이 수년 동안 사울 왕에 쫓겨 다니면서 온갖 시련을 당했던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구원받은 모든 자들의 생애 속에 그러한 시련들이 있지만, 그들은 기도를 통하여 이기심과 탐욕과 속상함과 원통함과 복수심의 짐들을 절벽 아래로 버린 사람들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 18:28). 언제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의 등불을 켜시는가? 언제 하나님께서 내 영혼의 흑암을 밝혀 주시는가? 죄에 넘어진 내 자신이 싫어질 때이다. 세상에 지쳐서 세상이 싫어질 때이다. 세상 쾌락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때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배반당해서 하늘의 하나님이 그리워질 때이다. 하나님이 그리워서 엎드려져 기도할 때이다. 이럴 때 주께서 오셔서 우리의 영혼 속에 등불을 밝혀 주심으로써 흑암을 내몰아 주신다.

“우리는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는지 모르나, 이것을 우리가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증거로 삼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다. … 기도의 정신과 습관을 계발하지 않는 이들은 양선, 인내, 오래 참음, 온유, 사랑의 황금 기름을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의 의로운 품성 속에서 당신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 곧 영생의 가치에 부응하는 인내성 있고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없이는 우리들 중에 아무도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목사, 511).

인상적인 꿈: “우리는 바위 위에 떨어져서 가루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짐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렸다. 우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을 타고 계속 갔다. 우리가 더 좁은 길로 들어서서 우리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짐을 버리지 않으면 바위에 떨어져 가루가 될 수밖에 없는 좁은 길에 도달해야만 짐을 버리게 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가루가 될 것을 염려할 만큼 좁은 길이 나타날 때까지 결코 짐을 버리지 않는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말을 계속 타고” 가려고 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좁은 길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상적인 꿈: “우리가 더 좁은 길로 들어서서 우리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어떤 손이 나타나 고삐를 쥐고 위험한 길을 벗어나게 하는 것 같았다.”

좁은 길을 걷다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사단의 기만에 속아서 거짓 복음을 받고 어둠 속에서 헤맬 때, 넓은 길로 끌고 가려는 사단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애를 쓰지만 균형을 잃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려 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서 내가 타고 있는 말고삐를 잡아 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언제 나타나는가를 잘 보아야 한다. 좁은 길을 걸으면서 짐을 계속해서 버려 온 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난다. 빛이 증가할 때마다 성령의 호소를 들을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짐을 버려 온 사람들에게 말고삐를 잡아 주는 손이 나타난다. 물론, 그들은 아직 말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길이 좁아질 때마다 꼭 버려야 할 짐들을 버리면서 여행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말고삐를 반드시 붙잡아 주신다.

넓은 길을 걷고 있는 여행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을 짐들과 마차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넓은 길을 걷는 여행자들은 탐욕과 방종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거절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서 인도해 주지 않는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좁은 길에 대한 화잇 부인의 꿈을 읽은 어떤 사람이 한번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화잇 부인이 보았던 좁은 길에는 수레와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것들이 아닌가요?” 그리스도인이 처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 문이 너무 좁아서 자기 자신만 겨우 들어가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 문은 마차와 말을 끌고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그러나 좁은 문을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하면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짐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것은 짐이 가득 실린 수레가 될 수도 있고 말도 될 수 있다. 좁은 길에서 그러한 것들을 끌고 다니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좁은 길의 여행은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짐들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좁은 길은 내 속에 숨겨져 있던 죄들이 드러나는 조사 심판의 과정이다.

인상적인 꿈: “길이 더욱 좁아지자 말을 타고는 더 이상 안전하게 가지 못하리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말들을 버리고 도보로,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의 발자국만 밟으면서 전진하였다.”

좁은 길의 끝 부분에는 말까지 버리는 지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말과 마차 걱정은 하지 마라. 너희들은 조금 올라가다가 말과 마차뿐 아니라 모든 짐을 버려야 한단다."라고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까?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을까?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뒤엉켜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비록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모든 짐들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한꺼번에 버릴 수 없다. 그분께서는 한 번에 한 계단씩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좁은 길에서 새로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이기심의 짐보따리들을 버리도록 인도하신다.

신앙은 길을 걷는 것이다. 말까지 버리는 좁은 길에 가야만 우리는 드디어 내 발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마차를 타거나 말을 타고 왔지만, 이 지점에서부터는 내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직 말까지 버린 경험이 없는 것이다.

이 지점부터는 한 줄로 서서 길을 가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경험을 가지고 하늘 가는 길을 여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영적 경험은 하나이다. 그들이 믿는 진리가 하나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체험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은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면서 한 줄로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좁은 길의 이 지점에서부터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인도하시는 장면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인상적인 꿈: “이 순간에 순백색의 벽 꼭대기에서부터 작은 줄들이 내려왔다. 우리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줄들에 단단히 매어 달렸다. 우리가 계속 나아갈 때에 줄들도 움직였다.”

“이 순간에” 하늘에서 작은 줄들이 내려왔다고 했는데, 이것이 어떤 순간인가? 이 줄이 언제 내려오는지가 중요하다. 언제 내려왔는가? 마차 버리고, 짐 버리고, 말까지 버리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벽을 의지한 채 길을 걷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다. 그 줄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줄이다. 믿음으로 좁은 길의 여행을 계속 전진할 때 그 줄도 움직이면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줄이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진하기로 결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 줄은 우리의 방향을 인도해 준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줄이 내려온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인도해 주신다. 길이 너무 좁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에서 내려온 밧줄에 자신의 체중을 싣고서 걸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발은 땅을 밟고 있지만, 실제로는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땅을 여행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의 줄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을 여행하는 재림 성도들의 모습이다.

인상적인 꿈: “그 길은 마침내 너무 좁아져서 우리가 신발을 벗어 버려야만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발을 벗어 버린 채로 얼마를 갔다. 이윽고 우리는 양말을 벗어야 안전하겠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맨발로 길을 갔다. 그때 우리는 궁핍과 곤란함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그들은 여행의 대열 속에 없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몇 명씩 낙오하였다. 난관을 견디는 데 익숙한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길의 어려움이 목적지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만 하였다.”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볼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러한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취급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좁은 길에는 극단과 이단의 오명을 쓰고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타난다. 궁핍과 곤란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이 지점에 오기 전에 모두 낙오되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익숙한 사람들만이 이 지점까지 올 수 있다. 어떤 어려움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려움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다. 육적인 고란함과 영적인 곤란함을 극복하는 데 익숙해질 만큼 잘 훈련된 사람들만이 이 지점까지 올 수 있다.

좁은 길의 끝에 거의 도달하게 되면 너무나 좁아져서 미끄러져 떨어질까 봐 신발뿐 아니라 양말까지 벗어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구태어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매우 미끄럽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야 한다.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어야 하는 상황은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과 섭리까지도 받아들이며 여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좁은 길의 여행에서 이 지점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게 되는 단계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누구에게도 이해와 동의를 구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주의 영이 양심을 통하여 마차를 버리라고 요구하면 마차를 버려야 하고, 말을 버리라고 요구하면 말을 버려야 한다. 진리가 인도하는 길이 좁아져서 등에 짊어진 짐보따리를 버리라고 요구하면, 주저 없이 그것을 버려야 하며, 좁은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고 요구하면,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이것이 하늘 가는 길이다.

인상적인 꿈: “길에서부터 떨어질 위험이 더 커졌다. 우리는 흰 벽에 바짝 붙었다. 그렇지만, 너무 길이 좁아져서 발을 제대로 디딜 수도 없었다. 그러자 우리는 모든 체중을 그 줄들에 매달고 소리쳤다. “위에서 잡아준다! 위에서 잡아준다!” 그 좁은 길에서 모든 일행이 같은 말로 소리쳤다.”

이 단계에서는 흰 벽으로 상징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진할 수 없다. 길이 너무 좁아져서 발로 길을 딛고 걷는 것이 아니라 벽에 붙어서 밧줄에 매달려서 전진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 음성으로 “위에서 잡아준다.”라고 소리치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붙잡고 있는 것이 허상이라면 무슨 낭패인가? 자신들의 고생과 고난에 아무런 열매와 보상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래서 그들은 “위에서 잡아준다.”라고 소리치면서 스스로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것이다.

인상적인 꿈: “우리가 저 아래 무저갱에서부터 들려오는 환락과 떠드는 소리를 들을 때에 전율을 느꼈다. 우리는 신성 모독적인 맹세와, 저속한 농담과, 저질스런 노래들을 들었다. 우리는 전쟁 노래와 춤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기악과 큰 웃음이 저주소리와 고뇌와 비통의 울부짖음과 섞여 들려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우리는 험하고도 좁은 그 길에 더욱 붙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여러 번 우리는 온 체중을 그 줄들에 의지해야 하였고, 그것들은 점점 굵어져 갔다.”

화잇 부인의 꿈은 재림 성도 각 개인뿐 아니라 재림 교회가 걸어가는 길을 묘사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절벽 아래에서 캄캄한 곳에서 넓은 길을 걷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이다. 넓은 길을 걷고 있는 교회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이다. 환락, 떠드는 소리, 저속한 농담 그리고 저질스런 노래, 전쟁 노래와 춤 노래. 교회 안에서 드럼을 때리고, 전기 기타를 치니 그것은 마치 화잇 부인에게 있어서 전쟁터의 노래나 댄스홀에서 부르는 노래처럼 들렸을 것이다. 가려 뽑은 기별 3권에서 화잇 부인은 은혜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재림 교회 안에 드럼과 기타를 시끄럽게 연주하는 축제 예배가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좁은 길에 대한 화잇 부인의 꿈에도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인디애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대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가려 3, 36.)

좁은 길의 이 단계에서 재림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이상한 소리들을 듣게 된다.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서 “저속한 농담과 저질스런 노래들과 전쟁 노래와 춤 노래 … 기악과 큰 웃음”소리를 듣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소리와 고뇌와 비통의 울부짖음”을 듣게 된다. 자유주의 복음과 축제식 예배 때문에 고통당하는 영혼들의 울부짖음이다. 이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재림 교회 속에 축제 예배가 들어오게 될 때, 좁은 길을 여행하는 우리 각자의 경험은 마차와 말을 버리고 내 발로 걸으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에 의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낭떠러지 아래 어둠 속에서 “전쟁 노래와 춤 노래”가 들려오는 지금 여러분의 영적 경험은 어디에 있는가?

재림 교회가 이러한 상황 속에 있을 때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밧줄은 점점 더 굵어져 간다. 왜 그럴까? 밧줄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다. 좁은 길의 끝이 가까울수록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하늘에서 내려온 줄에 점점 더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세상 끝이 가까울수록 교회는 자유주의 복음으로 인해서 점점 더 어두워져서 가서 축제 예배가 들어오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교회가 이렇게 어려울 때 이 세상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져서 좁은 길의 여행자들은 교회도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도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이 된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만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단계가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상적인 꿈: “나는 그 아름답고 흰 벽이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벽이 얼룩진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그것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사라졌다. 뒤에 오는 이들이 이미 남들이 이 어려운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만일 남들이 갈 수 있었다면 그들도 역시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아픈 발에서 피가 나올 때에라도 좌절하여 쓰러지지 아니할 것은, 벽에 있는 피를 보고서 남들도 똑같은 고통을 견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의 여행자들은 누구나 똑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앞서 간 사람들이 마차를 버리면 나도 그 지점을 통과할 때 마차를 버리고, 앞사람들이 양말을 벗으면 나도 그 지점을 통과할 때 양말을 벗어야 한다. 앞사람들의 발에서 피를 흘렸으면 나도 그곳을 통과할 때 피를 흘려야 한다. 나만 특별하게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나가는데, 나만 홀로 온갖 시련 속에서 사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넉넉하다.

좁은 길이란 예수께서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피 흘리면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좁은 길이다. 그분께서는 안전하게 지나가셨으므로 우리도 그 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인상적인 꿈: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길이 끝나는 큰 구렁에까지 왔다. 이제는 발을 놓을 곳이 없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 줄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들은 점점 굵어져서 이제는 우리들의 몸처럼 굵어졌다.”

좁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큰 구렁”은 일요일 강제 휴업령(짐승의 표 환난)을 뜻한다. 우리 앞에 일요일 휴업령이라는 큰 구덩이가 나타날 때 우리의 경험은 어떠해야만 할까? 그때 우리가 붙잡고 있는 줄은 몸통처럼 굵어져 있어야 한다. 줄이 얇을 때에는 손으로 잡지만 줄이 몸통처럼 굵을 때에는 온몸으로 부둥켜안아야만 한다. 이것이 짐승의 환난을 맞이하는 신앙 자세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장면은 좁은 길이 끝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좁은 길의 여행 과정을 살펴볼 때 현재 우리의 위치는 재림 교회 안에서 축제 예배 소리가 들려오는 지점과 “큰 구덩이”로 표현된 일요일 휴업령 사이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재림 교회 안에서 “전쟁 노래와 춤 노래”가 들려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일요 휴업령이라는 “큰 구덩이”이다. 좁은 길에서 만나게 되는 마지막 관문이고 시험이다.

인상적인 꿈: “여기서 우리는 난관과 걱정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두려워서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이 줄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을까?” 나의 남편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구슬 같은 땀이 떨어졌다. 그의 목의 핏줄과 눈동자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커 보였으며 고뇌의 신음 소리가 입술을 통해 새어 나왔다. 나도 얼굴에 땀이 흘렀으며, 전에 결코 느껴보지 못하던 고뇌 가운데 빠졌다. 무시무시한 투쟁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만일 여기서 실패한다면, 우리는 여행길의 모든 난관을 헛되이 겪은 셈이 되고 말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경험인가? 일요일 휴업령을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경험임이 틀림없다. 일요일 휴업령이 발효되면,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지만 동시에 하늘은 매우 가깝고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오게 된다. 하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짐승의 표 환난이 시작되고 7재앙이 내리며 야곱의 환난을 통과할 때 좁은 길 여행자들의 경험은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지만, 하늘을 실제적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인상적인 꿈: “구렁 건너편에는 거의 6인치 정도의 풀이 자라는 아름다운 초장이 펼쳐 있었다. 나는 태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순금 빛과 은빛의 밝고 환한 광선이 이 들판 위에 비취고 있었다. 이 땅에서 내가 본 그 어느 것도 이 들녘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비교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큰 의문이었다. 만일 줄이 끊어지면 우리는 죽는다. 다시 속삭이는 말로 “무엇이 줄을 잡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얼마 동안 우리는 모험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리고서 우리는 소리쳤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은 험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의지가 되어 왔다. 이제 그것은 우리를 패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주저하며 근심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말이 들렸다. “하나님께서 줄을 잡고 계신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우리 뒤에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반복되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지금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셨다.”

하늘을 실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까지 왔지만, 재림 성도들은 야곱의 환난을 통과해야만 한다. 자신이 잡고 있던 줄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에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우리를 붙잡아 줄 것이다.

인상적인 꿈: “그러고 나서 나의 남편이 줄에 매달려 구렁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들에 내렸다. 나는 즉시 그 뒤를 따랐다. 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승리의 찬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행복하였다. 온전히 행복하였다. 나는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어려운 길을 행하느라고 겪었던 걱정으로 인하여 내 몸의 모든 신경이 떨리는 것을 알았다. 이 꿈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은 내 마음에 강한 인상을 주어서 내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아마도 모든 내용이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맺는 말
화잇 부인이 기록한 “인상적인 꿈”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지금 재림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경험이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숙고하게 한다. 다음과 같은 글을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남김으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나는 총회에 모인 무리들을 보았다. 그때에, 천사는 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충이 먹고,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살아남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승천하게 될 것이다. 천사가 한 이와 같은 말들은 너무 엄숙했다. 나는 그 천사에게 왜 영원한 생명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그처럼 적고, 마지막 변화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적은지 물어보았다. 그 천사는, ‘세상이 그들에게 매력이 있고, 세상의 보화가 그들에게 가치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것들을 발견하므로 하늘을 위하여 준비할 시간이 없다. 사단은 그들을 어려움 가운데 점점 더 깊이 빠뜨릴 준비를 언제나 갖추고 있다. 한 가지의 어려움과 고통이 마음에서 떠나가면, 그는 즉시 그들의 마음속에서 세상에 속한 더 많은 것들을 바라는 거룩하지 못한 욕망이 일어나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너무 늦게, 사실상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실체가 없는 것들을 붙잡았으나 영생을 상실하였다. 그와 같은 자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교회 증언 1권, 131)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경제와 재림의 징조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욜 1:15-18, 12).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모습 속에서 세상의 경제가 무너지는 장면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merchants,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계 18:2-3).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데, 제일 먼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버린 타락한 교회가 무너진다. 어떻게 해서 무너지는가? 세 천사 기별이 그들의 음행과 거짓을 정확하게 폭로하기 때문에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도주에 취한 땅의 왕들과 나라들이 무너지고 그들과 더불어 음행한 상고들, 즉 경제 세력들이 무너진다. 이것이 바벨론이 무너지는 과정이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매우 짧은 시간, 신속하게)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땅의 상고들(merchants)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계 18:10-11).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5-19).

세상 종말에 바벨론이 무너질 때에 그것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상고들, 즉 경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짐승의 표 환난은 경제적인 압박을 가하는 방법으로 내려지게 된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