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 잃어버린 에덴의 “안식일”을 십자가로 회복하다.
성경에는 3 종류의 안식일이 있다.
1, 에덴에서, 창조를 끝내신 후의 본래의 “창조 안식일”- 죄로 잃어버렸다.
2, 갈바리에서, (재)창조를 끝내시고 잃어버렸던 안식일을 회복하신 “재창조 안식일”
3, 시내산에서, 주신 “넷째 계명 안식일”은 잃어버린 에덴의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표징(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언약과 표징으로서의 안식일”일 뿐이다. 다음 말씀을 보면 넷째 계명이 하나님의 약속(언약)이며 상징(표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출31:16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요약 - 창조가 끝나고에덴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누렸던 본래의 “안식일”(“창조 안식일”)을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다. 죄와 안식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과 인간이 다시 안식을 함께 누리시기 위하여 그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 목표였다. 그 안식일의 회복은 죄를 없애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을 아들의 피로 죄를 없애시고, 죄로부터 구원하여 살리시고 재창조하시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면(고후5:17) 마침내 에덴의 안식은 다시 회복 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어버렸던 안식일의 회복을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그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기록하신 “언약의 돌판”(십계명)을 시내산에서 주시고(신9:9) 아들의 피를 상징하는 희생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림으로 약속하셨다.(출24:8). 이 피 뿌림은 아들의 피로 에덴의 안식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약속(언약)을 백성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매주 일곱째 날(토요일)을 다시 회복하실 안식일을 표징(상징)하는 날로 삼아주셨다.
마침내 때가 차매(갈4:4) 넷째 계명으로 주신 그 약속대로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그 안식일을 갈바리에서 완전히 회복하셨다. 그날이 바로 십자가의 날, 구원의 날이었으며 동시에 그 영원한 안식이 다시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곧 “옛 계명”(십계명, 옛 언약)에 포함된 넷째 계명의 언약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이제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자들은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히4:3) 예수께서 주신 “새 언약”(새 계명)을 받아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롬8:4)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넷째 계명의 토요일 안식일은 십자가로 이미 완성된 옛 계명이 되었으므로,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들의 가슴 속에 기억될 것이다.
“안식일”이란? - 창조와 직결된 날이다.
안식이란, “죄가 없을 때에”, 그리고 “일이 끝났을 때에” 가지는 쉼이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하시는 일”이다.(창2:2)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쉬신 에덴의 안식일은 ‘창조하시는 일’과 직결되어 있었고 창조하시던(지으시던) 일이 끝난 때이다.
창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2:3~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일” = 창조하시는 일
여호와의 “창조 안식일”- 극치의 행복이 깃든 “에덴의 본래 안식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을 받아드릴 수 있는 인격적 대상이 필요하셨다. 그 사랑의 대상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만드실 때까지는 사랑의 하나님은 일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창조하시는 일을 끝내시어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시며 쉬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극치의 행복이었다. 이 극치의 행복을 누리시며 쉬시는 날이 “창조 안식일”(에덴의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의 첫 안식일은 하나님의 일, 곧 창조하시는 일이 끝나고 “하나님이 쉬신 날”, 곧 “창조 안식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일이 없었다면 안식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에덴의 “창조 안식일”의 주인은(마12:8) 당연히 창조주이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안식일” = 인간의 창조가 끝난 날
안식의 3 요소
땀에 젖은 잉태의 고통 끝에 태어난 아기를 품고 젖을 물리는 순간에 엄마가 느끼는 생애 최고의 행복이 깃든 안식과 같은 그런 안식이었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아기가 없는 엄마의 안식은 있을 수가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이 지구의 에덴에서 그 극치의 행복이 깃든 “창조 안식일”을 누리신 때가 바로 창조가 끝나서인간(아담)을 품에 안으신 바로 그 에덴의“일곱째 날”이었다. - 바로 이 “창조 안식일”에하나님이 누리신 그 극치의 행복은 결코 잊을 수도, 잃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창조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지만 그 안식일은 결국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었다.
막2:27~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따라서 참 안식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는, 1, 하나님, 2, 창조의 마침, 3, 창조된 인간이 함께 할 때에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창조 안식일”(본래의 안식일)
에덴의 “창조 안식일”은 한 단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날과 그 안식은 영원한 것이었다. 그 안식은 죄로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죄로 중단되었다. “창조 안식일”은 상실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나버린 “죽은 자”(죄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사랑을 주시며 함께 하나님이 누리시던 그 극치의 행복이 깃든 그 “창조의 안식일”이 없어져 버렸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더 이상 사랑을 주시며 안식하실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영원히 사랑을 누리시려던 행복한 안식, 곧 그분의 창조의 목적 자체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 안식의 3 요소 중에 두 가지가 빠져버린 것이다. 창조된 인간이 없어졌고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어 다시 창조(재창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다시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상 목표 - 죄인의 재창조로 이루는 “안식일 회복”
이제 하나님은 그분의 행복의 극치였던 그 “창조안식일”을 반드시 회복하셔야만 하셨다. 이것이 범죄 후의 하나님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잃어버린 “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시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피로 죄를 없애시고 “죽은 자”인 죄인을 생명을 주시어 재창조하시는 길밖에는 없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아들의 피로 죄인을 다시 살리시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어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도록 하시는 재창조의 길이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시어 그분의 소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가 들어온 직후부터 “다시 창조하시는 일”, 곧 재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셔야 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부터 십자가 때까지는 하나님과 아들은 쉬시지 않고 다시 창조하시는 일을 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창조가 “다 이루어지면” 잃었던 “창조 안식일”이 다시 회복되어 아버지와 아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과 함께 다시 영원한 “재창조 안식일”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안식일(토요일)에도 쉬시지 않고 일하셨다. 이것이,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따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이다.
요5:17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고 하시더라.
물론 아버지와 아들의 일은 “재창조”하시는 일이었다. 결국 이 본래(에덴)의 “창조 안식일”의 회복을 위한 십지가를 통한 죄인의 구원과 재창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의 소원이었다.
흙 → 창조 → 인간(아담) → “창조 안식일”
죄인 → 재창조(십자가) → 새로운 피조물 → “재창조 안식일”
그리고 하나님이 재창조하시는 일을 마치시는 날, 곧 “십자가의 날”이 오면, 그 “완전한 날”(큰 안식일) 이후에,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으로 들어온(히4:3) 인간과 함께 다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십자가의 날”이 바로 “재창조 안식일”이었다. 이 “재창조 안식일”은 죄인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죄 때문에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창조 안식일”을 갈바리에서 회복하신 날이었다. 그날부터 하나님의 안식은 다시 시작되어 이직도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참 안식일, 곧 안식의 3 요소를 갖춘 안식일은 두 안식일 뿐이었다. 하나는 에덴의 최초의 안식일, 곧 “창조 안식일”과그 후 십자가로 죄를 정결케(없게) 하시고(히1:3, 9:26) 회복하신 새 안식일, 곧 “재창조 안식일”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 중에 포함된 넷째 계명의 안식일(토요일)은 어떤 목적으로 주신 안식일일까?, 이 답변을 찾아내기 위하여 우선 십계명(옛 계명)이 “옛 언약”, 곧 십자가 이전의 약속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하고, 왜 “옛 계명”(옛 언약)에는 안식일 계명(언약)이 있는데 십자가의 피(언약의 피)와 함께 주신 “새 계명”(새 언약)에는 안식일 계명(언약)이 없는가에 대한 확실한 이해도 필요하다.
“옛 계명”과 “새 계명”이 있는 이유는?
모든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약속)이다.(조금 후에 자세히 설명할 것임) 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옛 언약)이 있고,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새 언약)이 있을까? “옛 계명”과 “새 계명”이 같은 것일까?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신 이유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언약)은 십자가로 이루어진 “옛 언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옛 약속이 이루어지고 나면 새 약속을 주시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새 것”이 오면 “옛 것”은 소용이 없어진다. 잠깐, 십계명이 소용이 없어졌다고?
그렇다, 바울은, 십자가로 “옛 계명”(옛 언약)은 폐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십계명이 폐하였다는 말이다.
히7:18 전에 있던(옛)계명은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게 되었습니다.(한KJV,표준)
왜 십계명(옛 계명)이 폐했다고? 십자가의 피로, 옛 언약의 약속은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새 언약”(마26:28), 곧 “새 계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 계명”(옛 언약)에 속한 “안식일 계명”, 곧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언약)으로서의 안식일 언약도 폐한 것일까? - 연구해 보기로 하자.
“전(前)에 있던 계명”- “어느 때”를 기준으로 전과 후로 나누었을까?, 물론 십자가의 때이다. 십자가 전에 있던 “옛 계명”(요일2:7), 또는 “옛 언약”(구약)의 십계명이 무력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였다는 말씀이다. 왜 그럴까?, 법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을 때, 질서 유지를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오면 법은 무력하여진다.
그러나 사랑이 오면 그 사랑 앞에서 법은 무력해진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촛불이 무력해지듯이 “옛 계명”(십계명)은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있었던 어둠을 밝히기 위한 촛불에 불과하였다. 십자가의 사랑, 의의 태양이 갈바리 언덕에 떠오르면서 이 촛불(옛 게명)이 너무나 불완전하여 결함이 많고 무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버렸다. 그 결과는 흠이 있었던 첫 번째 언약(십계명)은 더 이상 밝힐 필요가 없어져서 꺼버리게 (폐하게) 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것이 요구되었다.
히8:7 만일 그 첫 번째 언약(옛 계명)이 흠이 없었더라면 두 번째 것이 요구될 여지가 없었으리라.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참사랑으로 말미암아, 원수도 사랑하시며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하시는 무한하신 사랑,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은혜)이 나타나 그 안에 거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나타났다. 이제 그들은 십자가 이전의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옛 계명”의 “법과 도덕의 차원”보다 더 높은 “사랑의 차원”을 추구하며 법 없이도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런 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 높은 “사랑의 차원”으로 성숙해 가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법(율법, 계명)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13:10)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율법의 끝”(마침)이 되었다.(롬10:4)고 기록한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드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랑 이후의 “새 계명”(새 언약)은 “서로 사랑하라”이며, 이 십자가의 사랑 안에 모든 율법과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마22:40)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법의 본질 역시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는 법은 무력하고 무익하여져서 없어지는 것이다.
변화산의 모세(법)과 엘리야(선지자)와 그리스도(사랑)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모세, 엘리야와 예수께서 함께 하시(눅9:30)는 광경은 모든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이 예수님을 증거 하며(요5:39)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를 없애(히9:26)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모세율법(모세)와 구약예언(구약예언)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져 사라지고 예수만 남는 광경도 보여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제 “아들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눅9:35) - 이 장면이 바로 십자가로 모든 율법과 구약의 예언은 이루셨기 때문에 폐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폐하였기 때문에 계명을 범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더 높은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 할 리가 없기 때문에 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율법은 십자가 때까지만 유효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갈3:19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죄를 밝히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표준)
“두 번째 것”을 새우기 위하여 “첫 번째 것”은 폐하신다.
예수께서 옛 성전(첫 번째 것)인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새 성전”(두 번째 것)이신 자신의 몸이 부활하여 죄인을 구원하시어 “새 성전”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요2:18) 바울에게는 “옛 계명”(십계명)은 “첫 번째 것”이며, “새 계명”은 “두 번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첫 번째 것”, 곧“옛 계명”(십계명)을 폐하셨다고 선언하였다. 십계명을 폐하신 이유는 “새 계명”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히10:9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하셨으니,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히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옛 언약)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또한 십자가를 중심으로 “옛 것”과 “새 것”으로 구분하였고,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의 피로 완성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그들에게는 첫 번째 “옛 계명”은 지나갔다. 그러나, 보라! 새로운 피조물들에게는 두 번째 것, “새 계명”이 주어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옛 계명과 새 계명은 본질적으로 사랑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면에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요일2: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가 가졌던 옛 계명이라.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이니라.
위의 말씀대로 “옛 계명”과 “새 계명”이 같은 것이라면 왜 “옛 계명”과 “새 계명”이 구태어 다른 이름으로 성경에 사용되고 있을까? 사도 요한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있었던 어두움(촛불)이 지났고 이제 빛(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요일2:8 또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이는 그분과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갔고 이제 참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라.
위의 두 말씀을 읽어보면 “새 계명”이 “옛 계명”과 전혀 다른 계명이 아니라고 사도 요한은 말하였다. 그 이유는 “새 계명”과 “옛 계명”은 내용의 본질 면에서는 동일한 빛(사랑)이지만 촛불과 태양빛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모든 계명(“옛 계명”이든 “새 계명”이든)의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옛 계명”(십계명)은 십자가 이전의 초보적 단계, 특히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너무나 완악한 상황”(마19:8)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본래의 하늘의 계명이 아닌, 하늘의 계명의 수준을 땅의 수준으로 대폭적으로 낮추어서 주신 낮은 단계의 계명이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낮은 단계의 계명(율법)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불렀다.(갈4:3,9, 골2:8,20) - “옛 계명”은 촛불 수준의 어둠이었다.
그러나 “새 계명”은 십자가의 구원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자들에게 주신 새 약속이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들 안에 그 “믿음”을 주신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땅의 낮은 영적 수준을 벗어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훨씬 더 높은 영적 수준, 곧 하늘의 수준으로 향하기 시작한 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다. 이 “새 계명”(새 언약)이야말로 하나님이 옛날부터 인간들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본래의 하늘의 수준의 계명(언약)인 것이다. - 의의 태양 빛의 수준의 밝음이다.
촛불이 태양으로
예를 들면,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는 법을 보자. 모세에게 주신 옛 계명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복수를 하라는 촛불처럼 어두운 낮은 단계의 율법(옛 언약, 옛 계명)을 주셨다.(마5:38)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들은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어떻게 다를까? 너무나 다르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39,40)이다. - 예수께서 주신 이 “새 계명”은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 곧 태양 차원의 계명이다.
그리고는, 결국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극치의 하늘의 계명(언약)을 주셨다. 이 언약은 명령이 아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이 너희 속에서 너희를 반드시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언약)이다.
태양 같은 안식일, 촛불 같은 안식일
쉬지 않고 알하면 죽이라고 했던 넷째 계명의 토요일 안식일은 십자가의 구원으로 이루어질 잃어버렸던 안식일의 회복을 약속하는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안식일,(신31:16,17) 곧 촛불로서의 안식일이었다. 십자가를 알지 못했던 그 당시의 어둠을 태양(예수의 구원)을 대신하여 미약하게 나마 밝혔던 촛불의 역할을 한 “첫 번째” 안식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십자가에서 생명의 빛이 나타났다. 잃어버렸던 안식일, 두 번째 안식일은 회복되었다. 두 번째의 안식일, 태양으로서의 안식일을 세우시기 위하여 첫 번째 안식일(토요일)이라는 촛불은 꺼져야 했다. 십계명의 토요일 안식일은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은 그 놀라운 재창조 안식일에 비교하면 그냥 “초보적”, “초등 학문적”인 안식일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옛 계명”에 있던 안식일이 “새 계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밝은 대 낮의 태양 때문에 촛불은 꺼졌기 때문이었다.
안식일 교회가 안식일(토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이유
안식일 교회는 광야에서 모세에게 주신 모든 율법과 십계명(출19~31)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문서로 기록된 의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하였지만(엡2:15) 십계명은 “도덕법”이며 십자가로 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십계명의 안식일은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선, 다음 말씀을 보면 바울은 율법과 계명을 동일하게 본다, “계명의 뮬법”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율법 속에 계명과 규례, 또는 계명 속에 율법과 규례가 포함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계명도 율법도, 이 모두가 함께 십자가로 폐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엡2:15 원수된 것, 곧 법령 안에 속한“계명들의 율법”까지도그의 육신 안에서 폐기하셨으니
Eph.2:15 by abolishing in his flesh the law(율법) of commandments(계명) and ordinances,(규례)
율법 = 계명 + 규례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은 동일 하다는 확실한 증거는?.
예수께서도 위의 바울의 글처럼, 십계명과 모세의 율법이 서로 다른 것으로 보시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예수께서는 “계명 속에 모든 율법이 있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셨다.
첫째 계명은,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둘째(계명)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그리고, 위의 “두 계명”속에 모든 율법이 포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율법과 계명이 동일한 것임을 중명하셨다.
마22:40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이, 이 “두 계명”에 달려(포함되어) 있느니라."고 하시더라.
바울도 십계명과 율법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십계명의 10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계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율법”이탐내지 말라고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계명)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 예수님도 바울도 율법과 계명은 동일한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도 계명도 모두 “초림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상징)에 불과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골2:17 이런 것들(율법과 계명)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림자(율법과 계명)는 몸이 있어야 존재한다. 이 때문에 실제로 그림자의 (주인공) 몸이신 예수가 오셔서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외치심으로 그림자에 불과했던 계명과 율법을 마침내 “다 이루셨기 때문에” 폐하였다고 바울이 기록하였다.
갈3:19 그러면 어찌하여 율법(계명)을 섬기느냐? ~(율법은) 약속하신 그 씨(예수)가 오실 때까지라.
위의 그리스도의 “두 계명”은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오직 단 한 개의 계명으로 요약된다. 바로 “새 계명”이다.(요13:34) 바로 예수께서 직접 주신 이“새 계명”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언약)은 “옛 계명”이 되었다.
“사랑”이 모든 율법(계명)의 정신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의 본질적 정신은 서로 다르지 않은 동일한 사랑이다. 이 때문에 “옛 계명”과 “새 계명”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요일2:7) 그러나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수준은 땅과 하늘의 치이로 다르다. “새 계명”은 십자가 후의 성령의 차원이요 “옛 계명”(십계명)은 십자가 전의 인간의 차원이다.
율법 → 옛 계명(십계명) → (십자가) → 두 계명 → 새 계명
사도 바울도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계명)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또 그리스도의 “새 계명” 속에 모든 십계명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옛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새 계명)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옛 계명”에는 포함되었던 “안식일 계명”이 “두 계명”(새 계명)에서는 왜 제외되었을까?,
십자가의 사랑, 곧 완전한 사랑 안에만 완전한 안식이 있다. “새 계명”, 곧 “의의 태양” 이전에 무력했고 미약한 사랑의 빛을 간신히 발하는 촛불에 불과했던 “옛 계명”(십계명)으로부터는 태양(예수) 안에 있는 참 안식을 맛보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각 다른 분야에 대한 여러 규칙을 문자로 기록한 법조문(의문의 율법)들이 필요했고, 또 안식에 대한 법 조문도 필요했다. 따라서 율법(계명)들이 촛불처럼 무력하여 아무것(안식)도 온전케 못하였다고 바울이 기록했다.(히7:18,19)
히7:18 이는 앞서 있는 “계명”이 참으로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여졌음이라.
히7:19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였으나 더 좋은 소망의 도래는 온전케 하였으니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감이라.
그러므로 의의 태양으로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떠 오르고, 또 죄인이 그 사랑 안에 거하면, 그 자체가 토요일 단 하루 동안이라는 제한된 시간만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새 계명”에는 토요일에는 쉬라는 넷째 계명이 없는 것이다.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에덴의 “창조 안식일”이 십자가의 의의 태양으로 갈바리에서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의 바울의 글대로 십계명도 폐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십계명도 안식일 계명도, 모든 율법도 십자가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었으며 십자가에서 이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기 때문이다.
주의: 십계명이 폐하였다는 말을 살인, 도적질, 간음을 해도 무방하다는 육적이며 무법적인 뜻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오해는 성령이 주신 선물로서의 “믿음”이 아닌 거짓 영으로부터 받은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 곧 가라지들이 하는 오해이다. 이런 자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요3:18)이다.
시내산에서 계명(율법)을 주신 이유
이스라엘 만족은 430년이라는 긴 세월을노예 생활에 시달리었기 때문에 그 당시 이 세상의 어느 민족들보다 교육수준과 영성, 도덕성이 최악의 수준으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우상숭배, 도둑질, 간음, 살인, 거짓말 등은 습관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죄”가 무엇인 줄도 모르는 너무나도 천박하고 그야말로 완악한 영적 상테에 있었다.(마19: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430여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언약)(갈3:17)대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시내산에서 율법(계명)을 주셨다.
롬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7:13 ~그것은 죄를, 계명(율법)을 방편으로 하여 더욱더 죄 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갈3:19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를 밝히시려고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이 폐하였다”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
광야에서 주신 그 도덕법으로 오해받을 만큼 낮은 세속적 도덕 수준의 “옛 계명”(십계명)은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십지가의 구원받은 자들, 곧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너무나 낮은 수준(초등학문)의 계명이다. 그러므로 세속의 도덕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죄인들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후에는 더 높은 수준, 곧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는 영적 차원의 계명, 곧 “새 계명”이 주어져야 한다. 이 때문에 성령을 받아 믿는 자들에게는 도덕적 수준의 “옛 계명”에 더 이상 머물러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더 높은 영적 자원의 “새 계명”으로 옮겨 승화하게 되었다는 뜻이 바로 “옛 계명”, 곧 십계명이 폐하였다는 바울의 글의 참 뜻이다.
모든 하나님의 율법(계명)의 명령은 실제로는 약속(언약)일까?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약속(언약)이다.” 이 말을 영적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해보자.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스스로는 수행(순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인간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행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빌2: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공동)
그러므로 인간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신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제1호는 “빛이 있으라!”(창1:3)이다. 이 명령을 수행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밖에는 없다.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와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에게 명령하신다. 두 사람 모두 그 명령을 들을 수도 없었고 수행할 수도 없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고 주님이 스스로 그 명령을 수행하시어 그들을 살리셨다.
원수일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명령일까? 아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굳은 마음도 하나님이 제하여 주시고, 원수일지라도 사랑할 수 있도록 새 영과 새 마음을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마치 출생 3일도 안 된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엄마가 명령한다. “아기야 젓 먹어!”, 이것이 명령인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젓 먹여줄게”라는 엄마의 약속이다. 아기는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결단코 젓을 먹이고 싶다, 그러므로 이 명령(약속)은 엄마가 스스로 원하는 바를 꼭 해낼 것(꼭 젓을 먹일 것)이라는 엄마 자신에게 하는 명령(약속), 곧 맹세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그러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악속(언약) 하실 때에 하나님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히6: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두고 맹세할 이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며
창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맹세하노니~
이렇게 사랑하는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는 명령이 약속이 되며 약속도 명령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맹세하셨다.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십자가로 구원하시겠다는 그 맹세하신 언약을 실제로 다 이루셨다.
[창17:4]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맹세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우리들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이다.(엡1:4,5)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을 하신 후, 430년이 지나 광야에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약속을 무효화시킬 수가 없다고 바울은 기록하였다.
갈3:17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미리 확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시킬 수 없으며 그 약속을 무효화 할 수 없느니라.
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이유도 역시 오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언약(맹세)하셨기 때문이라고 모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13:11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너를 가나안 사람의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
오직 하나님만이 노예가 된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알지도 못하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은혜로 그 언약(맹세)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 곧 은혜이다.
그러므로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소원이며, 맹세이며 일방적인 언약이기에 “은혜”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그분의 사랑을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하신 피조물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약속이기 때문에 인간은 믿음으로 이 약속을 받아드리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은 동등한 인간끼리 맺는 “계약”과는 완전히 다르다. 계약은 쌍방이 동일한 입장에서 서로의 의무를 완수할 경우에만 약속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하실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구원하시지 않겠다는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맹세, 곧 하나님의 은혜, 곧 그분의 무조건적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약속하여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것이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대로 아들을 피 흘려 희생하시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야 말겠다고 약속(맹세)하셨기 때문에 구원하셨다는 말이다.
롬11:27 그때(십자가 때) 나는 내가 약속(언약)한 대로 그들의 죄를 없애 버리리라.(현대어)
롬11: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 “그들에 대한 나의 언약이 이것임이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그 약속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은 죄인은 “약속의 자녀”들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갈4:28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
이 구원에 대하여 죄인이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언약임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아드리어 확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성령이 주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기다리며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단의 미혹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고 성령의 검으로 싸우며 서로 사랑하며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약속의 책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십자가의 구원을 약속하는 “옛 언약”(구약)과 십자가 이후에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새 언약”(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약”자는 약속 “約”자이다. “옛 명령”, 또는 “새 명령”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명령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속의 하나님임을 기억하면 십자가의 구원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은혜를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려워지고 결국 율법주의가 탄생한다.
모세의 율법(계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이다.
백성들이시내산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을 만나시는 ‘총회’가 열리고(출19장) 먼저 십계명이 말씀으로 주어졌다.(출20:1~17), 그리고 연이어 십계명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31장 17절까지 설명하시는 율법들을 주셨다. 모세가 이 모든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그 책은 “언약책”이라고 불렀다.(출24:7) 모세가 백성들에게 그 “언약책”(율법)을 읽어주고 그 언약들이 모두 하나님이 죄인을 아들의 피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언약)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어린양 예수를 상징하는 희생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려주며 그 피를 “언약의 피”라고 불렀다.(출24:8) 모세가 말한 “언약의 피”란 십자가에서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마26:28)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언약책(율법)을 백성들에게 읽어주고 피를 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의 피로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맹세)이며 은혜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는 모세의 행동이었다.
돌판에 기록하신 십계명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언약)이다.(도덕법이 아님)
율법이 언약이라면 율법과 동일한 십계명도 언약임이 당연하다. 다음 말씀을 보면 두 돌판에 기록하신 십계명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언약)임이 분명하다.(도덕법적 명령이 아니다.)
신9: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신9:11 사십 주야가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돌판에 기록하신 십계명은 총화 날(출19장) 모세와 모든 백성들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다.
신9:10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네게 주셨나니그 판의 글은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십계명 = 총회 날에 하신 “모든 말씀”(모든 율법) → 언약
모든 계명과 율법은 십자가로 이루시기 위하여주신 약속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어 잃어버린 안식일을 회복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율법은 죄인이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율법과 계명 속의 약속들을 완전히 지키셨고 십자가에서 그 약속들을 다 이루셨다. 이 때문에 모든 지키셨고 이루신 약속들로서의 율법과 계명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곧 십자가 때까지 존재하는 것이다.(갈3:19)
시89:34 내 언약도 깨뜨리지 아니할 것이요,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경시키지 아니하리라.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왔노라.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이루리라.
갈5:14 온 율법은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Gal.5:14 For all the law is fulfilled in one word, [even] in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눅24:44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하리라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롬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하려 하심이니라.
롬11:27 그때 나는 내가 약속(언약)한 대로 그들의 죄를 없애 버리리라.(현대어)
롬11:29 하느님께서 한번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넷째 계명의 토요일(안식일)도 십자가로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을 상징할까?
안식일 계명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출31:16)이며 구원의 표징(상징)이라고(출31:17) 기록하였다. 그다음, 십계명의 설명을 마무리하시면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여 주셨다.(출31:18) 그러므로 십계명을 (돌판이 아닌) 말씀으로 먼저 주신 후에(출20:1~16) 먼저 주신 십계명을 조목별로 세부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모세의 율법들(출20:17~출31:17)을 주셨다. 그 후에 다시 최종적으로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여 주셨다. 따라서 모든 율법의 시작과 끝에 십계명을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모세의 율법들을 십계명으로 포장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도 율법도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라는 면에서도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모든 모세의 율법(언약)들을 10개의 항목으로 요약하여 주신 것이다.(언약의 돌판을 보관한 궤도 언약궤라고 부른다.)
넷째 계명의 토요일(안식일)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조 안식일”을 상징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아직도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6일 동안 일하시다가 토요일에만 쉬시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이후로는 “재창조 안식일”이 영원히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요일”은 잃어버렸던“창조 안식일”이 십자가로 회복될 날, 곧 “재창조 안식일”(십자가의 날)을 상징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율법(계명)을 통하여 약속하신 십자가의 구원과 함께 잃어버렸던 “창조 안식일”을 반드시 화복하실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꼭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을 표징으로 나타내시는 상징적인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토요일)은 하나님이 “죄인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 곧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표징(상징)으로 주신 날인 것이다.(겔20:12,20)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까지, 지금 유대인과 안식일 교인들이 지키는 넷째 계명의 안식일(토요일)들은 실제로 하나님이 쉬셨던 날이 아니라 죄인을 재창조(구원)하시는 일을 하셨던 날이었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창조 안식일”을 십자가로 회복하실 때까지 쉬지 않으시고 일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십자가의 날이 바로 그 잃어버렸던 “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신 날, 곧 “재창조 안식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날(“재창조 안식일”) 이후로부터 하나님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녀들과 함께 마침내 다시 안식을 시작하시고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 곧 화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롬5:18) 그리고 구원받은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그 자녀들 안에 아들의 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게 하셨다.(갈4:6) 그러므로 바로 그 십자가의 날이 바로 “재창조 안식일”이 시작된 날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도 안식일 교인들이 아직도 지키고 있는 “토요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일을 끝내시고 쉬신 여호와의 안식일, 곧 “창조 안식일”도아니며 또 잃어버렸던 안식일을 화복하신 십자가의 날, 곧 “재창조 안식일”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넷째 계명의 안식일을 무엇 때문에 주셨을까?
그러므로 토요일 안식일은 이 “재창조 안식일”을 상징하며 그 ‘창조 안식일“을 꼭 회복시켜 ”재창조 안식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날이다. 죄가 있는 동안에도 그나마 죄인들로 하여금 토요일에 일을 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옛날 에덴에서 죄가 없었을 때, 또 앞으로 예수께서 죄를 없애실 때에 다시 누릴 수 있게 될 참 안식을 상징하는 임시 안식을 잠깐 맛볼 수 있게 하여 주신 날이다. 이 상징적인 임시 안식일이 바로 ”옛 언약“(구약)의 옛 계명(십계명)의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임시 안식일(토요일)에 불과했던 ‘옛 안식일“(토요일)을 안식일 교회가 하나님의 인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어 ”재창조 안식일“을 주시어 진정한 안식을 누리시도록 하여 주신 주님을 격하시키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들만이 이 세상에서 십계명(안식일)을 지키어 ”하나님의 인“을 받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유일한 ”남은 교회“(Remnant Church)로서 재림 직전까지 계속될 조사심판을 통과할 수 있게 되어 마침내 구원이 결정되어 부활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나 인간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이 지구상 극치의 행복의 날, 곧 “창조 안식일”을 반드시 회복하시어 “재창조 안식일”로 회복하시어 다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과 함께 행복의 쉼을 누리실 때까지는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일을 하셔야 했다. 하나님은 죄인을 재창조 하시기로 결심하셨다. 재창조를 하셔야만 다시 영원한 “재창조 안식일”을 하나님도 인간도 함께 누리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강력한 하나님의 소원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재창조, 곧 십자가로 구원하시어 죄로 없어졌던 “창조 안식일”이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을 인간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언약으로서넷째 계명을 주신 것이다.(출31:16)
이 하나님의 언약을 꼭 기억시키시기 위하여 바로 매주 일곱째 날, 토요일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여호와께서 쉬신 ‘여호와의 안식일’, 곧 때가 차면 십자가로 회복될 “창조 안식일”, 곧 “재창조 안식일”을 상징(표징)하는 날로 삼아주셨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그 토요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부르신 것이다.(출31:17)
“재창조 안식일”이 시작한 때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날
그러므로 십자가로 이루어진 “재창조 안식일”은 “창조 안식일”에는 없었던 십자가(구원)의 측면이 더 첨가되었다, 토요일 하루 만에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 될 안식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바로 넷째 계명(옛 언약, 옛 계명)이다. 인간들이 이 약속의 의미를 ‘믿고’, ‘기억하고’, 십자가로 회복된 영원한 안식일을 ‘기다리게’ 하시기 위하여 매주 토요일로 제한된 24시간에 불과한 쉼일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십자가의 구원으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 그 “영원한 안식”, 곧 “창조 안식일”이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을 살짝 임시로, 상징적으로 맛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재창조를 약속하시는 언약과 표징으로서의 토요일을 십자가 구원을 이루실 때까지 임시 여호와의 안식일로 지키라는 넷째 계명(언약, 율법)도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나면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침내 영원히 지속될 “재창조 안식일”로 들어가는 것이다.(히4:3)
십계명은 하나님의 어떤 언약(약속)일까?
십계명은 모두 “십자가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러나 넷째 계명은 구원의 약속임은 물론 본래의 안식일의 회복, 이 “두 가지 약속”이 함께 포함 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약속, 곧 언약이다.(출31:16)
1, 잃어버린 “창조 안식일”을 꼭 회복하여 줄게!
2, 십자가의 피로 새로운 피조물로 꼭 재창조(구원)해 줄게!
그러므로 십사가로 위의 두 약속이 이루어지면 잃어버렸던 “창조 안식일”이 회복되어 “재창조 안식일”이 왔기 때문에 “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으로서의“옛 계명”(옛 언약)에 포함된 넷째 계명은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옛 언약) 속의 성소도, 어린 양도, 모든 절기들도, 할례도 그리스도와 십자가 구원을 약속하는 “옛 언약”이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십자가 구원의 상징이었다. 이 “옛 언약”들은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 때문에 십자가 이후에는 이 예수의 상징들과 옛 언약(십계명)은 더 이상 존재하여야 할 필요가 없어져 끝난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으면 감사가 넘치게 된다. 그 결과 당연히 1계명,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신도 두지 않고, 2계명, 우상도 섬기지 않고,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넷째 계명의 언약과 표징으로서의 안식일(출31:16,17)을 비롯하여 나머지 5~10 옛 계명(옛 언약)들도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겠다는 “새 언약”(새 계명)으로 대체(代替) 되어버린 것이다.
율법(계명)을 기록한 책이 “언약서”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을 꼭 이루실 것을 약속(언약)하신 바로 그 “언약”들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모세가 기록한 것이 바로 “언약서”(춮24:7)이다. 이 “언약서”에 기록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계명)이다. 이 “언약서”가 바로 구약, 곧 “옛 언약”의 책, 바로 구약성경이다.
따라서 구약에 포함된 모든 율법(계명)은 십자가로 이루어 주실 구원의 언약(약속)이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그리고 신약은 십자가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린 죄인들을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죄인도 완전케 하여 주시겠다(마5:47)는 “새 언약”(약속)이다.
(성경은 할례를 ‘영원한’ 언약(창17:13)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토요일 안식일’도 ‘영원한’ 언약, ‘영원한’ 표징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할례에 나타난 언약이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져서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토요일’도 마찬가지로 십자가로 이루어지면 영원한 언약이나 상징이 아니다.) 모든 언약, 표징도 실체가 오면 끝난다. 오직 한가지 영원한 것은 할례가 나타내는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구원이 영원하다. 이처럼, ‘토요일 안식일’이 언약(약속)하고 상징하는 십자가의 구원으로 회복하신 “창조 안식일”, 곧 “재창조 안식일”이 영원하기 때문에 토요일을 영원한 언약, 영원한 표징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십자가로 십계명의 안식일(토요일)이 폐했다는 참 의미
구원의 약속으로서의 언약(율법,계명)은 십자가로 다 이루셨음으로 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언약)은 십자가로 아루지기 위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루시면 폐하신다.
십자가의 보혈로 단번에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성도들은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을 받아드려 영원한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히4:3) 이들에게는 더 이상 토요일이라는 낮은 단계의 안식일, 곧 제한된 24시간 동안만 임재 하시는 하나님과 제한적으로 안식하며 “창조 안식일”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는 “시내산의 안식일”(옛 계명의 언약 안식일)은 필요가 없어졌다. 성도들은 그 보다 더 높은 단계, 곧 하늘 차원의 영원한 시간의 “갈바리 예수(여호수아)의 안식일”(히4:8), 곧 “재창조 안식일”을 그리스고 안에서 영원히 누리게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새 계명에”는 토요일 하루만으로 시간이 제한된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넷째 계명”(옛 계명)이 없어진 것이다. “토요일만의 안식일”이 “영원한 안식일”로 대체된 것이다. 영원한 사랑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는 영원한 안식만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게 하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고 십자가로 회복된 “창조 안식일” 속에서 살게 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사는 새 삶, 그 자체가 영원한 안식일을 누리는 싦이라는 의미이다.
유대교인과 안식일 교인이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
그러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성령(믿음)을 거부하며 조사심판을 믿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안식일 교인들은 십자가의 피로 단번에 죄인이 재창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고후5:17)을 믿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죄의 정결(도말)을 받지 않은 상태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아직도 “재창조 안식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에덴에서 잃어버린 “창조 안식일”이 아지도 회복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도 매 토요일이라는 시간적으로 제한된 안식일, 곧 “언약 안식일”을 계속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토요일 안식일 준수가 조사심판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기 위하여 반드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인”(?)으로서의 율법주의적이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언약 안식일”을 계속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세인 바울도 그토록 중요하게 율법적으로 구원받기 위하여 지켰던 그런 옛 계명의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로 완성된 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안식일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배설물, 십자가에 못 박아 폐하여버린 의문의 율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골2;14,엡2:15)
그러나 유대인(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인들보다 먼저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으나 예수를 거부하여 여호수아(예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히4:6) 이처럼 안식일 교인들도 유대인들처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심판 교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을 거부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갈4:10) 현대판 갈라디아 교회처럼 되어 아직도 ”옛 계명“의 날(토요일)을 지키는 안식일 교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어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 누리는 새 안식일, 곧 십자가로 완성된 ”재창조 안식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예수(여호수아)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히4:6) 따라서 그들에게는 아직도 들어가야 할 그리스도의 ”재창조 안식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히4:9)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안식일 교인들은 아직도 그 토요일이 마치 하나님이 실제로 쉬시는 날로서 절대 불변의“창조 안식일” 그 자체인 양, 영원한 안식일로 지키고 있으며 심지어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지키는 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옛 계명”을 율법적으로 강조할 수밖에 없고,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과 “새 안식일”(재창조 안식일)의 영원한 안식을 믿음으로 받지 않고 “옛 안식일”을 옛날의 사울(바울)처럼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고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대교인과 안식일 교인의 율법적 “옛 안식일”은 본질적으로 참 안식일이 아니고 그냥 언약(언약)으로서의 “토요일”일 뿐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십자가의 “재창조 안식일”에 들어간 바울에게는 폐하고 배설물이 되어버린 “옛 안식일”(토요일)이 된 날이 “하나님의 인”이 될 수는 없다. -
믿음의 노독들이 믿음으로 지킨 “언약 안식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먼 과거였을지라도 이미 그 당시에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믿게 하시는 성령이 주신 “믿음”(구원의 확신)으로 말미암아, 잃었던 “창조 안식일”을 십지기의 피로 회복하신 “재창조 안식일”을 기다렸던 믿음의 노독들이 있었다.
아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언약의 돌판을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세를 비롯하여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모든 선지자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넷째 계명의 안식일(토요일)이 십자가의 구원을 통하여 안식일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날이었고 동시에 십자가로 회복하실 안식일의 표징이라는 진실을, 성령이 그들에게 주셨던 믿음으로 이미 알고 있었고 십자가의 날을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날에 반드시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하나님이 지키실 것을 믿었기에, 매주 단 하루만으로 제한된 그 날(토요일)이었을지라도 그날에 잠깐 임재하셨던 하나님과 함께 십자가로 회복될 영원한 안식을 맛보았다. 그들은 때가 차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정하신 때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반드시 회복하실 본래의 안식일, 곧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재창조 안식일”을 잠깐이나마 임시 예고편으로 체험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적인 토요일(언약 안식일)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재림 때에 그들이 부활하면, 그들이 살아 있던 동안에 그토록 기다렸던 십자가로 회복된 안식일(재창조 안식일)을 믿는 우리 모두와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사울이 지켰고, 유대인, 안식일 교인이 아직도 지키는 토요일 안식일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바울은 거부하며 살아왔다. 이 바리세인 사울(바울)은 성령을 받은 믿음의 노독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체험하였던 회복될 안식일, 곧 십자가로 회복될 “재창조 안식일의 아름다움을 전혀 체험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울에게는 그 “토요일”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하고 싶은 것도 금지 당하며 억지로 쉬며 일몰 시간만 기다렸던 지겨웠던 날이었다.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여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조사심판 교리 때문에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음을 거부하며 성령을 거부하고 있는 안식일 교인들이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아 구원 받기 위하여 지켜야 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옛 계명의 토요일과 다름이 없었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아드려 구원의 기쁨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로 회복된 안식일, 곧 매일이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재창조 안식일”을 영원히 누리게 되었다. 더 이상 일몰을 기다렸던 그 지겨웠고 십자가가 없었던 과거의 토요일이 참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는 성령을 받아 그 지겨웠던 넷째 계명 속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 곧 구원의 복음을 보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노독들이 맛본 십자가로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을 영원히 맛보게 되었던 것이었다.
십자가로 굳게 세워진 폐하여버린 배설물들
오랫동안 성령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믿지 못하고 거부했던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니 자기가 사단(죄)에게 철저히 속아 왔음을 알게 되었다. 먼저 사단이 자기로 하여금 성령을 거부하게 하여 복음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하는 믿음을 받아드리지 않게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가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 기회를 사단이 타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하여 철저히 계명을 순종해야만 한다고 자기를 속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본래 모든 계명(율법)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언약)이었음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구원받기 위하여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라고 오해하게 되었음도 깨달았다. 그런 모든 계명(율법)들이 그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던 사단의 도구가 되어 있었음을 바울이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롬7:10 (본래에는 십자가로) 생명에 이르게 할 (하나님의 언약인) 그 계명이, 내(사울)게 대하여 도리어 (계명 속의 십자가의 구원의 약속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그리스도를 완전히 거부하게 하여) (영적으로) 죽였는지라
이처럼 사단은 성령을 거부한 과거의 사울과 현재의 안식일 교인들을 유대인들을 철저히 속여 성령을 거부하게 하고, 그 계명들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강조하여 오직 계명을 복종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그 계명 속에 있는 십자가의 구원을 철저히 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마침내 성령을 받아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믿게 된 바울은 사단이 계명을 사용하여 성령을 계속하여 거부하게 하여 자기를 율법(계명)에 얽매어 종노릇 하게 하여(갈4:3,8)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는 처참한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명령으로서의 율법(계명)을 벗어나서 오직 성령으로 복음을 믿어 그리스도의 “새 언약”(서로 사랑하게 하시 겠다는)을 믿고 섬기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롬7: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명령으로서의) 율법에서 벗어났으니이러므로 우리가 (성령) 영의 새로운 것(새 언약)으로 섬길 것이요의문의 묵은 것(율법)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자 그는 자가기 그토록 중요하게, 유익하게 생각했던 모든 계명들이 배설물로 여겨졌다고 고백하게 되었다.(빌3:7,8) - 바울이 율법을 명령으로만 오해하여 계명 속에 있는 십자가의 약속을 보지 못하고 구원받기 위하여 오래동안 지켰던 율법이 바로 “죄와 사망의 법”이 었다.
바울의 일구이언의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은 “율법은 배설물, 폐하였다”(엡2:15, 골2:15)고 기록한 바울이, 또한 정반대로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며 의롭다,”(롬7:7)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3:31)고 기록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믿음의 노독들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언약)임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의 경우처럼 모든 율법과 계명들이 배설물이 되지는 않았다. 성령으로 십자가로 완성될 구원을 믿은 그들에게는 그 토요일(안식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십자가의 언약을 보았기 때문에 매주 토요일이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의 날로 기억하고 부활 때까지 잠들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을 성령을 받아 깨달은 바울도 율법(계명)은 십자가로 폐하였을지라도,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의인들에게는 마침내 과거의 그 율법과 계명들이 모두 그를 구원하신 십자가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을 받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바울에게는 더 이상 율법(계명)이 쓰레기 같은 배설물로 취급될 수 없고 오히려 그를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도하려고 하나님이 주셨던 언약이었으며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첫걸음마를 가르치는 몽학선생 되었음 걔달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율법(계명)이 구원받기 위하여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라, 아들의 피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언약임을 깨닫게 되면서 율법이 선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것임을 시인하게 되었다,(롬7:7) 바울이 마침내 “생명의 성령의 법”을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죄와 사망의 법”에서해방시킨다.
그 결과 바울이 성령의 역사로 받은 믿음으로, 십자가로 율법(계명)의 언약들이 다 이루어져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폐하여버린 과거의 언약이 되었을지라도, 그 계명들 속에 있었던 십자가의 복음의 언약을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주신 은혜를 율법 속에서 보게 되었다.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는 자기를 율법주의로 얽매고 있었던 정죄와 형벌의 율법이었다. 그는 율법 속에서 십자가의 언약을 보지 못한 때의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불렀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된 바울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와 사망의 법”, 율법주의적 “행위의 법” 안에서 은혜를 발견하게 되면서 “죄와 사망의 법”을 새롭게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함께 성령으로 재발견한 율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곧 “믿음의 법”이었다. 그 결과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어져 폐하여진 율법일지라도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고 기록하게 된 것이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해서 할례법과 같은 의문의 율법(돌판의 “옛 계명”)을 다시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옛 계명”들보다 더 높은 영적 수준의 “새 계명”(새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뜻이다. - 마침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오칠 수 있게 되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께서 “큰 날”(큰 안식일)을 선택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언약(율법과 계명)을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시고” 무덤 속에서 쉬신 15일은 유월절 절기 안식일이었고 동시에 토요일 안식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날은 제 7일 안식일과 유월절 무교절의 절기 안식일이 겹치는 특별한 안식일, 곧 “큰 날”(High Day)이었다.
요19:31 이날은 예비 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주”로서는 유월절 어린 양, 곧 대속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또 “창조주”로서는 죄로 잃어버린 에덴의 “창조 안식일”을 반드시 회복하시어 “재창조 안식일”을 이루시는 이 두 가지(구속과 재창조)를 상징하는 두 안식일이 하루(동시)에 겹친 날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들의 피로 죄인을 구원하시어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어 “재창조 안식일”을 이루시어 마침내 인간과 함께 다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 하루 만에 동시에 지키시고 이루신 날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그날은 안식일의 회복을 약속하는 상징적인 날로서의 “토요일 안식일”과 “십자가 구원의 날”을 상징하는 “유월절 절기 안식일”을 상징하는 두 종류의 상징적 “옛 안식일”들을십자가의 피로 동시에 함께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의 날이 진정한 “재창조 안식일”이 되게 하시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 날이 된 것이었다.(레23:5,6,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큰 날”을 선택하시어 십자가로 “옛 계명”의 “옛 안식일”과 유월절 절기 안식일의 언약을 십자가로 이루시고 폐하셨다.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안식일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두 종류의 상징적 안식일을 폐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가가에서 죽으실 때에도 ”옛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키시기 위하여 ”큰 날“을 선택하신 것이라고 오해하는 안식일 교인들이다.)
“옛 것”(“첫 번째 것”)과 “새 것”(“두 번째 것”)의 경계선은? - 십자가!
예수가 오시기 전에는예수님을 상징하는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옛 성소”, 또는 “첫 번째 성소”였다. 그러나 예수가 부활하시어 그분 자신이 “새 성소”, 또는 “두 번째 성소”가 되셨다.(요2:21) 그 결과 “첫 번째 성소”였던 예루살렘 성전은 없어져도 무방하였다. 이처럼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 “첫 번째 것”과“두 번째 것”의 경계선은 바로 십자가였다. 바울이 이렇게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것”이라는 방식으로 구분한 이유는 구약, 바로 “옛 언약”(초등학문)의 문자로 기록된 율법적 단계의 “토요일”이라는 “첫 반째 안식일”의 단계를 십자가로 졸업하고 이제 더 높은 단계(고등학문)의 신약의 차원, 곧 “새 언약”의 단계로, 곧 영원의 더 높은 영적 차원의 “두 번째 안식일”, 바로 “재창조 안식일”로 더 승화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키기 위하여 십자가를 경계선으로 삼고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으로 구분한 것처럼 “첫 번째 것”과“두 번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안식일도 십자가를 경계 삼아 “옛 언약의 안식일”과 “새 언약의 안식일”, 또는“첫 번째 안식일”과“두 번재 안식일”로 구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십자가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옛 것”들은 다 십자가로 구원하시겠다는 언약과 상징들로서 십자가로 모두 이루어져 버렸기 때문에 폐하여진 약속인 것이다, 그 대신 안식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언약이나 상징, 또눈 그림자들이 아닌 몸(실체)로서 “새 것”들이 실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표준)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보혈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옛 계명”을 고수할 수하며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계속 기디릴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새 부대)에게는 “새 언약”(새 술)을 담아야 한다. 십자가 이전에는 토요일이 구원을 언약하고 상징하였다면, 십자가 이후에는 십자가의 날이 구원의 모든 언약과 상징을 다 이루신 그날, 갈바리의 날, 곧 잃어버렸던 “안식일”이 실제로 회복된 “재창조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옛 계명”의 “옛 안식일”(구약)과 “새 계명”의 “새 안식일”(신약)
“재창조 전의 ”옛 안식일”과 “재창조 후의 ”새 안식일”
“첫 번째 안식일”(토요일)과 “두 번째 안식일”(큰 날)
“시내산 안식일”과 “갈바리 안식일”
“옛 사람(죄인)의 안식일”과 “새 사람”(새로운 피조물)의 안식일“
“모세에게 주셨던 안식일”과 “예수에게 주신 안식일”(다 이루신 날)
“모세의 안식일”과 “예수(여호수아”의 안식일“(히4:8)
그렇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에게는 “옛 계명”(십계명)이 십자가로 폐하여 “새 계명”으로 현실화 되어 승화하였다. 따라서 “옛 안식일”도 십자가로 폐하여 “새 안식일”이 되었다. 광야에서 주신 “첫 번째 안식일”을 십자가로 폐하신 이유는 갈바리에서 주신 “두 번째 안식일”(재창조 안식일)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첫째 아담이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것이었다. 그렇다, 가나의 혼인 잔치 때에 예수께서 만드신 포도주처럼(요2:10)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 보다 더 좋은 포도주이다. 그래서 첫 번째 것을 폐하시는 것이다.
히10:9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하셨으니,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남은 자(144000)가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이 “새 계명”일까 “옛 계명”일까?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것이니라.(새 계명)
결국, “아버지의 계명”이 예수님의 “내 계명”이며, 그 “내 계명”이 바로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이다. 그러므로 그 “새 계명”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다.
아버지의 계명 = 내 계명 = 새 계명 → 하나님의 계명
사도 바울이 지킨 “하나님의 계명”은 과연 십계명(옛 계명)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십자가 이전까지 자기 자신과 유대인들이 지키던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할례법마저도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십자가 이후부터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뿐이라고 기록하였다.
[고전7:19]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이 “하나님의 계명”은 계시록에서 남은 자들이 지키는.(계12:17, 14:12) 것이다. 과연 이 “하나님의 계명”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 받기 이전에 지켰던 십계명(옛 계명)이었을까?, 아니면 안식일 및 다른 10가지의 종목들을 갖춘 “옛 계명”들이 아닌 “새 계명”(새 언약), 곧 그리스도의 “내 개명”이었을까?.
예수님은 십계명(옛 계명)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지키는 바리세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꾸짖으셨다.(막7:9) “새 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울(바울)도 바리세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예수의 “새 계명”을 알지 못하여 “옛 계명(십계명)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의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게 하신 성령을 받은 후에 ”새 계명“을 깨닫게 되자, 자기가 과거에 지켜 왔던 “옛 계명”,곧 십계명은 폐하였다고 분명히 기록하였다.
히7:18“옛 계명”은 약하고 쓸모가 없어서 폐지 되었다.(현대인)
그리고 바울은, 이제 “옛 계명”이 폐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새 언약”, 곧 “새 계명”의 일꾼이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의문(율법의 문자)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바울이 십자가를 거부하여 성령을 받기 전에 자기가 가르치던 “옛 계명”, 곧 “돌에 새긴” 십계명은 죄인을 정죄하며 죽이던 의문의 직분을 행하던 자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과거에는 문자로 기록된 계명을 가르치며 죄인을 죽이는 일꾼이었지만, 이제 십자가 이후에는 문자의 율법(계명)은 다 이루어져 지나가고, 이제는 성령을 받아 영으로죄인들을 살리는 “새 언약”(새 계명)일꾼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사단이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는 예언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사단이 “때와 법”을 “변개하려고 시도(intend, attempt, try)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단7:25) 안식일 교회는 사단이 안식일(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꿈으로 “때”를 변개시켰고 십계명을 바꾸는 것으로 “법”을 변개시켰기 때문에 사단이 이 예언을 이미 성취하였다고 생각하며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이 “대와 법”을 변개 시키려고 시도할 것이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으로 예언하셨다.(악한 시어머니가 아들을 이혼시키려고 시도할 것이라는 말과 아들을 이혼시켰다는 말은 완전히 다르다)
사단이 죽도록 증오하고 파괴하려는 “때”가 있다면 “십자가의 때”, 곧 “구원의 때”이다. 그리고 또 사단이 증오하고 파괴하고 싶은 “법”은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법, 곧 행위의 법(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다. 사단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었고 그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으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3:24)고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 곧 “생명의 성령의 법”(믿음의 법)을 죽도록 증오 한다. 이 때문에 사단이 실제로 변개코자 하는 “때”는 구원의 때이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명의 성령의 법”(믿음의 법)이다.
사단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자자들이 예언한 십자가를 완전히 거부하게 하여 철저히 율법주의 국가로 만들이 백성들이 “행위의 법”(죄와 사망의 법)을 따르게 하여 예수를 거부하게 하는 일에 이미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직접 오시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어 단번에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초대교회라는 새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를 세우셨다. 사단은 이 “믿음의 법”으로 세워진 초대교회를 파괴하여 율법주의적인 유대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때”, 곧 “구원의 때”를 변개하고 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어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아드리지 못하게 하여,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게 하여 십자가의 구원을 무효화 하고 싶어 했다. 사단은 이 목적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사단은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다시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단은 교회를 점점 타락시키어 십자가로 옛 계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망각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꼭 하여야 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이미 폐한 십계명을 범 교회적으로, 공식적으로 변개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예언(단7:25)은 사단의 깊은 의도를 성도들이 이해하여 사단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 적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으로자기가 아직도 부족할지라도 예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완성하여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가르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생명의 성령의 법”을성령으로 깨달았다.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이 바로 “믿음의 법”이었다. 그 결과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얽매어 사단(사망)에게 종노릇 하게 하였던 법, 곧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죄와 사망의 법”(율법주의적 법), 곧 “행위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믿음의 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이 인쳐주시는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성령 없이는 불가능하다. 바로 바울에게 이 성령이 안쳐주신 이 “생명의 성령의 법”(믿음의 법)이야말로 “하나님의 인”이다. 바로 이 성령이 인쳐주신 “생명의 성령의 법”, 곧 “믿음의 법”이, 오랜 세월 동안 그를 바리새인으로 만들어 행위주의(율법주의)로 얽매어 사망에게 종노릇 하게 한 사단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나 사단은 십계명(옛 계명)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그의 율법주의적 교리, 곧 “죄와 사망의 법”(행위의 법)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단이 실제로 노린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마24:24) 바울이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하나님의 인)을 더 깊이 깨닫지 못하게 하고 혼란시켜 율법주의적인 “죄와 사망의 법”(짐승의 표)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미혹하는 것이었다.
사단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서,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그들이 익숙하였던 율법주의으로 돌아가도록 미혹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생명과 성령의 법”을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행위의 법”으로 회귀시키려는 사단의 노력은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발견하고 가르쳤던 “믿음의 법”을 향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등을 돌리고 다시 “행위의 법”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을 대립시켜 갈등을 겪는 사태를 유발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시작하였던 교회가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
갈3:3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해지려 하느냐?
사단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이루었던 성공을 범세계적으로 이루기를 원했다. 그는 먼저 온 그리스도 교회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지배하는 교황권(로마교)을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사단은 이 로마교회의 교인들이 다시 “행위의 법”, 곧 율법주의로 돌아가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려면 어떤 특별한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사도 바울이 성령으로 깨닫고 구원받은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을 모든 교인들이 잊어버리게 하여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유대교 시대의 초등학문적, 율법주의적 율법, 곧 “죄와 사망의 법”으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그 결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모든 교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다.
사단이 변개코자 한 “때”와 “법”은 바로 “구원의 때”와 “구원의 법”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신 “때” ⇒ 십자가의 “때”
죄인이 구원받는 방법으로서의 “법” ⇒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
이 “때”와 “법”은 하나님(성령)이 정하신 “때”이며 “법”이다. 사단은 절대로 하나님의 법을 변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망각하게 하고 자기(사단)의 법으로 대체하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다음은 사단이 가르치고 싶은 “때”와 “법”이다.
구원의 때 ⇒ 재림의 때
구원받는 방법 ⇒ 행위의 “법”(죄와 사망의 법)
사단은 “구원을 완성하신 때는 십자가의 때가 아니라 재림의 때로 “때”를 변개시키고, 또 구원의 법은 십자가의 보혈로 완성하신 구원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려 구원을 받는다는 “생명의 성령의 법”(믿음의 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죄와 사망의 법”(행위의 법)으로 다시 변개하고 싶었다.
사단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 두 가지를 단행하였다. “새 계명”(하나님의 계명)에는 없지만 이미 십자가로 다 이루어진 “옛 계명”에만 있는 안식일(토요일)을 변개하여 일요일로 대체시켰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금하는 계명과 탐내지 말라는 10번째 계명도 제거해버렸다.
사단은 왜 십자가로 폐한 옛 계명(십계명)을 공개적으로 변개하면 “구원의 때”를 재림 때로, 그리고 “믿음의 법”을 “행위의 법”으로 변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사단은 십계명을 변개함으로 말미암아 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불과한 교황이 청조주 하나님이 직점 기록하여 주신 십계명,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십계명(마5:18)을 변개했다는 큰 충격을 성도들에게 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단은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의 진리로 성령의 인치심을 확실히 받지 못한 모든 성도들도 이 충격을 받아 교황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임을 의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단의 세력이 안식일과 계명을 변개한 이유 인간으로 하여금 안식일과 계명을 올바로 지키지 못하게 하여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사단이 변개한 십계명만은 꼭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하도록 하여 율법주의적 생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였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십자가 이후에라도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위하여 중요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따라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도록 유인하는 함정에 많은 성도들이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이 주도한 이 십계명의 변개를 보고 많은 성도들이 미혹 당하여 십계명이 십자가로 폐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일에도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다시 “행위의 법”(율법주의)으로 돌아가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이 사단의 본래의 의도였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기를 “아!, 사단이 공격하는 주목표가 안식일이며 십계명이구나! 라고 오해하도록 하는 이 함정에 빠지게 되면, 교황권을 불신하던 자들 중에 어떤 자들이 생각하기를 ”참 진리교회의 사명이 있다면, 사단이 없애버린 안식일을 회복하고 십계명을 회복하여 지키는 것이 참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진리를 회복시키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어떤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래의 옛 계명인 십계명을 회복하는 교회가 진리교회라는 왜곡된 생각을 사단이 넣어주는 일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이미 이루신 ”엣 계명“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을 깜박 잊어버리게 하고 ”옛 계명“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사단이 획책하였던 것이다. 이 사단의 계획이 성공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믿음의 법)을 발견했던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이 다시 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죄와 사망의 법“(행위의 법), 곧 율법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단의 함정에 빠진 자들이 안식일 교회를 세우고 안식일과 십계명 회복을 외치기 시작하면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안식일(토요일)이 바로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십계명을 복종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사단의 계확대로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도록 미혹하여 성공한 것이다.
만약 로마교가 십자가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가르치는 복음을 인정하는 교회였다면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진 “옛 계명”(십계명)을 변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로마교가 십계명을 절대로 변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로마교도 모든 율법(십계명)이, 하나님이 죄인을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약속)인 것을 알았다는 의미이며, 십자가로 그 “옛 언약”이 이미 성취되어 옛 계명(율법)이 폐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십자가로 이미 폐한 옛 계명을 변개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십계명(율법)이 십자가의 피로 세상의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약속)이며 십자가로 이 약속들을 이미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사단은 그 옛 언약(옛 계명)이 십자가로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잊어버리거나 인정하지 않도록 오해시켜 율법주의로 회기 시키려고 시도하기 위하여 안식일과 십계명을 일부러 변개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교인들은 사단의 공격목표가 안식일과 십계명이라고 오해하게 하였다. 그 결과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 보다는 안식일과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을 위하여 더 중요하다고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믿게 하시는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거부하게 하는 일에 사단이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각자의 행위와 완성된 품성으로 (초림 때가 아닌) 재림 때에 가서야 구원이 확정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단 교회들을 세운다. 그 결과 이단 교회들은 옛 계명과 새 계명,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도 망각하거나 알지 못한다. 사단은 오늘의 개신교도들을 유대교와 안식일교인들처럼 십자가 이후에도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로 조금씩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단 교회들을 이용하여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시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시는 성령을 거부하게 하도록 시도한다. 그리고 성령을 향하여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아 복음을 어정쩡하게 받아드린 자들로 하여금 “믿음의 법”은 사람들을 방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속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아오도록 미혹하는 설득 방법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단이 토요일 안식일을 일요일로 대체하였으니 사단이 안식일로 선택한 일요일이 ”짐승의 표“임이 분명하고 토요일이 ”하나님의 인“이라는 단순 논리의 함정에 빠지도록 미혹한 것이다. 사단은 이런 간교한 방법으로 성령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행위의 법”에 빠지도록 함정을 만들어 그가 없애버린 안식일(토요일)이 하나님의 인이며, 사단이 안식일로 만든 일요일이 짐승의 표라고 오해시킨다, 그리하여 결국 십계명(옛 계명)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만 하나님의 인을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오해로 유도 한다. 그 결과 십계명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인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가르침의 결과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행위의 법)의 함정에 자기도 모르게 다시 빠지게 된다. 이 사단의 함정을 미리 예언한 것이 바로 다니엘서 7장 25절의 예언이다.
단7:25 그(사단의 작은 뿔)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사단은 십계명과 안식일을 공개적으로 변개하여 파괴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위의 예언에는 ”변개코자 할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개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성공적으로 변개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보인다. 사단이 정망 자기가 원하는 대로 ”때와 법“을 변개하는 일에 성공했거나 앞으로 성공할 것을 하나님이 예언하였다면 ”변개할 것이다“라고 기록하셨을 것이다. 결코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예언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성도들은 결코 이런 사단의 미혹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가로 ”옛 계명“(옛 언약)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며, 이미 믿음으로 “새 계명”(사랑)의 안식,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영원한 안식을 이미 누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히4:3) 것, 그런 참 복음을 아는 성도들에게는 교황권이 이렇게 십계명을 변개한 사실을 통하여 사단의 공격 목표가 안식일이라고 오해하게 하여 율법주의로 회귀시키려는 사단의 계획에 말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사단의 미혹은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십계명과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였나를 조사하여 구원을 결정한다고 가르치는 조사심판 교리를 탄생시키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단의 궁극적 목표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거부하고 계속 거짓의 영으로 인간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인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디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고, 결국 안식일 준수여부가 구원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집중하게 만드는 단7:25절은 사단의 교묘한 함정이다.
사단이 실제로 변개코자 시도한 것은 무엇일까?
사단의 공격목표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이 이루어졌댜는 복음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사단이 실제로 변개코자 시도한 “때”와 “법”은 그가 이미 변개시킨 “옛 안식일”과 “옛 계명”이 아니었다. 사단의 실제 목표는 “구원을 완성하신 때”를 변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구원을 완성하신 때는 초림의 십자가의 때이다. 그러나 사단은 초림의 십자가의 때에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재림의 때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여 그 구원의 “때”를 “재림의 때”로 변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래 유대교에서는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유대인들은 이미 사단의 율법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 행위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행위의 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의 초대교회는 그 “행위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롬8:2)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된 것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확실히 받아드렸다. 이 때문에 구원은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다고 믿어 사단의 “행위의 법”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믿음의 법”을 받아드렸다.(롬3:27)
그러므로 사단은 이 초대교회가 받아드린 “믿음의 법”을 변개 시키어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아 가도록 하려고 시도하였다. 사단은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조사심판”교리를 만들어,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고 재림 때에 가서야 비로소 죄기 도말 되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고 안식일 교인들을 속여 평생동안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안식일 교인들로 하여금 끝까지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여 그의 목표를 성취하였다.
그러나 사단이 “변개코자 하는”, “구원의 때”와 하나님의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은 영원한 복음이다.(계14:6) 이 때문에 사단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구원의 때”를 재림 때로 변개코자 하고, 또 십자가로 완성하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구원을 받는다는 이 “믿음의 법”을 거부하게 하여 다시, 옛 계명(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행위의 법”으로 변개코자 하지만 결코 변개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성령이 주신 믿음을 받아드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으로 이미 들어간 성도들은 결코 사단의 거짓에 속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는다”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교인(가라지)들을 교회 안에 많이 심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을 더 세속적으로 타락시킨다. 가라지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단이 타락시키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법”으로, 곧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면 율법이 폐했다고 말하면서 저렇게 맘대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한다. 사단은 계속하여 믿음만으로 받는 구원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게 하는 참으로 “값싼” 구원이라는 오해를 하도록 유도한다. 사단은 그러한 “값싼 구원”에 대한 반작용을 사람들의 미음에 일으키어 믿음도 필요하지만 행함도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 것이 옳다며 결국 행함을 강조하는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믿게 하는 성령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거부하고 자의적 믿음으로 가짜 “구원의 확신”을 가진 “가라지”들은 영을 따라 살지 않고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롬8:4) 이 때문에 가라지들은 성령이 열매 맺게 하는 참 행함의 열매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종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라지들은 성령이 주시는 믿음(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 가라지들이 성령이 없이 율법을 행하더라도 그런 행함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성령을 거부한 어떤 가라지들은 이 “값싼” 구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성령이 없지만 그래도 행함을 강조하며 그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값싼 구원”이라는 비판을 피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행위의 법”을 강조하며 성령 없는 경건을 나타내려는 노력을 한다. 이런 풍조가 개신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조사심판” 교리는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믿을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로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게 하는 교리이다. 가짜 구원의 확신을 가진 가라지들이나 아예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임을 믿지 않는 안식일 교인들의 공통적인 문제의 핵심은 결국 성령을 거부한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도 안식일을 지킨다고?
참 안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존재한다. 그 안식은 더 이상 토요일이라는 시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한 안식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만이 바로 지금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재창조 안식일”을 영원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시간의 제한도 날자의 제한도 없이 매일이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나 하늘에 가서나 의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계속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교인들은 그들이 조사심판을 무사히 통과하여 천국에 가서도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십계명을 천국에서도 지킨다는 새 계명을 모르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한국어 성경이 이사야 66장 23절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번역은 “이 안식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 그리고 또 그 다음 안식일까지 매일 영원히 재창조 안식일을 누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밤과 낮이 없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토요일을 또 특별한 날로 지킨다는 말인가?
예수님과 바울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기록도 오역이다. 그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것을 개역 성경에는 ”규례대로“라고 번역이 되어 있으나, 실제 원어로는 ”습관“ 또는 ”관습“에 따라 들어가셔서 유대인들에게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위하여서였다.
”다 이루리라“와 ”다 이루었다“를 알지 못해서 안식일교인이 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계명)과 선지자와 시편의 글은 하나님의 약속(언약)이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십자가에서 흘리게 하신 아들의 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리라“(꼭이루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이었다.
눅24:44 ~모세의 율법(언약)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모든 것(예언)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율법(계명)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율법이 없어지는 때는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때이다. 율법(언약)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시기 위하여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 때“까지는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로 율법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약속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다 이루리라”
결국, 하나님이 율법으로 약속하시고 선지자들로 예언하게 하신 대로 십자가의 피로 죄인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그 이루어 주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미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의 약속은 더 이상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 이루리라”(약속) ⇒ “다 이루었다”(십자가)
구원을 약속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십계명으로 주신 언약, 곧 언약의 돌판(신9:9)은 하나님께서 지적, 도덕적 수준이 인간 이하이던 노예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최소한도의 정상적인 도덕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언약)이었다.
하나님이 이 계명에 기록된 약속을 그 노예 백성들에게 지키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계속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하시면서 그들의 인간성이 정상적 인간(평민)의 수준으로 상승시키실 수가 없으셨다.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아온 그들의 파괴된 인간성(도덕성)을 정상적인 인간의 수준으로 상승시켜주시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을 바로 왕(사단)이 소유한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셔야 했다. 구원하시어(더 이상 노예가 아닌) “하나님이 소유하신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야 하셨다. 노예가 스스로 평민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예가 평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노예의 몸값을 대속하여야 한다.
갈4:7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옛 언약”은 초림의 십자가로 구원을, “새 언약”은 성령으로 성화를 이루신다.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옛 계명”(십계명)은 인간 이하가 되어 있는 노예들에게 최소한의 도덕적 수준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옛 언약”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주신 “새 계명”(새 언약)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완성하신 은혜를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사단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된 백성들에게 주신 새 약속이다. 그 새 약속은 더 이상 인간의 차원인 도덕적 수준을 높여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하늘의 성령의 차원으로서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성화시키시겠다는 더 높은 영적 수준의 사랑의 약속이다. 그 방법은 새 영(성령)을 그들에게 주시는 방법이다.
민15:41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으니 먼저 십자가로 구원하시고, 성령을 주시어 성화시키시어 끝까지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이다.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셔서 우리로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모든 죄인은 먼저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믿음도 성령의 선물이며 “구원의 확신”으로 나타난다. 일단 자녀가 되면 성령을 더 부어주시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가 있게 된다. 마침내 재림하시면 부활시키시어 완전케 하실 것이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죄의 노예 신분 ⇒ 십자가 ⇒ 자녀 신분 ⇒ 성령 주심 ⇒ 변화 ⇒ 완전(마5:48)
“옛 언약”은 초림의 십자가로 “구원”을 먼저 이루(완성)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구원이 먼저 이루어지면 “새 언약”을 주시어 성령으로 “성화”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다. 요약하면 선(先) 구원, 후(後) 성화이다. 그러나 안식일 교회의 조사심판은 선(先) 성화, 후(後)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종말론(계시록)의 핵심
종말론(다니엘서와 계시록)의 핵심은 “새 계명”을 주시고 “재창조 안식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어 영원한 안식을 주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안식일 교회의 종말론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옛 계명”의 “옛 안식일”(토요일)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십자가의 피로 주신 “새 언약”(새 게명)이 아니라 그들은 아직도 “옛 언약”(구약)의 옛 계명(십계명)으로 주어진 “옛 안식일”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새 언약”(신약)의 “새 안식일”은 바로 십자가로 재창조를 이루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의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날, 곧 “재창조 안식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교회는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 폐하신 옛 언약(구약)의 “옛 계명”의 “옛 안식일”(토요일)을 “하나님의 인”으로 규정하여 준수하게 하고, 토요일을 준수하지 않아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옛 계명(십계명)”의 준수를 사실상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어버렸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속죄를 다 이루시어” 이 세상의 죄를 도말하여 없애시기 전,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죄가 있을 동안에는 하나님과 죄인에게 진정한 안식은 불가능하였다. 죄가 없었던 에덴에서 창조를 끝내신 후에 하나님과 인간이 처음으로 함께 누리셨던 “창조 안식일”도 죄가 없었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실 수 있으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없애심을 믿음으로 받아드린 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에게만 진정한 안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신 십자가의 날, 곧 “재창조 안식일”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참 안식은 사실상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죄의 세상에 참 안식을 회복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없애시고 그다음 죄인의 재창조를 이루셔야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재창조 안식일”(십자가의 날)을 맞이하게 되어 마침내 창조가 끝난 후에 에덴에서 “창조 안식일”에 누리셨던 참 안식을 다시 누리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안식이 없었던 이 죄의 세상에 다시 진정한 안식이 있게 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서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어 죄 값을 대속하시어 죄를 없애셔야 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드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 날(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십자가의 날), 이 바로 이 날이 “재창조 안식일”이 시작된 날이 된 것이다.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그 ‘창조 안식일“을 꼭 회복시켜 ”재창조 안식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죄가 있는 동안에도 그나마 죄인들로 하여금 토요일에 일을 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옛날 에덴에서 죄가 없었을 때, 또 앞으로 예수께서 죄를 없애실 때에 다시 누릴 수 있게 될 참 안식을 상징하는 ’임시 안식‘을 잠깐 맛볼 수 있게 하여 주신 상징적인 임시 안식일이 바로 ”옛 언약“(구약)의 옛 계명(십계명)의 안식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임시 안식일(토요일)에 불과했던 ‘옛 안식일“(토요일)을 ”하나님의 인“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어 ”재창조 안식일“을 회복하시어 진정한 안식을 누리시도록 하여 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모욕하고 격하시키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들만이 이 세상에서 십계명(안식일)을 지키어 ”하나님의 인“을 받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유일한 ”남은 교회“(Remnant Church)로서 재림 직전까지 계속될 조사심판을 통과할 수 있게 되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의 궁극적 목표는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는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여,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며 구원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죄인이 이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죄인이 성령을 거부하면 사단은 계속 거짓의 영으로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단이 “하나님의 인”인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디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안식일 준수여부가 구원을 위하여 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도록 만들어 죄인들이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 율법에 얽매어 종노릇 하게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말론의 핵심이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강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율법(계명)에 대한 복종이 핵심이 되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완악하였을 때)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느냐.
하나님의 인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 바울이 지켰던 “하나님의 계명”이 그가 십자가를 거부하고 스데반도 죽였던 그 당시의 십자가 이전의 십계명(옛 계명)이 아니라 “새 계명”(새 언약), 곤 “내가 너희를 서로 사랑하도록 변화시켜 줄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새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드린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다.
그렇다면 안식일 교회의 계시록(계12:17, 14:12)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오류임이 드러난다. 안식일 교회는 ”남은 자“들이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은 십자가 이전의 “옛 계명”(십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옛 계명”의 안식일(토요일)이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짐승의 표”는 일요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안식일 교회가 이렇게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단7:25절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인은 “옛 계명”의 안식일(토요일)이라는 날짜가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완성된 구원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자들, 곧 144000의 이마에 성령이 인치신(성령의 역사로 머리 속에 각인 돤)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계14:1)이라고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다. 여기서 “이름”이란 품성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언약”, 곧 “내가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변화시켜 주겠다”는 그 새 약속을 믿게 하는 성령이 주신 믿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이 들어오시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하시어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신다. 결국 성령이 이마(마음)에 인쳐 주신다는 말은 성도들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 결과 성령은 나의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어(겔36:26) 내 속에 이루어 주시고 계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바로 “하나님의 인”이다.
짐승의 표
바울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알기 전에, 그가 사단의 영 안에서 그토록 철두철미하게 그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생각은 율법의 행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행위의 법”(죄와 사망의 법)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 결과 그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그런 영적상태가 바로 사울이 사단으로부터 “짐승의 표”를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영적상태에 따라 그의 품성도 사단의 품성을 닮아가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는 스데반과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런 행위와 품성이 의롭다고 확고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울의 영적상태와 품성이 바로 사단의 영으로 그가 “짐승의 표”를 받았던 상태였다.
그런 바울이 마침내 성령을 받아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리게 하는,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이제 그는 “율법의 행함도 없이 경건치 아니할지라도 그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다(롬4:5)는 ”믿음의 법“을 알게 되었다.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이 마침내 바울을 얽매고 있었던 율법주의적인 “행위의 법”(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바울을 성령으로 해방시킨 것이다.(롬8:2)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성령이 인쳐 주신 믿음”(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어 그의 품성도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성도들의 품성의 변화는 성령이 주시는 그 ’믿음‘(구원의 확신)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바울이 바로 성령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영적상태이다.
짐승의 표는 날자(일요일)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이 토요일이라는 날짜가 아니라, “성령이 인쳐주신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믿는 “구원의 확신”이며 그 확신을 주신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형성시켜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품성이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도 “일요일”이라는 날짜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받아드리게 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게 하는 사단의 영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구원에 대한 의심”이거나 또는 사단이 주는 “거짓 구원의 확신”이며 그 사단의 영에 따라 그들 속에 형성되는 율법주의적 품성이 바로 “짐승의 표”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사울(바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가 “언약”의 율법(계명)을 “명령”이라고 오해시켜 명령을 순종하는 길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율법주의(행위의 법)를 가르치고 있었다. 사단은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게 하여 백성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더 나아가 사울(바울)은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에 얽매이게 하여 그들을 영적으로 죽게 하였던 “정죄의 직분”에 빠져 있었다. 사울은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거부하여 그 결과 십자가의 구원을 거부하며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을 거부하면서 성령이 인쳐주시는 “하나님의 인”(믿음의 법)을 받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령이 믿게 하는 “믿음의 법”을 거부하고 사단의 영을 받아 “행위의 법”을 받아드린 사울의 영적상태가 바로 사울이 사단으로부터 “짐승의 표”를 받은 상태였다.
일요일 휴업령?
그리고 사단은 성령을 받아 참 구원의 확신을 가진 하나님의 택한 자(알곡)들까지도 “값싼 구원”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오해받게 하여 “믿음의 법”을 계속 폄하시킬 것이다. 사단은 성령을 거부한 자들을 점점 더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할 것이다. 이렇게 사단은 사람들을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조사심판과 같은 변질 된 교리를 확산시키어 “행위의 법”을 은연중에 더 강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사단의 방법은 본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버리게 한 방법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모든 율법(계명)이 언약(약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명령으로 오해시키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토요일에는 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행위로 순종함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속여 십자가의 은혜를 은폐시키어 사도 바울이 마침내 발견한 “믿음의 법”(생명의 성령의 법)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사단은 “믿음의 법”을 따르는 하나님의 교회를 갈라디아 교회처럼 “행위의 법”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그의 목적을 끝까지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 위정자들을 충동하여 토요일 안식일을 주장하며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는 경제권을 박탈한다는 법령을 제정하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사단이 그런 장난을 찬다면, 아직도 십자가로 옛 계명이 폐한 것을 알지 못하는 교인들, 아직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을 성령이 주시는 믿음으로 받아드리지 않은 자(예:조사심판을 믿는 자)들은 생각하기를 “아 역시 토요일 안식일이 ’하나님의 인‘이구나!”라고 외치면서 철저히 율법주의로 돌아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라고 더 확신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게 하려고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공작으로 일요일 휴업령이 공표된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안식일 교인들이 생각하는 대로) 토요일 안식일이 하나님의 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단은 오히려 안식일 교인들을 더 율법주의에 빠지게 하는 함정으로 일요일 휴업령을 사용할 것이다. 과연 사단이 일요일 휴업령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할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안식일 교인들은 사단이 하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의 시간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단이 일요일 휴업령을 발표하면 재림 때가 가까이 온 것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사단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지도록 유도한다.
짐승을 위한 우상-
타락한 개신교를 앞장세워 교황권이 주축이 된 율법주의적 통합종교를 만든다.
짐승의 표
이마에 표를 받는 자 – 주일성수를 해야만, 십계명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통합종교의 율법주의적 교리에 대한 확신을 악령들로부터 받는 것. - 조건적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것
토요일 안식일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거짓의 영으로부터 받은 상태
오른 손에 표를 받는 자 – 확신은 없어도 먹고 살기 위하여 행동으로 동의하는 것.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인의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받아드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상태이면 모두 짐승의 표를 받는다.
하나님의 인은 이마에만 밎는다. in their foreheads. - 무조건적 사랑의 하나님을 받아드리는 것.
[계9:4]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해하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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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아브라함의 후손 야곱의 가족들을 애급으로 보내에 애급인들의 우상숭배에 깊이 빠지게 하여 영적으로 말살되도록 획책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바닥을 친 이스라엘 백성을 100%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이들 예수를 보내어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언약(율법과 계명)들을 주셨다.
사단은 하나님이 주신 그 언약(율법과 계명)들을 명령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해시켜 이 율법(명령)들을 순종해야만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그들의 마음속에 가르쳤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보혈의 은혜로 애급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잊어버리게 되었댜. 그리고 율법주의로 유도하는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사단이 사용하였던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사단의 계략대로 하나님의 언약(계명, 율법)을 명령으로 오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율법주의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구원의 약속(언약)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때에 죄인들은 율법주의로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이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을 받은 144,000은 더 이상 율법에 나타난 할례, 제사, 날짜 등등에 구애받는 자들이 아니다. 영을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사단은 성령으로 시작한 갈라디아 교회에서 할례냐? 무할례냐?로 그리스도인들을 혼란 시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미혹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단의 미혹에 빠져들어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갈6: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
갈6: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의미, 가치)이 없으되 오직 (의미 있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실)뿐이니라.
사단은 고린도 교회에도 침투해 들어가서 할례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고전7:19]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새 언약)을 지킬 따름이니라.
위의 말씀에서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언약”을 믿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옛 계명”을 율법적으로 지키며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또 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제기하여 고린도 교인들을 혼란 시키려 하였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고전8: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13: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나, 사단은 결국 하나님의 교회(초대교회)를 완전히 무력으로 정치적으로 장악하였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를 타락시킨 것처럼 교회를 타락시키어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포기하게 하여 다시 행위주의(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알게 하는 복음은 다시 자취를 감추게 되어버렸고 “믿음의 법”은 교회 안에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십자가 이전의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명맥을 이어오든 복음이 자취를 감추게 하고 철저한 율법주의를 따르는 “유대교”로 하나님의 교회를 변질시키는 일에 사단이 성공했던 것처럼 십자가 이후에도 사단은 다시 성공한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루터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은혜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의 법”을 다시 세상이 알게 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루터가 발견한 복음을 거부하는 로마 교회(구교)와 루터의 복음을 받아드린 개신교(신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사단은 루터의 복음을 이어 받아 “믿음의 법”을 가르치는 개신 교회를 공격하여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받지 않은 교인들(가라지)들을 교회에 심기 시작하였다. 가라지들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행함이 그들의 삶속에 나타날 수가 없다. 사단은 이 가라지들을 타락시키어 방종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단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복음을 믿으면 성령의 열매가 전혀 열리지 않는다고 선전하면서 믿음도 중요하지만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반 믿음”, “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시작했던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개신교인들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가리지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완성된 구원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성령을 받지 않은 가라지들이 성령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함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구원은 “값싼 구원”이라고 비난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믿음의 법”이 방종주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여, 결국 구원에는 행함도 필요하다는 율법주의적인 논리에 미혹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폐단을 차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경건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사단은, 개신교회 안에서 루터의 복음을 반대하는 로마 교회를 증오하는 한 무리들을 택하여 안식일 교회를 세웠다. 이 무리들은 로마교회가 루터가 발견한 복음을 반대하는 것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안식일과 십계명을 변개 시키어 십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증오하는 무리였다. 사단은 이 무리를 통하여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만들었다. 로 성도들을 혼란 시키며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 온 세상이 토요일이 안식일임을 알게 하고 구원이 재림 때에 확정됨을 공표하는 교회라는 뜻이다. 이 교회의 명칭에도 십자가의 의미는 돠색되어 있는 것이다.
일요일 휴업령?
성경은 “하나님의 인”은 144000의 이마에 기록된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계14:1) 그 두 분의 “이름”, 곧 품성은 십자가의 복음, 곧 아버지와 어린양의 피어린 구원의 복음의 은혜에 나타나 있다. 이 십자가의 피로 나타내신 복음의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이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십계명(옛 계명)을 변개시킴으로 말미암아(단7:25) 안식일이 “하나님의 인”이고, 일요일은 “짐승의 표”라는 잘못된 인식을 안식일 교인들의 생각 속에 심어주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사단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새 언약)이 아닌, 옛 계명(십계명)을 지키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서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재림 때에 구원이 결정될 것이라고 안식일 교인들이 믿도록 속인 것이다.
이제 사단이 준비한 그다음 단계의 함정은 “일요일 휴업령”이다. 구원 여부는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으로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 교인들에게는 구원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식일(토요일)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인을 받아야 하는 율법적 행위가 있어야만 최종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율법주의적 생각으로 사단이 몰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가 오면 전 세계에 강제적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것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일요일 휴업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가 올 때까지 일요일 휴업령, 곧 짐승의 표를 거부할 수 있도록 스스로 마음의 다짐을 하며 대비를 해야 된다는 강박적 생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원을 받아드리게 하는 믿음을 주시는 성령과의 교재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고, 또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을 통하여 얻는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확신을 평생동안 거부하도록 하며 결국에는 성령을 훼방하게 하여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하여 주신 구원을 끝내 거부하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제7일 인삭일 예수 재림교회 – 신앙의 핵심이 초림 때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나타내는 복음을 나타내는 명칭이 아니다. 오히려 토요일(십계명)을 철저히 지켜 “재림 때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행위의 법을 강조하는 명칭에 불과하다.
나는 누가 144천인을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빛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3SM 51)
144000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조사심판 때문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를 있을 수 없게 하는 조사심판을 믿으면 144000의 정체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교리들이 범람하고 있다. 수천 수만 가지의 교리들을 가르치는 종교 단체들이 많이 있으나, 하나님의 기호와 특징이 있는 종교는 오직 하나 뿐이다.(2SM 379)
주님께서는 그날 이후 오늘 1893년에 이르기까지 한 교회를 간직해 오셨다. 성경은 우리 앞에 한 모본 교회(남은 교회)를 제시한다….누군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로 구성된 몸체에서 떨어져 나가서 그의 인간적인 저울로 교회를 달아보기 시작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베풀고 책들이 펴 놓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그 날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숨겨졌던 그 돌판들이 의의 표준으로써 세상 앞에 제시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의 필수적 요소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율법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도 죄를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율법의 의로운 원칙에 따라서 생명 혹은 사망의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리뷰 1909. 1. 28). (1BC 1109.4)
십자가가 의의 표준이다. 돌판에 기록하신 옛 계명이 의의 표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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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
은혜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은혜는 무조건적 사랑이다.
조건적 사랑은 은혜가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건적 사랑이시라면
그 조건적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수 없다.
은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베푸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기 때문에 아들을 피 흘리게 하시어 죄인을 대속하신다.
따라서 조건적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셔서 죄인을 구원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으로 보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순종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이 제시하는 모든 구원의 조건들을 충족하여 구원을 얻는 길밖에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령의 역사로, 나에게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임을 받아드릴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 아니라면 자기는 가망이 전혀 없는 절망적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이란 자기의 능력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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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은 성도들을 분노하게 하여 율법주의로 돌아가도록 유인한다.
사단은 정치적으로 동성연애를 합법화 하여 동성결혼도 허락한다.
이러한 노골적인 반율법적인 입법을 하면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논쟁이 발생하도록 유도한다.
북한이 남남 갈등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그 때에 공중에는 접쳐진 두돌비를 쥔 손이 나타난다."선지자는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시로 시50:6. 하나님 의 율법을 대적한 자들은 목사들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은 넷째 계명의 안식일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 됨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들은 거짓 안식일의 참 성질과 그들이 건축해온 모래로 된 기초를 (마7:24-27참조)너무도 늦게 깨닫는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대적하여 온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악한 종아 나를 떠나가라는' 선고를 받은 자의 운명은 두려운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