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하실 거라면…
왜 사탄과 악한 영들은 끝까지 그렇게 발버둥치며 저항을 계속하는 걸까요?
패배가 확정된 싸움이라면, 이제 그만 포기할 법도 한데요.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렇게나 끝까지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게 만드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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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집착과 십자가의 최종 승리
우리는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결국 승리하실 것이 분명하다면,
왜 사탄과 악한 영들은 여전히 발버둥치며 싸움을 멈추지 않는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질문은 때로 절박하게 흘러나옵니다.
질병과 전쟁, 불의와 배신, 가정의 붕괴와 내면의 타락…
악의 집요함은 우리의 일상 속에 뼈아픈 흔적을 남기며,
때로는 패배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한 절망감으로 우리를 몰아넣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이토록 끝없는 저항을 부추기는 것인가?
1. 자유의지와 거짓된 ‘대안적 현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현실이다. 나를 따르라.”
그러나 그 사랑은 강요가 아닌 초청이었기에,
인간에게는 진리를 거부하고 다른 현실을 상상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파괴의 가능성도 열어주는 위험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선악과를 금하신 것은 너희를 억누르기 위해서야.
그 열매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이 말은 명백한 거짓이었지만,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선하심보다, 거짓된 자유의 가능성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참된 현실은 의심받고, 사랑은 통제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패턴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됩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말합니다.
“밤늦게 놀지 마라. 위험하다.”
그러나 친구는 속삭입니다.
“그건 네 자유를 빼앗으려는 거야. 진짜 자유는 네 마음대로 사는 거지.”
그 순간, 자녀는 사랑을 억압으로 오해하고, 거짓된 자율성을 좇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신도 바로 이 틀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2.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허상
이러한 거짓된 자유의 상상은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작동했습니다.
그들 또한 스스로에게 속삭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조차 이길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과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대안적 현실을 상상했습니다.
그 상상은 결국 반역으로,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치 조그만 나라가 초강대국에 반기를 들며
“우리가 잘하면 이길 수 있다!”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무모하지만, 자기기만이 만든 거짓 내러티브는
그들에게 싸울 명분을 제공했고, 그릇된 확신을 심었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반역은 하나님의 존재나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교묘하게 비틀고 왜곡하여 자기 마음속에 잘못된 확신으로 굳혀버린 결과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통제’와 ‘억압’으로 오해하며, 그 왜곡된 해석을 스스로 진리처럼 믿어버린 것입니다.
3. 악의 고착화 ― 파괴 그 자체를 즐기는 심연
그러나 이 반역은 단지 잘못된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악은 단순한 착각을 넘어
파괴 그 자체에서 쾌감을 찾는 심연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이익’을 위해 시작된 반역이,
이제는 이득이 없더라도 타인의 선을 무너뜨리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고 기쁨이 되는 단계로 타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해커 집단이 처음엔 금전적 이익을 위해 사이버 공격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득이 없더라도 단지 혼란을 일으키는 데서 짜릿함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미 패배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외칩니다:
“가능한 많은 영혼을 무너뜨리고,
가능한 많은 고통을 확산시키겠다.”
그것이 고착된 악의 본성입니다.
더 이상 회복을 바라지 않으며, 무너뜨리는 행위 자체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 심연.
이것이 악의 가장 어두운 본색입니다.
4. 인간도 같은 딜레마 속에 있다
이 싸움은 단지 하늘에서 타락한 영적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딜레마는, 사실 우리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질문에 맞닥뜨립니다:
“어차피 모두 죽을 텐데, 왜 건강을 지키고 성실히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피할 수 없다면, 지금의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질문 앞에서 허무에 빠져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담담히 말합니다:
“그래도 남은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미래가 불확실하거나 이미 정해진 결말처럼 보일 때,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포기하거나, 혹은 끝까지 의미를 지켜내거나.
이 구조는 사탄의 태도와도 닮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패배가 이미 정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가능한 모든 악을 퍼뜨리려 듭니다.
마치 점수 차가 크게 벌어진 경기에서
패배가 확실한 팀이 남은 시간 동안 계속 반칙을 저지르며
혼란을 키우고, 상대의 기쁨을 망치려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탄은 이기지 못해도, 상처는 남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승리는 빼앗을 수 없어도, 고통은 확산시킬 수 있다고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패배를 인정한 악이,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5. 십자가의 결정적 승리
그러나 바로 그 어둠 한가운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결정적 해답으로 서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계 21:4)
사탄이 퍼뜨린 거짓 내러티브는 이랬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억누르는 존재다.
그분은 너희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분의 사랑은 통제일 뿐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거짓을 찢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억누르는 자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 내 생명을 내어주는 아버지다.”
그분은 권력으로 우리를 제압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움으로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 자기비움의 사랑, 이 자기희생의 은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이 사랑이 결코 패배하지 않았음을 선포합니다.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 삼켜버렸다!” (고전 15:55 참조)
지금도 성령께서는
그 부활의 능력을 우리 안에 적용하시며,
악의 집착 속에서도 복음의 생명이 꺼지지 않게 하십니다.
결론: 끝까지 싸우는 악, 그러나 끝내 이기는 사랑
정리하자면,
사탄과 악한 영들이 끝까지 싸움을 지속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거짓된 내러티브에 속아 아직 승산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이 고착되어, 파괴 그 자체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셋째, 패배를 인정하더라도, 최대한 고통을 확산시키면서, 십자가에서 확정된 하나님의 승리와
자신들의 패배가 만방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끝까지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오늘도 이렇게 선언합니다:
“악은 집착해도, 사랑은 승리한다.
파괴는 확산돼도, 부활은 더 크다.
사탄이 끝까지 발버둥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반드시 완성된다.”
우리는 지금 이 긴 싸움의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혼란이 있으며, 때때로 하나님조차 침묵하시는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결말은 이미 십자가에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절망 대신 복음을 붙듭니다.
패배가 아닌 그리스도의 승리,
파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
혼란이 아닌 성령의 임재를 붙듭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내 승리하시는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