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계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by 벚꽃향기 posted Jun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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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계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왜 하나님은 성경을 그렇게 쓰셨는가?

– 하나님의 사랑은 왜 그렇게 오해받기 쉬운 방식으로 계시되었는가?



0. 당신도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신 적은 없으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하셨는가? 왜 노예제도가 정당화된 것처럼 보이는가? 왜 여성을 침묵시키라는 구절이 신약에 있는가? 왜 지옥의 형벌은 그렇게도 잔혹하게 묘사되어 있는가?

이런 구절을 읽으며 “이것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일까?” 하면서 고개를 젓고, 성경을 덮어버리신 적은 없으셨나요?

이 글은 바로 그 고통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하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서론 – 하늘의 책이 왜 땅의 눈물로 쓰였는가?

우리는 묻는다. 전지전능하시며 사랑이신 하나님,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마음을 전하시고자 하셨다면, 왜 그렇게 하셨는가?

왜 구약은 폭력으로 얼룩졌는가? 왜 신약은 조건적인 문장으로 가득한가? 왜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도 자주 가려지고, 오해되며, 심지어는 그 반대처럼 느껴지는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영광의 언어, 모든 문화와 철학을 초월한 명징한 선언으로 성경을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더 어울리지 않았겠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신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앞에서 무너지는 절망의 외침이며, 신앙의 중심에서 터지는 통곡이다.

그러나 이 글은 그 절망에, 십자가라는 대답을 건네고자 한다.


2. 하나님의 계시는 권력이 아니라 관계다

하나님은 진리를 강제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지배하지 않는다. 사랑은 기다리고, 비우고, 몸을 낮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를 절대자의 선포가 아닌, 상처투성이 대화의 형태로 주셨다.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려온 권위 있는 법전이 아닌,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피투성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고통스러운 대화의 기록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메시지가 오해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메시지를 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라, 만남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3. 성경은 ‘완전한 문서’가 아니라, ‘사랑의 자기비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안에 들어오셨다.

성경은 절대적 계시가 인간의 손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의 떨리는 손을 통해 말씀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인간의 연약함, 오류, 편견, 분노와 오해까지도, 하나님은 그 안에 자신을 감추셨다.

"그분은 완벽한 전달보다도, 불완전한 우리와 함께하는 길을 택하셨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니까...


4. 십자가 – 오해의 절정에서 드러난 사랑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가 가장 왜곡된 자리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그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 (마 27:40)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다!” (갈 3:13)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히 오해한 자리였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장 온전히 계시하셨다. 말이 아닌 로, 설명이 아닌 죽음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다.

"성경의 모든 어둠은, 결국 이 십자가의 빛을 위해 준비된 무대였다."


(잠시 옆길로:4-1) 왜 십자가가 성경 해석의 열쇠인가?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계시의 중심’이다. 히브리서 1장은 말한다:

“옛적에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1–3)

곧, 성경 전체는 아들을 통해, 그 십자가를 통해 다시 읽혀야 한다.

이 중심 진리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로도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요한복음 1: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5:39–40 –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누가복음 24:25–27 –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44–47 –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고린도전서 2:2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후서 3:14–16 – “모세를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요한복음 14:9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골로새서 1:15–20 –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그와 화목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심이라.”

요한계시록 5:5–6 –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그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이 모든 말씀은 동일한 진실을 말한다. 성경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온전히 해석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력한 패배가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의 절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경 본문을,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조명하여 해석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지막 해설’이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십자가 없이 읽으면 사람을 죽인다

십자가 없이 읽는 성경은 흉기가 된다.

진멸 명령은 혐오의 근거가 되고,

율법은 정죄의 도구가 되며,

성결 규정은 배제의 무기가 된다.

구약의 심판은 하나님의 저주로만 읽히고,

계명은 자격을 가르는 시험지가 되며,

예언은 두려움과 종말 공포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십자가로 성경을 다시 읽으면,

진멸은 하나님의 눈물로 해석되고,

율법은 사랑의 갈망으로 다가오며,

성결은 거룩한 품으로의 초대가 된다.

구약의 심판은 하나님이 죄를 끌어안고 우셨던 자리로 밝혀지고,

계명은 사랑 안에 거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으로 다시 들리며,

예언은 십자가를 통해 완성될 회복과 소망의 약속이 된다.

"성경은 살아 있는 책이지만, 그 생명은 십자가에서만 깨어난다."


6. 왜곡될 수 있는 계시는 오히려 사랑의 깊이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성경이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럼에도 그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언젠가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게 되리라 믿으셨다.

"성경이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한 사랑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해받기 위한 말씀은 가슴에 묻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침묵하신 분이었다.


7. 결론 – 하나님은 왜 그렇게 성경을 쓰셨는가?

그분은 “이해시키기 위해”가 아니라 “만나기 위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복종이 아니라, 신뢰였고, 설명이 아니라, 포옹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의 완벽한 언어가 아니라, 땅의 찢긴 언어로 쓰였다.

"성경은 오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해할 수 없다."

"성경은 복잡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하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가 내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 아들의 십자가를 보고 나를 다시 생각해주지 않겠니?”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법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로 써내려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연애편지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사랑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