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주의를 떠나되, 복음의 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by 벚꽃향기 posted Jul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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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주의를 떠나되, 복음의 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께,

선생님의 진지한 학문 여정과 시대의식에 기초한 신학적 제안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합니다. 특히 이 시대의 종교적 경직성, 문자주의적 폐쇄성, 근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계신 점은 분명 귀중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번 「동정녀 탄생」 강의에서 선생님이 제기하신 핵심 논지들―동정녀 탄생의 상징성, 문자주의 해석의 폐기, 복음서 간 불일치, 그리고 타 종교의 유사한 신화적 구조와의 비교―는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복음의 본질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비평은 선생님의 강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 아래서 그 주장을 성찰하고, 오히려 참된 자유와 해방은 ‘문자주의의 탈피’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기부정’ 안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사랑의 호소입니다.


❶ “동정녀 탄생은 종교적 상징인가?” ― 역사 속에 오신 하나님의 계시를 신화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생물학적 사실이 아닌 종교적 상징”이라고 하시며, 그 진실성보다도 종교적 메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영웅은 다 특별한 탄생을 갖는다”는 신화학적 구조를 언급하시며, 예수의 탄생 역시 그러한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성령으로 잉태된 아들” (눅 1:35)


이는 단순한 ‘감동의 언어’가 아니라, 역사적 선언이며, 구속사의 전환점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에 있으며, 이 성육신의 표지가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나 혈통, 의지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시작된 새로운 창조입니다.

선생님은 “성경은 생물학적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단지 ‘상징의 언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침투한 실제 사건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이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는 최초의 파문이며,
그 파문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져, 마침내 온 우주에 구원을 가져옵니다.

이 사건을 신화화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잃고
‘예수의 감동적인 삶’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복음은 감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❷ “바울도 동정녀 탄생을 말하지 않았다?” ― 침묵은 부정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바울서신에 동정녀 탄생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 교리가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 아니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비핵심이라는 결론은 비약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예수의 사역과 십자가,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형성에 있었지, 예수의 탄생 기록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갈 4:4)


이 말씀은 간접적으로나마 그리스도께서 초자연적으로 보내어진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성을 함께 고백하는 이 말씀은, 단순한 인간 영웅 서사나 위인전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예수의 인격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이며, 그분이 단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❸ “복음서 간의 불일치” ― 불일치는 허구가 아니라 풍성함입니다

선생님은 마태와 누가만이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고, 마가와 요한은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시며, 이는 신화적 구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다양성은 진실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저자의 초점과 신학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를 강하게 강조하고,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각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누가의 ‘인간의 관점’과 마태의 ‘예언 성취의 관점’에서 특별히 조명됩니다. 이는 전체 복음의 다양성을 풍성하게 만들며, 오히려 인위적 조작이 아닌 삶과 신앙의 구체적 목격자들의 기록임을 증명합니다.

복음은 기자들마다 서로 다른 관점과 언어, 문학적 구조를 사용했지만,
그 모든 조각이 십자가에서 하나로 수렴되는 대서사입니다.


❹ “문자주의는 기독교를 죽이는가?” ― 문자주의는 ‘복음의 왜곡’일 뿐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문자주의’에 대한 비판, 그것 자체는 매우 타당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인간을 억압하거나, 문자 자체가 곧 신이라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때,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선생님은 ‘문자주의를 벗어난 해석’이 곧 ‘신화적 상징 해석’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서야만 ‘기독교가 현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하지만 복음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죽었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죽으신 사건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상징이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 위의 실제 피이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실제 몸입니다.

‘문자주의를 넘어서라’는 말은,
‘복음의 실제를 포기하라’는 말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문자주의를 떠나되, 복음의 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❺ “복음은 신화가 아니라 계시다” ―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다

선생님께서는 자주 “신화는 진리를 전하기 위한 언어”라고 하시며, 신화를 폐기하려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는 분명한 통찰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신화를 닮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화를 끝낸 이야기입니다.

모든 고대 신화들이 “인간이 신이 되려는 이야기”였다면,
복음은 “신이 인간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화의 전복이며,
그 어떤 종교적 상징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기비움의 극치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이 전복의 서사에서 시작되는 출입구입니다.
이 출입구를 문학적 장치로 치환하는 순간,
우리는 진리의 몸을 신화의 그림자로 되돌려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 안에 스스로 내려오신 계시입니다.


❻ “복음은 오직 사랑이다” ― 그러나 진리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문자와 교리는 그것을 담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이며, 그 사랑은 반드시 육화된 진리로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계시에서 떠난 사랑은 모래 위의 집이며,
진리 없는 사랑은 결국 자신이 사랑한다고 여기는 대상을 파괴하게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순종하신 그 ‘몸의 역사’,
그 몸을 통해 이루어진 성육신,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피흘림, 무덤의 부활.

이 ‘몸의 복음’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영적인 감동”만을 남기고,
그 감동조차 세상의 다른 사상과 종교 속 감동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복음은 감동을 넘어서서,
삶과 죽음을 바꾸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❼ 마지막 권면 ―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선생님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문자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선생님의 경고는 귀 기울일 만한 예언자적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발걸음은 반드시
‘복음의 실제 앞에 무릎 꿇는 십자가 신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해석의 자유’는 우리를 더 열린 존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십자가를 은유로 돌리는 자유라면,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떠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못 자국 난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 손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질문 앞에서, 모든 신화와 상징은 사라지고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습니다.


이 글은 복음을 지키고자 피 흘린 모든 성도들의 고백에 동참하기 위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언젠가 그 고백 앞에 다시 서실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날에는,
동정녀 탄생도, 십자가의 고난도, 부활의 아침도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니라 찬양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