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한조각의 추억

by 정하늘 posted May 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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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매일 가던 그 길을 걷는데도 익숙함속에 낯설음이 묻어나는 때가 있다
항상 느껴왔던 것에 새로움이 피어나는 순간이다
내게 있어 여행은 이 느낌을 증폭시켜 날 떨리게한다

이번 여행도 내게 예외는 아니였다
어쩌면 내가 느낀 것은
새로움속에 가만히 숨쉬는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포도빛 하늘에 난 시작을 느꼈다
어제부터 날 그렇게 설레이게 하던 여행의 시작
새로운 것을 느낀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벅찬 일이지만
내게는 만남과 헤어짐이 더 익숙해져 만남전에 헤어짐을 생각해야했다

내 마음은 이미 젊음이 사라지고 희망조차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기차에 올라 울퉁불퉁한 음악이 내 귀를 쳐댈때도
내 눈에는 오직 창밖으로 흩어져가는 풍경만이 짙어갔다
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넓게 펼쳐진 평화로운 들녘을
한참동안 바라본 후에야 다른 풍경을 눈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어느 하나도 뾰족한 모서리를 보여주지 않는 기와
햇빛에 비쳐 초록등을 환히 비추는 나뭇잎이
눈가에 잔해를 조금씩 벗겨내려졌다

일직선의 소리가 내 귓가를 드나들고 있음이 느껴졌다
바위덩어리 같은 소음들이 나를 때려대고
까맣던 아스팔트는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콜라의 탄산방울이 내 몸을 휘집고 돌아다니다 지쳐
내 목구멍을 향해 손짓할 때까지
난 허공에서의 감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창밖에 보이는 해안선과 멍멍한 귀가 그 느낌이 거짓되었음을 알렸다
내몸의 잔해들을 남김없이 휘돌아 날려보내는 이 느낌들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바람의 자락
신록이 물씬 풍기는 향기 가득한 바람이다

이 바람이 내 몸을 감싸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무엇인가를 보상받은 느낌이였다

심술궂게 하늘은 바람 사이사이로 빗줄기를 꽂았다
몸서림을 치는 바람이였지만 역시 역부족이였다
빗줄기에 꽂혀 몸을 흔들어대는 바람이 두렵기까지 했다

따가운 빗방울속에 간신히 뜬 작은 틈새로
그 거대한 풍경을 바라보았을 때
난 내가 지금 숨쉬고 있는 이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혼자서 떠도는 여행이란 그렇더라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최소한의 시간조차 아까워
이 진경을 느끼는데 다 써버리고픈
그런 사치스런 충동을 느끼게 하더라

예전 같으면 동호회에서 떠들어 댈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며
쉴새없이 피고 지는 새로운 풍경에
두눈을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나그네임이
짜릿한 실감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단지, 홀가분 한것만은 사실이다

바람소리 청량한 숲길을 따라 무한하게 펼쳐진 해변을 따라
발길 닿는데로 걷고 또 걸어가는 자유로운 시간속에서
지난날의 어설픈 추억들이 시린 가슴속에 신선한 충동으로 다가온다

어제의 미묘한 잿빛하늘과는 달리 새파랗게 쏟아지려는 하늘이 반가웠다
지난날 여행의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임을 지나
익숙함으로 다가오려 하는데
그 길을 마지막이란 단어가 굳게 막고 서서 날 쪼아댔다

하얀 거품을 가득 물고 떠나려는 내 발길을 잡으려는 파도의 손짓에
난 그저 손을 담그며 실낱같은 희망으로 다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멍울진 하늘 위로 쉴새없이 눈물을 흘러내렸다
마치 내 추억이 완성되는 것을 아쉬워나 하듯이...

어쩌면 혼자서 떠도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길에서
그시절 그 추억들이 내 황량한 가슴에
아름답게 피어날 시간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이제서야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잃어버린 추억 한 조각을 찾았다
이 한 조각 때문에 난 지난 봄이 깊어가도록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다

이제 서글펏던 지난날의 추억이란 이름의 퍼즐이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는 내 모습에서
나는 이미 젊음을 소비했고 이제는 늙어 간다는 것을 느낀다

다만 쇄잔해져가는 몸의 무게만큼 정신적인 풍요를 찾을 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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