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7장의 십자가적 재독해

by 벚꽃향기 posted Oct 13,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출애굽기 17:8-16 
[8] 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서,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공격하였다.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소.” 
[10]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에게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11] 모세가 그의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더욱 우세하고, 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더욱 우세하였다.
[12] 모세가 피곤하여 팔을 들고 있을 수 없게 되니,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 와서 모세를 앉게 하고, 그들이 각각 그 양쪽에 서서 그의 팔을 붙들어 올렸다. 해가 질 때까지 그가 팔을 내리지 않았다.
[13] 이렇게 해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14] 그 때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오늘의 승리를 책에 기록하여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하고, 여호수아에게는, ‘내가 아말렉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서 아무도 아말렉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나의 결심을 일러주어라.” 
[15] 모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고,
[16]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 하고 외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전쟁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읽다 
― 출애굽기 17장의 십자가적 재독해


1. 문제의 본문 ― 하나님의 손이 전쟁을 도우시는가?

출애굽기 17장 8–16절, 아말렉과의 전투는 많은 신자들에게 깊은 신학적 갈등을 안깁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때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패배하며, 결국 칼로 아말렉을 무찌른 이 사건은 매우 이상하게 들립니다.
더구나 본문은 하나님이 이 전투를 도우신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신 그 예수님의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이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내면의 질문입니다.
특히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한 민족의 편에 서서 다른 민족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신 것처럼 보일 때, 그 충돌은 더욱 날카로워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통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셨다.”
(요 1:18, 히 1:3, 요 14:9)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쟁조차,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얼굴을 통해 다시 읽어야 합니다.
폭력의 역사 속에서도 사랑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칼을 든 전투는 하나님의 이상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7장의 아말렉 전투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뢰를 상실한 인간의 선택이 불러온 비극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리라.”
(출 14:14)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전쟁이나 칼이 아니라, 전적인 신뢰와 비폭력적 의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려움과 불신 속에서 칼을 들었습니다.
신뢰를 잃은 자리에 폭력이 스며들었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 안으로 사랑으로 자기를 낮추어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왜곡된 선택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까지 자기를 낮추어 함께하시며, 그 안에서조차 선을 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넓습니다.

칼을 든 전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으시는 방식의 개입이었습니다.
이 개입은 정죄가 아니라, 다시 신뢰로 부르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3. 모세의 손 ― 칼이 아니라 중보기도를 들라

그렇다면 왜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내려갈 때 패배하는 이 독특한 장면이 주어졌을까요?
단순한 신화적 장면으로 치부하기엔, 이 이야기 속엔 강력한 상징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상징은 바로 중보기도,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몸짓입니다.

이스라엘이 칼을 들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정한 승리는 무기에 있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모세의 손에 승패의 키를 쥐게 하십니다.
승리는 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믿음의 손, 즉 기도에 달려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이 상징은 본문의 결론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호와 닛시” — “주님은 나의 깃발이시다.”


전쟁터의 깃발이 칼이나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손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칼을 정당화하시는 것이 아니라,
칼 너머의 길, 즉 기도와 신뢰의 길로 이끄시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폭력을 “허용”하시되, “동의”하지 않으신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칼을 드는 이스라엘을 돕는다면, 그분은 폭력을 인정하신 것인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폭력을 “명령하신 분”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강퍅함 속에 참아내며 그 안에서 최선을 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된 세상의 질서를 강제적으로 꺾기보다는,
그 질서 안에서 사랑과 정의의 방향으로 미세하게 밀어가십니다.
마치 의사가 흡연자에게 담배를 당장 뺏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최악의 결과를 막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폭력의 현실 안에서조차 선을 이루시려는 비폭력적 사랑의 전략을 취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시되,
인간이 그것을 고집할 때 그 안에서조차 신뢰와 회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너희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1)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악을 품어내시고, 그 안에서 
선을 이끌어내십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시되, 인간이 그것을 고집할 때 그 안으로 몸소 들어오셔서 
사랑으로 악을 흡수하십니다. 그분은 악을 무력화시키되, 칼이 아닌 사랑으로, 정복이 아닌 자기희생으로 승리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폭력과 미움을 온전히 받아내시며, 그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전쟁을 도우신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앞선 단락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은 전쟁을 명령하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뢰를 상실한 인간의 현실 속으로 자신을 낮추어 들어오시고,
그 안에서 인내하며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7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과 충돌되는 듯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해지는 이 묘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전투를 도우시는 것처럼 보이는 인상을 독자에게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묻게 됩니다.

“이러한 서술은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하나님의 모습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궁금증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직면하는 본질적인 믿음의 질문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직접 칼을 드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승패는 칼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손, 곧 기도와 신뢰의 몸짓에 달려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칼을 들었을지라도, 진정한 승리는 나를 의지할 때 주어진다.”


이 장면은 심판을 위한 개입이 아니라, 신뢰를 회복시키기 위한 사랑의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폭력의 길을 걷는 백성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선택 안으로 자신을 낮추어 들어오셔서,
그 안에서조차 다시 믿음의 길로 부르시는 은총의 손짓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6. 아말렉의 패배는 복음의 심판을 예고한다

이제 시선을 넓혀 보겠습니다.
아말렉의 패배는 단지 한 전투의 승패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주제, 곧 ‘하나님의 공의와 악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말렉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공격한 세력의 상징으로 자리합니다.

그리고 이 ‘대적자’의 심판은, 구약의 피 묻은 전투가 아니라, 신약의 십자가에서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아말렉은 신약에 이르러, 죄, 죽음, 사탄의 세력으로 심화되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악을 칼로 멸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몸에 죄와 폭력을 받아내심으로써 이기십니다.
이 위대한 역전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너희를 고소하는 자, 밤낮 고발하는 자를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이겼느니라.”
(계시록 12:11)


여기서 승리는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자기희생적 사랑과 진리의 증언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의 전투는 복음의 그림자였고, 십자가는 그 그림자의 실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출애굽기의 칼날 너머로 못 박힌 손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칼로 없애신 것이 아니라,
원수의 죄를 자기 몸에 안고 죽으심으로써, 그를 친구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승리입니다.


7. 모세가 든 손 vs 예수의 뚫린 손

이제 출애굽기의 모세와 골고다의 예수를 나란히 세워볼 때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었을 때, 백성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한계가 있는, 임시적이고 조건부 승리였습니다.
반면 예수께서 산 위 십자가에서 손을 들고 못 박히셨을 때,
모든 인류를 위한 영원한 승리가 선언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 기도는 더 이상 칼로 적을 물리치는 중보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의 중보이며,
적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모세는 손을 들었고, 하나님은 백성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예수는 손을 들었고, 하나님은 세상에 구원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손이 신뢰를 상징했다면, 예수의 손은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현했습니다.
모세의 손 아래선 적이 무너졌지만, 예수의 손 아래선 원수가 품에 안겼습니다.

이 비교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전환을 상징합니다.
칼에서 십자가로, 정복에서 사랑으로, 승리에서 구원으로.


8. 부활, 심판, 그리고 비폭력의 새 창조

십자가의 손이 뚫린 그 자리에서 역설적 승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승리를 새로운 창조의 문으로 확장시킵니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전쟁이나 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제 교회를 통해, 성령을 통해, 사랑과 회개와 섬김을 통해 세상을 다시 빚어 가십니다.

출애굽기의 피 묻은 전투조차, 복음의 빛 아래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신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시고, 그 폭력 안으로 몸소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되, 자기희생을 통해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보다 더 위대한, 십자가의 중보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의 빛 아래 드러나며,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나타납니다.
그 나라는 더 이상 강한 자가 살아남는 질서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9. 결론 ― 오늘 우리에게 “손을 들라” 하신다

이제 이 모든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과 교회를 향한 부르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들지 말고, 손을 들라.”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기도로 중보하라.”
“이기려 하지 말고, 사랑하라.”


우리는 더 이상 출애굽기의 전투를 전쟁의 전략서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복음의 지향점, 즉 십자가로 향하는 사랑의 길로 읽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중보와 감사와 기도를 하라.”
(딤전 2:1)


이제 우리는 중보자의 자리에 서서,
세상의 죄와 고통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껴안고,
모세처럼 손을 들되, 예수처럼 사랑으로 손을 내어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칼로 이루는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로 드러난 사랑의 패배를 통해 이루어진 부활의 승리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출애굽기 17장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눈물을 봅니다.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안타까워하며,
결국 그 칼을 자기 몸에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손 아래,
오늘도 두 손을 들어 기도합니다.

“주여,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싸우게 하소서.
칼이 아닌 중보의 손으로,
십자가의 방식으로,
복음의 승리를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