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은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설교에 대한 복음적 고찰” ―
사랑하는 목사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목사님의 열정과 확신 속에 선포된 이 설교, 「소수의 남은 자만 구원받고 휴거받는다」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바라보는 절박한 영적 경각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향한 진지한 갈망이었습니다. 말씀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심판과 구원의 문제를 날카롭게 언급하신 점은 분명 진심에서 비롯되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목사님,
이제부터 저는 매우 무겁고 심오한 질문을 감히 드리고자 합니다. 이 글은 결코 정죄가 아니라, 복음에 뿌리를 둔 사랑의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 그리고 복음의 중심을 어떻게 놓치고 있는지를 성경과 신학, 그리고 복음의 논리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1. ‘소수만 구원받는다’는 선언은 복음의 선포입니까, 공포의 울림입니까?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대다수는 지옥 갑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적습니다. 끝까지 견딘 렘넌트만 휴거됩니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한 가지 신학적 뿌리가 있습니다.
구원은 조건적이며, 철저한 자기 노력과 견딤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된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복음입니까?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자격 없는 자들에게 열려 있는 초청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딤전 2:4)의 눈물의 선언입니다.
복음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는 자비의 심장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이 ‘소수 렘넌트 중심 종말론’은, 복음의 이 초청성과 일치합니까?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선을 긋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복음은 경고로 시작할 수 있지만, 반드시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오라는 초청으로 귀결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렘넌트 중심 구원론은 율법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목사님은 설교 중 “교회 다녀도 구원 못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반복하셨습니다.
또한 “끝까지 이기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며, 행위의 지속성에 무게를 두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그러나, 이 말씀이 ‘인간의 의지로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율법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견딤’은 자기 능력으로 의를 세우는 행위의 완성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끝까지 붙드는 믿음의 인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렘넌트는 ‘끝까지 완전한 의를 성취한 자’가 아니라, 은혜 안에 끝까지 붙잡힌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남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남기신 자들”입니다(롬 11:5).
렘넌트는 으뜸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장 낮고, 가장 약하며, 버림받은 듯한 자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기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에서 강조된 렘넌트는 마치
“기준에 합격한 최종 정예군”
처럼 들렸습니다. 이는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영적 능력주의입니다.
3. ‘휴거 받을 자격’을 강조할수록 십자가는 사라집니다
“진짜 성도만 휴거된다”, “진짜 구원은 증거로 나타나야 한다”, “가짜 믿음은 드러난다”는 논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사람들이 자기 내면을 끝없이 검사하고 의심하고 스스로를 정죄하는 믿음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구원관은 로마 가톨릭의 공로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십자가는 시작일 뿐, 최종 구원은 당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이러한 설교가 반복되면 교인들은 “과연 나는 구원받은 자일까?”를 끊임없이 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요일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두려움을 심는 사건이 아니라,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건입니다.
4. 예수님이 남기신 자는, 내가 뽑아낸 자가 아닙니다
렘넌트 신학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남은 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공포를 조장하며,
결국 ‘남은 자 안에 포함되기 위한 자격 경쟁’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자격을 따지는 신학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격 대신 초청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이 두 구절은 ‘렘넌트만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보다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 얼마나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아름다운지를 보여줍니다.
5. 이스라엘 중심 해석은 복음의 보편성과 충돌합니다
목사님께서는 구약의 ‘남은 자(Remnant)’ 개념을 현대 교회와 교인 개개인에게 직접 적용하시며,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렘넌트만이 구원받는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렘넌트 신학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편화시키며 새롭게 재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조차, 그 중심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이는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
(로마서 9:8)
렘넌트란,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민족적 구분, 신학적 지식, 교회 참여 여부, 종파에 의해 구별되지 않고,
십자가를 붙든 믿음 안에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약적 렘넌트입니다.
그런데 본 설교에서는 이스라엘을 ‘예언 성취의 중심’으로 강조하며,
렘넌트는 철저히 외적 행동 기준과 종말적 징조를 분별하는 능력에 따라 식별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동일한 자격’을 부정하게 됩니다.
복음은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구원의 선포입니다.
렘넌트는 “기독교 정통에 눈뜬 자”나 “구별된 행동을 이뤄낸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택하신 은혜의 잔물결입니다.
6. ‘경고 위주의 메시지’는 결국 율법적 복음을 낳습니다
목사님께서 반복적으로 경고하신 구절들은 분명히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말씀이며,
성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차원에서 귀중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경고가 복음보다 더 커질 때,
사람들은 경고에 의해 움직이고, 두려움에 의해 헌신하며,
사랑보다 공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형적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공포를 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 가운데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사람을 시험하는 조건문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된 완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으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
(요일 4:10)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어야 합니다.
7. 복음은 좁은 길이지만, 은혜는 결코 좁지 않습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강조된 ‘구원받을 자는 매우 적다’, ‘남은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메시지는
청중들에게 “나는 구원받은 자일까?”라는 끊임없는 자기 정죄와 회의를 유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좁은 문’이 곧 자신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요 10:9)
좁은 문은 어떤 기준도, 자격도, 성과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문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 문은 “누구든지”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 문은 좁지만, 결코 닫힌 문이 아니며,
십자가는 오히려 죄인을 가장 넓게 껴안는 하나님의 팔입니다.
설교 전체를 통해 강조된 ‘좁은 자격’, ‘적은 수’, ‘엄격한 구분’은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점점 더 흐리게 만들고,
결국 “남은 자가 되기 위한 경주”를 내면화된 율법주의로 전락시킵니다.
마무리하며: 남은 자, 아니 남게 된 자
목사님,
‘남은 자’는 결코 스스로 남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들, 십자가 아래 붙들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격을 갖추었기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기에 십자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복음은 경고만이 아니라 초청이며,
두려움만이 아니라 품음이며,
잣대만이 아니라 눈물이며,
심판만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주님, 저는 렘넌트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저를 남겨두신다면,
그 은혜로 오늘도 살아 숨 쉬겠습니다.”
이 고백이 진정한 남은 자의 노래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