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를 부정하면 “아직”도 무의미하다

by 벚꽃향기 posted Jun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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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루어진 구원”만을 절대화하는 주장은 성경 전체의 구원론적 긴장을 무시한 단편적 해석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분명히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며, 이는 과거에 받은 구원의 확증이 현재적 실천과 미래적 완성을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이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 사이의 역동적인 여정이며, 이는 빌립보서 3:12에서도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바울 자신의 고백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로서, 그분을 따라가는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전체가 말하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삶"(갈 5:6) 간의 유기적 관계입니다.

또한 “심판” 역시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다양한 층위를 갖는 용어입니다. 요한복음 3:18에서 말하는 ‘스스로 선택한 심판’이 개인적 자초(自招) 심판이라면, 마태복음 12:36, 로마서 14:10, 고린도후서 5:10 등은 공적이고 우주적인 심판을 명백히 예고합니다. 이는 죄인에 대한 형벌의 심판일 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까지도 ‘행위에 따라 보응을 받는’ 책임의 심판임을 말하며, 요한복음 5:29의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역시 구원의 과정에 실재적 책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자 행위대로 심문을 받는다”(고후 5:10)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며, 바로 이러한 공적인 심판의 성격을 충분히 고려할 때, ‘조사심판’은 단순한 교리적 주장 이상으로, 성경의 심판관과 조화를 이루는 성실한 신학적 시도임이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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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십자가를 잊는가?
–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을 복음 없이 해석할 때 발생하는 치명적 전도


선생님,
선생님의 글은 겉보기에는 성경의 구원론적 긴장을 매우 균형 잡히게 설명하는 듯 보입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신약의 중요한 텐션, 과거에 받은 구원의 확증과 현재의 실천, 미래의 완성 사이의 유기성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구속사의 단계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그 마음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지금 논의 중인 이 구원 문제에서,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협력 없이도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는가,
아니면 우리가 복종과 노력으로 그것을 마침내 완성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글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긴장된 언어를 ‘조건적 완성’으로 읽음으로써, 복음의 확실성과 하나님의 사랑의 전폭적 성취를 흔들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충분성과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을 인간 중심의 구조로 미끄러뜨리고 있습니다.


1.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인간 책임 중심으로 해석하는 오류

“구원이란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이미’와 ‘아직’ 사이의 역동적인 여정이다.”

이 말은 일면 옳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뤄가는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완성해가시는 여정’입니다.
그 핵심이 바로 빌립보서 2:13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즉,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도성 속에서 그분의 구원이 우리의 전 삶에 드러나도록 하라는 초대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자신을 구원해가야 할 피고가 아니라, 이미 무죄 판결을 받고 생명 안에 들어온 자입니다.
이제 그 생명이, 마치 씨앗처럼 자라나며 열매 맺는 것이 바로 “삶 속에서 구원을 살아내는 과정”이지,
그 구원을 다시 심판대 앞에서 ‘입증’해야 하는 법적 검증은 아닙니다.

선생님의 글은 이 법정적 해석과 관계적 해석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결국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다가 그리스도의 완성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2. “이미 얻지 않았다”는 빌립보서 3:12의 의미를 오해하다

“바울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얻지 않았다”는 것은 ‘구원의 확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 즉 최종적인 영화(glorification)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빌립보서 3장 21절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즉, 바울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롬 5:1), “하늘의 시민권을 소유했으며”(빌 3:20),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자”(3:12)로서 구원의 신분은 분명히 완성되었습니다.
그가 좇아가는 것은 이제 부활의 실현, 그 사랑의 완전한 체현이지, 결코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의 완성’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이 차이를 보지 못함으로써,
구원의 완성(하나님의 선물)을 인간의 추구로 오해하게 만들고,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충분하지 않다"는 무언의 결론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3. 심판의 층위는 복음의 확신을 흔드는 도구가 될 수 없다

선생님은 “심판은 다양한 층위가 있으며, 믿는 자도 보응을 받는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성경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고후 5:10)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심판의 성격이 무엇인가입니다.

이 심판은 결코 ‘구원 여부’를 결정하는 법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죄인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열매를 검토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정죄가 아닌 보상의 자리입니다 (고전 3:12–15).

이것이 요한복음 3:18이 말하는 바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이미 심판을 통과한 사람에게 다시 심판을 예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법적 미봉책으로 만들고,
‘조건부 사랑’이라는 거짓 복음을 퍼뜨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사심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심판의 층위를 논하셨지만,
그 어떤 성경 본문도, 십자가에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를 다시 ‘죄의 기준’으로 심문하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십자가는 “부분적 구속”이 되고, 성령의 인침도 불확실한 보증이 될 뿐입니다.


4. 결론: 구원은 나의 협력이 아니라, 그분의 헌신이다

선생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4)

이 한 구절이 모든 조건적 구원론을 침묵시킵니다.
우리의 복종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반응하는 자유의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불완전한 인간의 협력에 기대어 완성되지 않았고,
인간의 실패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인간의 행위로 조건화되지 않습니다.

조사심판이라는 개념은, 처음에는 책임감을 부여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십자가의 절대성과 성령의 보증을 희석시키며,
사람들을 은혜보다 ‘검열’의 자리로 밀어넣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만 구원의 확신을 갖습니다.
그 확신은 우리 안의 의지에서 오지 않고,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한 곳이 아니라, 이미 완성하신 자리”입니다.
우리는 그 완성에 머물며, 그 사랑에 젖어 살며, 그 영광을 사모하며 나아갈 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