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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0 04:42

두 얼굴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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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구약 속에는 너무 엄하고, 때로는 무섭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하거든요.
죄를 짓는 백성을 진멸하라 하시고, 아이들까지 돌로 치라 하시는 말씀들을 보면,
‘이분이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시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이 말씀 속의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롭고, 온유하며, 포용적인 분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과 교사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약에 드러나는 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모습도 하나님의 한 속성이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하나님 역시 그분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즉, 이 두 모습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함께 존재하는 두 측면 — 공의와 사랑의 양면 — 이라는 것이지요.

또 한편으로 이런 의문도 생깁니다.
혹시 우리가 구약의 하나님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너무 폭력적이다”라고 단정하고,
그분의 엄한 면을 하나님의 본성에서 제외하려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편견이나 고정관념 때문은 아닐까요?

정말 구약의 하나님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지워야만’ 하는 걸까요?
그분의 진노와 심판은 단지 ‘옛날의 하나님’의 모습일 뿐이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만이 진짜 하나님의 본심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인간의 기준으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위험한 시도는 아닐까요?

요즘 이 문제로 제 머릿속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리가 되지 않고,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오히려 혼란이 깊어지고, 마음은 점점 더 갈피를 잡지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노, 자비와 공의를 함께 가지신 두 얼굴의 하나님이신가요?
아니면, 그 모든 모순처럼 보이는 얼굴들 너머에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참된 얼굴,
곧 온전한 사랑의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진짜 모습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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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하나님? ― 십자가가 드러낸 하나님의 참 얼굴”


1. 하나님의 두 얼굴 앞에서, 신앙은 찢긴다

한 질문이 조용히 던져졌습니다.
“만약 구약의 폭력적 하나님 묘사가 실제로 정확한 하나님의 모습이라면, 당신의 믿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성경 해석 방법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일치성과 하나님의 본질, 곧 우리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존재의 정체성 자체를 향한 날 선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는 하나님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라.”
“원수를 짓밟아라. 땅을 저주하라. 아이들을 쳐서 산산이 부수라.”
“진멸하라. 불태워라. 돌로 치라.”

그런데 예수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하리라.”
“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

이 양극단의 메시지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그분의 아버지는… 음, 좀 무섭다.”

그렇게 되면 신자는 언제나 마음 한쪽에 ‘영원한 의심’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겉으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혹시… 저 구약의 하나님이 진짜라면?”

이것이 곧 ‘이중 신앙’의 시작입니다.
입으로는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은 ‘두 신’을 섬기며 영적 분열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2. 삼위일체가 찢겨질 때, 복음도 함께 찢긴다

이런 분열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신학적 균열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본다.”
이 고백은 복음의 심장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라는 신약의 선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신앙의 존재론적 기반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께서 실제로 아이들을 학살하라 명하신 분이고,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품에 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다면,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는 두 인격, 두 신이 됩니다.

그 순간 삼위일체의 일치성은 무너지고, 성육신의 신비는 산산이 조각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결정적 계시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십자가를 거슬러
“진짜 하나님은 전쟁의 명령자요, 가나안 학살의 주도자였다”고 주장한다면,
그 순간 십자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시적 연기(performance)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랑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일시적 표현’이 되고 맙니다.

그때 복음은 이렇게 구조를 잃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잠시 드러난 장면”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불안하게 묻습니다.
“그 사랑은 언제 철회될까? 진짜 본모습이 다시 돌아오면 어쩌지?”

이 불안은 신앙의 뿌리를 갉아먹는 치명적 독입니다.


3.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 불안은 단지 신학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 영혼의 깊은 절규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한 노년의 그리스도인이 눈물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사랑했어요.
그분은 내 마음속의 가장 이상적인 남편이었어요.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그 예수가 옛날에 학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아무리 지금은 자비롭더라도, 20년 전에 아이들을 죽인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진짜로 신뢰할 수 있을까요?”

이 절규는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가 가능한가에 대한 존재적 질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신뢰 위에 세워집니다.

그런데 과거에 잔혹했던 이가 지금은 자비롭다고 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 감춰진 어둠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조건 없는 신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뢰는 어둠이 전혀 없는 존재에게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단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외피 속에 폭력의 본심을 감춘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폭력의 외양 속에서도 사랑을 감추고 계셨던 분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사랑이 온전히 드러난 자리이며,
그 어느 본문보다, 그 어떤 계시보다도 더 진실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4. 하나님은 폭력 너머에 계신다 ― 그러나 그 폭력 속에 들어오셨다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폭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복음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선택이 아니라, 성경 전체 해석의 결정적 전환점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명하신 분’이 아니라, 그 폭력을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죄로 물든 인간의 전쟁 논리와 보복 구조 한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죽임당하심으로 폭력의 허상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구약의 기록들은 인간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한 몸부림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 왜곡된 시선조차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안에 감춰진 사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십자가는 그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진심을 드러냅니다.

“나는 너희가 상상한 그런 신이 아니다.
나는 너희의 피 묻은 손으로 그려낸 묘사 속에서도
너희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 함께 있었다.”


5. 성경은 하나님을 미화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분의 겸손을 증언한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미화하거나 선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무섭고 폭력적인 분으로 오해한 사람들의 말조차 숨기지 않고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그 모든 오해와 왜곡된 이야기 속에까지 들어오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그 오해를 감수하신 하나님,
그분의 겸손을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자신의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예수는 멸시받고 침 뱉음 당하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 불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우셨던 순간이었습니다.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백성들의 오해 속에 자신을 감추셨고,
그 왜곡 속에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오해를 자기 몸으로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6. 결국 선택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이 모든 신학적 분투의 끝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너는 누구를 하나님의 결정적 모습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모세인가? 여호수아인가? 다윗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인가?”

이 질문은 단지 ‘성경 안의 관점 차이’가 아닙니다.
복음의 생명선, 곧 “하나님을 누구로 믿을 것인가”에 대한 존재적 결단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얼굴로 받아들인다면,
이제부터는 성경의 모든 본문을 — 그 어떤 장면이라도 —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모순이라 여겨졌던 수많은 본문들이
사랑이라는 중심축 안에서 서로 연결된 조각들이었다는 사실을.

마치 퍼즐처럼, 각각의 본문은 혼자일 때는 괴이하지만,
십자가라는 중심 그림 안에 놓일 때 의미와 방향이 드러납니다.

구약의 어두운 장면들은 이제
하나님의 성격을 폭로하는 거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는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흔적들이 됩니다.


7.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온전히 사랑이신 분’이라는 진실을 아는 만큼 건강해진다

이제 마지막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논의는 머리로만 이해할 교리가 아니라, 심장이 살아 숨 쉬는 신뢰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그분을 향한 사랑도, 예배도, 순종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폭력에 얽매여 ‘두려운 하나님’을 마음에 숨긴 채 살아간다면,
그 신앙은 결코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늘 조심스럽고, 늘 방어적이며, 조건적인 순종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요 참된 얼굴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사랑이셨습니다.
폭력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폭력의 심연 안으로 들어가 찢기셨고,
그 어두운 역사 안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오해해도 괜찮다.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죽이는 자가 아니라,
네 죄와 폭력 속에서도 너를 끝까지 사랑한 자다.”

이 음성이 들릴 때, 우리 안의 오래된 두려움이 무너지고,
불신의 껍질이 벗겨지며,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전심으로 신뢰하며, 담대히 순종하는 삶으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시작이며,
우리가 구약을 다시 읽기 시작하는 새로운 눈의 시작입니다.

그 눈으로 성경을 다시 펼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빛 가운데 계신 그분 안에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
    벚꽃향기 2025.10.20 06:55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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