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십자가

by 벚꽃향기 posted Nov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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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5:1–11

1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땅 한 조각을 팔았다.
2 그러나 그는 아내도 알고 있는 가운데, 판 값의 일부를 숨기고 그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다 바쳤다.

3 베드로가 말했다.
“아나니아여,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들어,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
4 그 땅이 네게 있을 때는 네 것이 아니었느냐? 팔린 뒤에도 그 값이 네 마음대로 할 것이 아니었느냐?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5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자마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큰 두려움이 밀려왔다.

6 젊은이들이 일어나 그의 시신을 싸서 들고 나가 장사하였다.

7 약 세 시간 뒤, 아내 삽비라가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한 채 들어왔다.
8 베드로가 그녀에게 물었다.
“너희가 그 땅을 이 값에 판 것이 맞느냐?”
그녀가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9 베드로가 말했다.
“너희가 서로 의논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였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 이르렀다.
그들이 너도 데려가리라.”

10 그러자 삽비라는 즉시 그의 발 앞에 쓰러져 숨졌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녀가 죽은 것을 보고, 시신을 들고 나가 남편 곁에 장사하였다.

11 이 일로 인해 온 교회와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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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십자가


그날, 공동체 안에서 두 사람이 쓰러졌습니다. 거짓의 대가였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이었을까요? 아니면, 복음의 빛 아래 다시 읽혀야 할 어두운 그림자였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초대 교회 전체를 두려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단지 거짓에 대한 정죄나 형벌의 경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초대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자리 잡아 가던 사도적 권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권위가 어떤 위험과 긴장을 동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쉽게 어긋나고 오해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거울과 같은 본문입니다.


권위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사용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권위를 위임하신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서 나오는 능력을 부여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권위는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오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내포합니다. 권위는 본래 선한 목적을 위한 선물이지만, 그 사용 방식은 사람의 감정, 판단, 동기에 따라 왜곡되거나 타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물을 내는 기적을 두 번 일으켰지만, 그 중 한 번은 분노에 휩싸여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기적은 일어났지만, 그 권위의 사용은 옳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엘리사의 생애에서도 발견됩니다.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야 올라가라”고 조롱했을 때, 엘리사는 그들을 저주했고, 결과적으로 곰 두 마리가 나타나 마흔두 명의 아이를 찢었습니다(왕하 2:23–25). 본문은 이 사건을 기적처럼 기술하지만, 하나님이 곰을 직접 보내셨다는 명시는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의 감정에 기반한 저주를 발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에게 주어진 권능조차도 그 감정과 연결될 때,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그런 본문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단정짓는다면, 우리는 자칫 하나님을 억울하게 죽임당한 아이들의 살인자로 만드는 위험한 신학적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처럼 권위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사용 방식은 인간에게 위임되었고, 따라서 오용의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완전하지 않았다

이 점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였던 베드로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는 격정적이고 거친 성정을 지닌 어부 출신이었으며,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위선적인 태도로 인해 바울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사도적 권위는 결코 무오함의 보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성령 안에서 쓰임받은 한 인간이었고, 그의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인간적 연약함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권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은혜 아래에서 교정되고 바로잡혀야 하는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말은, 본문에 없다

사도행전 5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쓰러져 죽었다”고만 기록할 뿐,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셨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인간의 감정적 판단이나 사건의 결과를 곧장 ‘신적 의도’로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자칫 인간의 분노나 두려움을 신격화하여, 복음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본심—십자가 위에서 원수조차 품으신 사랑의 하나님—을 왜곡하고 훼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는다면, 십자가 위에서 원수조차 용서하셨던 예수님의 얼굴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복음은 폭력의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방식으로 진리를 선포합니다. 복음은 살리는 길이지, 죽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사탄은 죽이고, 예수는 살리신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행 5:3).
그렇다면, 이 죽음의 배후는 누구였을까요?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도둑은 죽이고 멸망시키려 오지만, 나는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 한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덧붙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는 마귀”(히 2:14)라고.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죽이는 일을 하는 존재는 사탄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고, 반복해서 회개의 기회를 열어두시며, 이미 베푸신 용서가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일어난 죽음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형벌로 보기보다는, 거짓과 두려움 속에서 열린 틈을 통해 사탄이 파괴의 권한을 행사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에 더욱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분노로 심판하신 분이 아니라, 그들의 비틀어진 선택조차 억지로 꺾지 않으셨고, 그 선택이 초래한 비극을 누구보다 마음 깊이 아파하신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원수조차 품으시고,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그분이, 두려움 속에서 무너진 두 사람을 냉정하게 처벌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초대교회, 두려움, 그리고 위기의 시작

사건 이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했다.” 복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 공동체가 느낀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새롭게 등장한 권위의 실체와, 그 권위가 인간의 감정과 신적 권능이 뒤섞여 행사될 때 얼마나 쉽게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권위를 주셨지만,
그 권위가 성령과 함께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아니라,
복음의 빛을 가리고 사람을 정죄로 몰아넣는 위험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방식은 다르다

복음을 따르는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권위의 오용을 꿈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게 하리이까?” 이는 구약 선지자의 방식을 본받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슨 영에 속한 자인지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는 불이 아닌 생명을 선택하셨고, 복수가 아닌 회복, 권세가 아닌 용서를 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를 계시합니다. 겉으로는 무력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권능이었습니다. 예수는 칼을 들지 않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특히, 불러낼 수 있었던 천사들의 군대조차 부르지 않음으로써 참된 순종과 참된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은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살리는 사랑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복음의 본질을 재확인시키는 거울입니다. 복음은 진실을 요구하지만, 그 진실을 말하는 방식은 반드시 십자가를 닮아야 합니다. 복음은 거짓을 책망하지만, 그 책망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을, 복수보다 회복을, 형벌보다 십자가를, 공포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이후의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권위의 본질이며,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결론: 그날 쓰러진 자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

그날, 두 사람은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권위는 겸손해야 하며, 책망은 복음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살리는 자가 되라.”

진정한 권위는 사람을 일으키는 능력이며, 진짜 복음은 가장 약한 자를 품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들이 죽은 날, 복음은 살아 있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 안의 복음은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