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론을 향한 복음 중심의 심문
목사님께,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한국 교회와 전 세계 보수 복음주의 교회에 성경적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목사님의 열심과 정성은 분명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편지는 경청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종을 울리기 위해 씁니다.
목사님께서 전하신 설교는, 겉으로는 신약 교회의 소망을 말하는 듯하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그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두려움을 통한 통제의 시스템”이며, 결코 “어린양의 초청”이 아니라, “불안정한 조건부 구원의 공포”라는 점에서, 이 설교는 사랑과 복음을 뿌리째 훼손하는 ‘거짓 복음’의 위험을 내포합니다.
1. “사랑의 복음”이 사라진 자리엔 “겁박의 이론”이 자랍니다
목사님은 설교 시작부터 휴거를 “신약 교회의 가장 큰 소망”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교회의 소망은 ‘들림 받는 날’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입니다.
성경은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했지(딤후 4:8), 깨어 있지 못하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의 무기’로 교회를 위협하라고 명한 적이 없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는 “깨어 있지 않으면 혼란기에 남겨진다”는 율법적 겁박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복음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불안 심리를 자극하여 통제 가능한 신앙 형태를 만들어내려는 종교적 기술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교회를 '엘리트 들림받는 자'와 '낙오된 자'로 나누는 이원론적 구조
목사님은 반복해서 “들림 받는 자”와 “남겨지는 자”를 명확히 나누며, 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신앙이 부족하거나 잠든 자, 또는 거짓 성도로 규정하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되, 그 깨어 있음은 공포에 근거한 긴장 상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메시지는 이렇게 들립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 있다. 혼란기에 들어가면 감당 못 할 것이다.”
복음은 “사랑이 우리를 붙드신다”는 선포이지, “너희가 붙잡지 않으면 떨어진다”는 협박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달려 있고, 이원론은 인간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이 두 사상은 결코 조화될 수 없습니다.
3. ‘들림’의 시나리오가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 나누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휴거론은 단순한 종말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실제로 두 부류로 갈라놓습니다.
믿는 자 중 일부는 ‘들림 받고’, 일부는 ‘남겨져서 환난을 통과한다’는 이 구조는, 한 몸 된 교회(엡 4:4)라는 사도적 선언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 있는 우리가 함께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라”(살전 4:17)
성경 어디에도 “살아 있는 자들 중에서도 덜 준비된 자는 남겨진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복음보다 더 정교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믿음 좋은 자’와 ‘불충한 자’를 분리하는 도식을 성경이라고 주장하십니까?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를 나누고, 사랑을 분열시키는 인간의 이론입니다.
4. “혼란기에 남겨지는 자는 누구인가?” ― 예수는 우리를 두고 가지 않으셨습니다
목사님은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시며, 들림 받지 못한 성도들이 대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설교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내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기도하지 않고,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환난에서 구별하여 들림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세상 한복판에서 믿음을 지키도록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신학’입니다.
그리스도는 “남겨진 자”와 “데려간 자”를 나누지 않으시고, 모든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5. 예수님의 십자가는 “도피”가 아니라 “동행”의 표징입니다
목사님의 메시지는 결국, 환난을 피해 먼저 들림 받는 것을 복음의 궁극적 승리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결코 ‘고통 회피’가 아닙니다. 복음은 “고통 가운데 임재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고,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셨으며,
지금도 고난당하는 이들과 함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환난을 당하셨으니 우리에겐 환난이 없다”는 식의 해석은 복음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탈출주의입니다.
참된 복음은 이렇게 외칩니다:
“환난이 올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6.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을 “두려워하며 대비하라”로 바꾸시렵니까?
목사님께서 반복하여 강조하신 “깨어 있으라”, “기도하며 준비하라”는 말씀의 정신은 본래, 사랑하는 주님과의 재회를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러한 구절들을 일관되게 ‘준비하지 않으면 낙오된다’는 전제 하에 해석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음”은 두려움의 태도가 아니라 사랑의 집중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재림 비유들을 보면, 주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종’보다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린 자를 칭찬하십니다.
‘휴거의 날’을 공포로 기다리는 사람은 신부가 아니라 죄수처럼 불안한 자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수처럼 만드는 소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는”(딤후 4:8) 사랑의 초청장입니다.
7.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 ― 이 두 본문은 “비밀 휴거”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순식간에 변화되고, 공중에서 주와 만나게 될 것이다’는 구절을 반복 인용하시며, ‘비밀스럽고 신속한’ 환난 전 휴거의 근거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들림’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몸으로 우리를 바꾸시며, 다시 만날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입니다.
게다가 이 본문은 어디에도 환난 전/중/후의 시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신다”(살전 4:16)고 명백히 말합니다. 이는 ‘몰래’ 이루어질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즉, 이 본문은 ‘비밀스러운 날아오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 날의 영광스러운 도래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이 구절을 지나치게 세대주의적 체계에 억지로 끼워 맞추셨고, 성경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공포의 시나리오”로 탈바꿈시키셨습니다.
8. 계시록 해석의 왜곡 ― 문자주의가 복음을 죽입니다
설교 중 목사님은 계시록 4장에서 24장로가 등장하는 장면을 근거로, “교회가 환난 전에 이미 들림 받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계시록 해석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위험한 추론입니다.
계시록은 상징과 비유의 묵시문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승리의 드라마를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상징의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장로들’은 단지 문자적 존재가 아니라 승리한 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복음의 메시지를 신비한 시간표의 퍼즐로 축소시키셨습니다.
이러한 해석 방식은 성경의 핵심인 “어린양의 보혈과 사랑의 승리”를 지워버리고, “예언 해석을 아는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지식 중심 신앙의 함정에 빠지게 만듭니다.
9. 종말론이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설교를 들으며 마지막까지 저를 깊이 아프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들림 받는 휴거’이며, 이것을 모르면 깨어 있는 신앙이 아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휴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신약 성경 전체가 외치는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십자가 중심의 진리이지,
“예정된 시간표를 파악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환난을 통과하게 된다”는 공포 신앙 체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억하라,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기억하라, 아직 휴거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종말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중심이 누구인가에 대한 신학적 결정의 차이입니다.
10. 결론 ― 그리스도의 복음은 “탈출”이 아니라 “사랑의 참여”입니다
목사님, 종말의 날에 우리가 진정히 사모해야 할 대상은 ‘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우리를 초청하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휴거를 통해 세상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며,
마침내 그분이 오실 때 영광 가운데 그 얼굴을 마주보며 말할 수 있기를 바래야 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복음은 “사랑에 이끌려 나아가는 열망이지, 공포에 쫓겨 도망치는 탈출 신학”이 아닙니다.
복음은 “들림 받는 영광”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지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제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들림 받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남아주셨듯”,
우리도 혼자 들려가기를 꿈꾸는 자가 아니라, 함께 지고 함께 살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의 입술에서 다음엔 이런 말씀이 선포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환난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진실하신 분이 되시기를,
그리고 참된 복음의 소망이 회복되기를
한 평신도의 마음으로 깊이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그리스도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