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는가?

by 벚꽃향기 posted Nov 0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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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한 지인을 잃었습니다. 여러 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지만, 그분은 그때마다 “괜찮다, 됐다”며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아무 준비 없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교회를 한 번도 가지 않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특별히 타락하거나 악한 삶을 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가족을 아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너무나도 진중하고 조심스러운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분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분의 영혼, 구원, 영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이 문제는 그분만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 평생 성경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 예배당에 앉아본 적 없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이런 경우,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닿는 마지막 지점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성경과 복음이 말하는 “더 깊은 대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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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예수, 마가복음 12:27

우리는 흔히 이런 전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곧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그 순간 선택은 끝나고, 기회는 닫히며, 하나님의 사랑도 그 시점에서 멈춘다.” 그러나 이 전제는 복음의 본질과 성경 전체의 흐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과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이, 단 한 번의 짧은 인생 속에서 주어진 제한된 기회 이후로 자녀들에게 영원히 등을 돌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그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조건들—태어난 나라, 자라난 문화, 복음을 들을 수 있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면, 그런 사랑은 공의로운 사랑도, 자유를 존중하는 사랑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전능한 사랑의 하나님은, 우연과 운명의 냉혹한 도박꾼처럼 보이는 위험한 신 개념이 되고 맙니다.


불공평한 세상, 불공평한 운명?

많은 신자들이 “나는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 선택은 정말 아무런 상처도, 환경도, 두려움도 작용하지 않은 순전한 자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복음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땅에서 자랐고, 누군가는 왜곡된 종교 속에서 학대받았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신”이라는 단어조차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자발적인 비기회자들’에게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 거두어진다면—그것은 더 이상 자유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전에 결정된 예정론적 구조가 됩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환경, 그 복음이 전해진 방식과 그 진실성,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정서적 준비까지 모두가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때의 믿음과 불신앙은 ‘선택’이라기보다 이미 정해진 결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자유의 결단이 아니라 구조가 만든 필연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자의 죄를 감당하신 분, 누구도 잊지 않고 끝까지 찾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벧전 4:6)고 말합니다.


정화의 불: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스럽게 일한다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히 12:29)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불로 드러날 것”이며, “금, 은, 보석은 남고, 나무와 풀, 지푸라기는 사라질 것이다.” (고전 3:12–15)

이 불은 단순한 심판의 형벌이 아니라 사랑의 불, 정화의 불이며, 하나님의 본질적 열정입니다. 그 사랑 앞에 설 때 우리는 숨길 수 없습니다. 거짓된 자아, 교만, 자기중심성—모두 이 사랑의 불에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 치유이며, 정죄가 아니라 거룩함을 위한 정화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파괴하기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를 살리기 위해 태웁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지금이라”(요 5:25)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길에서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있을 동안에 서둘러 그와 화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감옥에 던져지고, 마지막 한 푼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나오지 못하리라.” (마 5:25–26)

이는 단순한 윤리적 조언이 아니라, 삶에서 지금 이 선택이 장차 다가올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영적 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는 “지금 아니면 끝”이라는 협박이 아니라, 지금이야말로 가장 부드럽고 은혜로운 기회의 시간이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는 “회개하라”고 외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밤새도록 등불을 켜고 동전을 찾는 여인, 먼 길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기회의 문을 서둘러 닫는 분이 아니라, 그 문 앞에서 끝까지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이름을 몰랐던 이들 안에서도 성령이 일하고 계셨다면?

우리는 종종 “예수의 이름을 알았는가, 몰랐는가”로 구원의 자격을 나눕니다. 하지만 성령은 교회의 울타리에 갇힌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께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요 3:8)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신학적 정답보다 진실한 중심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몰랐지만, 예수의 정신—원수 사랑, 용서, 비폭력, 겸손—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은 이미 그 불꽃을 따르고 있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아...바로 당신이셨군요…”

예수는 특정 종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상의 생명이며, 온 인류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마음을 기울인 모든 이들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 사랑은 교회의 경계나 인간의 인식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인간의 울타리를 넘어 일하시는 그 사랑이, 죽음의 경계 앞에서는 완전히 멈추어 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사랑의 본성상, 죽음조차 그분의 손길을 막지 못할 것이라 믿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은 사랑이 닿지 못하는 벽이 아니라, 사랑이 새로운 방식으로 스며드는 문턱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습니다. (롬 14:9) 그분의 통치는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그 사랑은 단지 품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정화하고 새롭게 하는 불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눈감는 연민이 아니라, 죄를 태워 없애는 거룩한 열정입니다.


정죄가 아닌 정화 — 이것이 하나님의 불이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성경의 불은 정죄의 불이 아니라 정화의 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배제하려는 형벌이 아니라, 치유하려는 정화입니다. 그리고 그 정화는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벧전 3:19)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은 결코 강요될 수 없고, 하나님은 진정한 사랑의 응답이 나오기까지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그 자유를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존중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

여기서 이런 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결국 죽음 이후에도 사랑이 계속된다면, 지금 굳이 믿을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복음을 ‘천국행 티켓’으로 오해한 결과입니다. 복음은 “어디에 갈 것인가”를 결정짓는 단순한 입장권이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생명과 예수의 성품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지금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면, 영원의 나라에서도 사랑은 낯설 것입니다. 지금 자기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불은 더 깊이 태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금 화해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단지 내세를 대비하라는 협박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은혜롭고 자비로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겠지만, 그때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진실 앞에 벌거벗은 채 서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사랑은 여전히 초청하지만, 그 불은 더욱 깊이 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도 정죄가 아닌 정화이기에, 그 안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결론: 사랑은 죽음도 넘는다. 그러나 지금도 부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을 넘습니다. 그 사랑은 지옥문 앞에서도 울며 서 계시고, 거절당하면서도 다시 초청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늘도 나를 부릅니다. 자유롭게, 진심으로, 사랑으로 “예”라고 응답하길 바라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사랑은 지금 시작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도, 생명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