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왜 자기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는가?

by 벚꽃향기 posted Jul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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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왜 자기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는가?]
― 그분이 숨으시는 방식, 그 안에 숨겨진 사랑 ―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께,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질문이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비명입니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렇게 침묵하십니까?”
“왜 악한 자는 번성하고, 의로운 자는 짓밟힙니까?”
“왜 나는 고통받을 때 하늘에서 아무 응답도 들리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이병철 회장의 것이기 이전에,
고통받는 수많은 이들의 공통된 질문이며,
사실상 성경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Ⅰ. 신의 침묵 앞에 먼저 질문하라: “나는 어떤 신을 원하고 있는가?”

신이 자신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먼저 이 질문을 되돌려야 합니다:

“나는 어떤 방식의 계시를 바라고 있는가?”


우리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기적,

모든 종교적 혼란을 제거하는 명백한 음성,

도덕적 악을 즉시 심판하는 무조건적 권위를 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러한 신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실 수 있을까요?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통제하려는 권력자가 아니라,
자유 속에서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Ⅱ. 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반드시 ‘자유’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동화된 복종은 인격적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자유롭게 응답할 여지를 남겨두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믿음은 증명되지 않는 공간에서 작동하며,
바로 그 공간 안에서 하나님은 가장 깊은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Ⅲ.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우리가 기대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을 뿐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 14)


하나님은 오셨습니다. 뚜렷하게, 분명하게, 눈에 보이도록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황금 옥좌가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천군 천사와 함께 강림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대한 하나님은 힘센 정복자였고,
우리 앞에 나타나 악을 심판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 외치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Ⅳ.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 계셨는가?

바로 그곳이
신 존재의 가장 선명한 드러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감추고,
하나님의 사랑을 폭로한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신 존재의 철학적 증명이 아니라,
신 존재의 인격적 자기노출입니다.


우리는 신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14:9)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짐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묻습니다.

“왜 그렇게 보이지 않게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나를 두려워했을 뿐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의 자유 안에서, 너의 사랑으로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하는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숨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심으로
가장 선명하게, 가장 조용하게,
가장 강력하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는 눈,
그 침묵 속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오늘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Ⅴ. 하나님은 왜 십자가에서 침묵하셨는가?
― 하나님의 가장 큰 목소리는 때로 가장 깊은 침묵이었다 ―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외치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이 절규는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침묵에 대한 절규이며,
그 침묵을 인간의 자리에서 경험하신 분의 탄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자리에
스스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셨고, 버려짐 속으로 들어가셨고,
그 안에서 우리와 함께 무너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의 본질적인 진실입니다.


Ⅵ. 하나님은 ‘거룩하게 숨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사야 45:15)


이것은 회피나 무관심이 아닙니다.
“자신을 숨기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계시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낮에 구름기둥으로, 밤에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불평하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분을 눈앞에서 본 자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뚜렷함은 믿음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강제된 계시는 사랑을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숨으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초대이며,
그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라 참된 관계로의 부르심입니다.


Ⅶ. 신이 뚜렷하지 않기에, 우리는 사랑으로 신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동적인 복종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로 부르십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그분은 말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


왜 하나님은 자신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지 않으시는가?
왜 먼저 보여주시지 않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탐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는 신은 복종의 대상이 되지만,
숨겨진 신은 추구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기를,
우리의 자아가 무너진 곳에서,
십자가 아래에서,
사랑으로 그분을 만지기를.


Ⅷ. 그분은 여전히 가장 뚜렷하게, 가장 은밀하게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몸이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서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그는 폭풍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그는 초월의 하늘이 아니라 고통의 골짜기에서 다가오시며,

그는 전능의 현시보다 피 흘리는 사랑의 손길로 우리를 감싸십니다.


이 땅의 모든 고통받는 자 곁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숨긴 채,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결론: 하나님은 왜 자기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는가?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논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강제로 복종시키는 전능한 군주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피 흘림으로 증명하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높아지기보다 낮아지심으로,
빛나기보다 숨으심으로,
계시되기보다 피조물 안에 거하시기로 선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가장 깊이, 가장 분명하게,
그 사랑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정말 찾고 있는가?”
“나는 그분의 조용한 사랑 앞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려거든, 십자가를 보아라.
내가 가장 보이지 않던 그 자리에,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 가장 분명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