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복음의 심장을 잃어버린 껍데기일 수 있습니다

by 벚꽃향기 posted Jul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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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복음의 심장을 잃어버린 껍데기일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김 목사님께,

귀한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개혁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에 응답하신 첫 강의를 통해, 목사님께서 역사신학자로서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를 바르게 알리고자 하는 순전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개혁주의와 칼빈주의의 용어 구분, 그리고 정통주의 신학의 강조점에 대해 학문적 정밀함으로 설명하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강의를 듣고 깊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강의 속의 개혁주의는 성경 전체의 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점점 멀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하신 개혁주의는 철저히 교리적 정합성과 역사적 정통성, 삶의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의 중심이어야 할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곧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본질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강조점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생명과 개혁신학의 껍데기 사이의 치명적 단절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정통주의”를 외치되, 십자가의 복음은 침묵한 개혁주의

목사님께서는 17세기 정통주의 개혁신학을 가장 순수한 개혁주의의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물론 이는 신학사적으로 일면 타당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그 정통주의가 형성되던 시기는 신학이 조직화되면서 동시에 생명을 잃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이 들었던 함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심령 깊은 곳에서 “나는 의로운 하나님이 두렵다”고 고백했고, 칼빈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인간의 절망 속에서 은혜를 붙든다”고 외쳤습니다. 이들의 개혁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에 사로잡힌 영혼의 울부짖음에서 시작된 것이지, 논리적 신학 체계를 위한 도식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정통주의 신학을 높이 평가하며 도르트 신조, 이중 예정, 언약신학을 강조하실 때, 복음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지, 하나님이 왜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셨는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이런 복음의 실존적이고 구속사적인 호소는 단 한 마디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정통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정통이 아니라 정형화된 죽은 패턴을 추종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입술로는 가까우나 마음은 먼 경건”일 수 있습니다(사 29:13; 마 15:8).


2. 성경의 권위는 십자가의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의 첫 번째 기둥으로 “성경주의”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성경 66권의 유기성과 통일성,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언약신학의 구조적 일관성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의 구조 속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계시의 중심이자 해석의 열쇠라는 선언은 사라졌습니다.

성경이 왜 권위 있는 책입니까?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요, 성경이 진정으로 권위를 갖는 이유는 그 말씀 속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살리시며, 문자로 죽이지 않고 영으로 살리십니다(고후 3:6). 이 중심이 빠진 채 성경의 통일성과 원리만을 말하는 것은, 마치 피가 흐르지 않는 정맥을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자비의 절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체계화된 교리 구조 안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성경되게 하는 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지, 언약적 통일성이나 예배 규정 원리가 아닙니다.


3. “이중 예정”의 그림자 – 복음의 얼굴에 드리운 차가운 그늘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의 대표 교리로 “이중 예정”을 설명하시며, 하나님께서 택자뿐 아니라 유기자도 창세 전에 ‘적극적으로’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중 예정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동시에 드러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질문드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유기자를 향한 하나님의 ‘적극적 저주’의 의도가 보입니까?

십자가는 "나는 아무도 잃기를 원치 않는다"(벧후 3:9)는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십자가는 "너희는 원수일 때에조차 사랑을 입었다"(롬 5:10)는 무한한 자비의 심장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십자가의 하나님을 향해, 어떤 영혼에게는 창세 전부터 구원의 기회조차 없는 저주의 작정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예정을 말하지만, 그 예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구속의 목적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의 예정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라고 선언합니다. 그 기쁨은 생명을 주려는 기쁨이지, 멸망을 기뻐하는 기쁨이 아닙니다(겔 18:23 참조).

이중 예정론은 십자가의 중심에서 시작된 복음이 아니라, 신론의 논리로부터 출발한 교리적 귀결일 뿐입니다. 교리적 일관성을 위해 복음의 심장을 왜곡하는 것은, 성경 해석이 아니라 신학의 우상화입니다.


4. “절대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지는 하나님의 겸손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의 두 번째 기둥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제시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은 성경의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강압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무력하게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주권은 군림이 아니라 사랑의 비하였고, 강제함이 아니라 간청하는 은혜였습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절대 주권은 종종 하나님의 “권력”을 강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무력하게 내어주는 “겸손의 권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은 단순한 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 최종적 해석 원리입니다.
공의도, 주권도, 예지도, 심판도 이 사랑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정통주의는 이 순서를 거꾸로 두었습니다. “사랑은 공의의 도구”가 되었고, “십자가는 주권의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무서운 설계자, 인간은 예정된 객체로 전락하고 맙니다.


5. 삶의 신학인가, 실천주의인가 – 십자가 없는 ‘실천’은 또 다른 율법입니다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삶의 신학”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 교리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 사회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복음적 질문이 생깁니다.
그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사랑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면, 우리는 금세 “옳은 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반대로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옳은 삶을 실천하기 위해 복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덮었기에 그 사랑에 감격하여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가 삶을 강조하면서도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다면, 그것은 경건이 아니라 또 다른 율법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매순간 붙들어야 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6. 개혁주의, 복음의 심장으로 돌아오십시오

목사님,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구절을 언급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문장은 의미를 잃은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리를 개혁하고, 예배 형식을 개혁하고, 삶의 실천을 개혁하지만, 하나님의 마음, 예수의 눈물, 성령의 탄식, 십자가의 피 흘림에 대해선 너무나 무감각합니다.
다시 말해, 개혁주의는 교리의 조각상은 만들었지만 그 안에 살아있는 복음의 영을 불어넣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십자가로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 자기희생적 사랑,
저주받은 자리를 자처하신 그 겸비하신 은혜,
원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눈물의 복음에서부터
모든 신학이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semper reformanda”가 되려면,
그 방향은 과거의 전통으로가 아니라, 골고다 언덕으로 향해야 합니다.
개혁은 회귀이며, 그 회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7. 복음이 개혁주의를 완성합니다 – 교리가 아닌 십자가로

개혁주의는 정통을 말하고, 교리를 말하고, 실천을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교리를 안다고 자랑하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리라.” (마 7:23)


교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고, 삶을 부수고, 무릎 꿇게 할 때,
우리는 그제야 “진짜 개혁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회당과 성전이 아닌, 십자가에서 개혁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칼빈이나 바빙크, 에이브럼 카이퍼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신학자를 꿰뚫는 사랑의 본체이십니다.

개혁주의는 교리로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혁주의는 또 하나의 바리새주의로 전락할 뿐입니다.


8. 이제는 십자가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목사님, 개혁주의를 다시 개혁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리와 전통, 학파와 신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세워야 합니다.

개혁주의의 진정한 영광은
이중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은혜이며,
언약신학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언약을 이루신 예수의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절정은
“자기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어린 양”,
“힘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죽으신 주권자”,
“모든 권세 위에 계시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 안에서 드러납니다.

개혁주의가 다시 살아나려면,
그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 모든 구조를
복음의 십자가로 다시 꿰매야 합니다.


맺는 말씀 – 십자가 중심의 개혁, 그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교리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복음 없는 개혁주의는 죽은 교리일 뿐이며,
십자가 없는 정통은 독이 든 성배입니다.

이제 개혁주의는 묻혀 있던 본래의 심장을 되찾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사랑.
그것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이 시대의 신학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다시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목사님의 다음 강의가,
십자가 복음에 물들어 있는 개혁주의를 보여주는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평강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랑하는
한 성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