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여는 유일한 길

by 벚꽃향기 posted Dec 04,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9–40)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책을 넘어 십자가로: 성경을 여는 유일한 길”


1. 신앙의 토대: 책이 아닌 인격, ‘그리스도’가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 이 책 위에 인생을 걸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불충분한 말입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결코 이렇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의 최종 토대다.”
성경은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그분을 보라.”
곧, 예수 그리스도,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신약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곧 이미 닦아 둔 것,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교회의 기초는 책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잇돌”(벧전 2:6)이 되신 분,
죄인들의 손에 버려졌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정확히 믿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신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요약됩니다.

기독교는 본질상 “책의 종교”가 아니라,
한 분 인격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응답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다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왜 나는 성경을 믿는가: 성경에서 예수로가 아니라, 예수에서 성경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으니, 그 위에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신약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 보면,
이 방향은 정반대로 놓여야 합니다.

초대 제자들은 먼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역사 속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목격했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체험했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구약 성경을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그분을 증언하고 있었구나”
라는 눈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역사적 탐구,

철학적 사유,

내 인생 속에서 경험한 회심과 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설득력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계시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께서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셨고,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인도하셔서
구약과 신약의 문서들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으로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책 자체의 완벽성 때문에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권위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게 바뀝니다.

“성경이 신뢰할 만하니 예수를 믿는다”가 아니라,
“예수가 신뢰할 만하시니 성경을 믿는다.”


이 방향이 뒤집히는 순간,
우리는 성경을 그리스도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숭배의 위험 속으로 들어갑니다.


3.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의 함정: 이름만 그리스도 중심인 신학

지난 백여 년 동안 현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표어 아래 나름의 혁신을 시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 자체는 그 단어만으로는 그 뜻이 자동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누구든 “이것도 사랑이다”라고 주장해 버리면,
폭력까지도 “사랑의 한 방식”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자비로운 엄격함’이 필요하다.
따라서 고문이나 죽음도 때로는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사랑”이란 말이 아무 것이나 포괄할 수 있게 될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실질적 내용이 비어 버린 표어가 됩니다.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론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예수의 단편만 붙잡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장면,

제자들에게 칼을 사라고 말씀하신 구절 등을 끌어와서,


“보라, 예수님도 폭력 사용을 완전히 반대하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구약의 집단 학살 명령도 그분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두 가지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1. 본문 자체의 맥락을 왜곡합니다.

성전 정화는 즉흥적 분노 폭발이 아니라,
자신을 체포하게 만들기 위한 예언적 상징행위였습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는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지 않았고,
채찍은 동물을 내쫓기 위해 땅을 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칼을 사라는 명령 역시 “자기방어를 하라”는 취지가 아니라,
“그가 범죄자들과 함께 헤아림을 받으려 함이라”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제자가 실제로 칼을 휘둘렀을 때,
예수는 즉시 그것을 꾸짖고 상처를 치유하셨습니다.


2. 더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사용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기준을 완전히 무력화합니다.

만약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이,

학살을 명령하고,

태아를 찢어 죽이고,

부모와 자식을 함께 내리치라는 신적 초상까지
그대로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 기준은 사실상 어떤 초상도 걸러내지 못하는,
내용 없는 구호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단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으로.


4. 십자가: 사랑과 계시의 유일한 정의

신약은 “사랑”을 정의할 때, 감정이나 추상 개념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음이라”(요일 3:16).


사랑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아직 우리가 원수였을 때,
그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건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의 실질적 내용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도
예수의 생애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생애 전체의 정점을 이루는 십자가에 의해 규정됩니다.

하늘의 영광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내려오고,

끝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신 그 길(빌 2장)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를 정의합니다.


십자가는 단지 구원의 한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 사랑이 무엇인지,
권능이 무엇인지, 영광이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해석해 주는 ‘해석의 중심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는다는 말은,
정확히 말해 “십자가 중심, 부활 중심”으로 읽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요,

부활은 그 사랑이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음을 선언하며,

성령은 그 십자가-부활의 사랑을 오늘 우리의 심장 속으로
실감나게 부어 주십니다.


이 사랑의 빛 아래에서만,
우리는 성경의 모든 본문,
심지어 가장 어두운 구절들조차도
다시 읽을 수 있게 됩니다.


5. 십자가의 하나님과 성경 영감: 하나님은 원래부터 ‘이런 분’이셨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무섭고 폭력적이셨다가,
신약에서 예수님 안에서 비로소 사랑이 되셨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을 정반대로 뒤집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신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새롭게 변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러셨던 분을 우리 앞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사랑이 되셨다”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바로 이 전제를 우리가 성경 영감 교리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불어넣으신’ 책”입니다.
그렇다면 그 “숨”을 불어넣으신 분은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자신을 비우시는 분,

죄를 직접 짊어지시는 분,

타자의 죄와 수치를 함께 감당함으로써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

강제로 조종하지 않고,
자유로운 인격과 역사 속으로 들어와,
그 한계와 왜곡과 심지어 폭력적 상상력 안에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어 담으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폭력을 그대로 견디고 떠안으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영감 역시,

인간의 죄성,

문화적 한계,

왜곡된 신 이해 속으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감추고 들어가셔서
그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고 나오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십자가의 정신에 합당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왜곡된 상상력과 거친 언어,
심지어 폭력적 신 이미지에까지
자신을 묶어 두심으로써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십자가 중심 성경관”
영감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향입니다.


6. 구약 안에 이미 드러난 십자가의 그림자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죄를 짊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구약 전체를 천천히 돌아보면,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이상(ideal)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백성의 완고함과 문화적 한계에 자신을 맞추시며,

그들의 폭력과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인해
자신의 이름이 욕을 먹는 것까지 감수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조롱받을 때,
하나님도 함께 조롱받으십니다.

사람들은 “이 민족의 신은 무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 이름이 욕을 먹는 것은 너희 때문이다”라고 하시며
그 수치를 함께 떠안으십니다.


또한, 모세나 다른 중보자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이미 이런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예는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망하면 주님의 이름도 욕을 먹습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적 엮임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면 그분의 이름도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타락하면 그분의 영광도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선행적 그림자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이 언약적 엮임을 극한까지 밀어붙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절정에 이르는 자리,

우리가 하나님을 살해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자리,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도망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죄의 결과를 끝까지 함께 짊어지는 하나님이다.”


구약은 이 놀라운 십자가의 계시를 향해
수없이 그림자와 예시를 던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전체의 중심이 무엇인지는
골고다 언덕에서 비로소 완전히 드러납니다.


7. 성경의 자리는 어디인가: 토대가 아니라, 십자가로 인도하는 거룩한 통로

이제 분명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책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 인격은 추상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예수를 우리의 심장에 실제로
주(主)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 예수를 증언하는 하나님의 감동된 증언의 기록이며,

우리가 예수께 다가가고,
그분 안에서 성부와 성령의 교제를 누리도록 인도하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성경과 교리, 신학 체계는
종착역이 아니라, 그분께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자주
이 이정표를 종착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 자체를 신뢰의 최종 대상처럼 붙잡고,

교리의 정교함을 신앙의 본질처럼 숭배하며,

성경이 가리키는 살아 계신 주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뒤로 밀어냅니다.


이때, 우리는 미묘하지만 치명적인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사실을 잊고,
손가락 자체를 하나님처럼 붙들어 버리는 것.”


성경과 교리는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삼위 하나님의 교제 속으로
우리를 다시 이끌어야 합니다.


그 관계가 신앙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그 목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고 도구입니다.


8. 십자가 중심 성경 해석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십자가 중심 성경 해석은
단지 해석학적 기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삶 전체를 겨냥하는 회개와 전환의 부르심입니다.


1. 하나님 이해의 회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권력”으로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적을 죽이는 분”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 죽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2. 영감 이해의 회복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곧 문자 하나하나가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 의지”라는
평면적 등식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하나님이
인간 역사와 언어의 한계 속으로
자신을 낮추어 담으셨다는
성육신적, 십자가적 영감 관점으로
성경을 존중해야 합니다.


3. 제자도(십자가 지는 삶)의 요청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해석의 관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그분처럼

권리를 내려놓고,

손해를 감수하며,

원수를 품고,

타인의 죄와 상처를 함께 짊어지는
사랑의 길을 걷는 초청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십자가의 제자도를
우리 안에 낳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4. 교회의 정체성 재정립

교회는 “성경 지식 공동체”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드러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십자가의 사랑을 닮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의 핵심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여기서 “계명”의 핵심은,
“우리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십자가 중심 성경 해석은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됩니다.


9. 결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성경을 다시 읽다

우리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인가?”


그 열쇠는 어떤 학파의 해석 원리도 아닙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자기비움과 원수를 향한 사랑이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기준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냅니다.

이 사랑이 성경 영감의 방식을 설명합니다.

이 사랑이 구약의 어두운 본문들조차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게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교리와 신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디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이 완전하니, 나는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신실하시니, 나는 안전하다.
그분이 성령으로 교회를 인도해 주시니,
나는 성경을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사랑이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빛이 되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 고백 속에서,
성경은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을 짓누르는 돌덩이가 아니라,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끄는
성령의 숨결 어린 증언,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걸어오시는
살아 있는 통로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성경을 들고,

십자가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의 빛을 간구하며,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책이 아니라,
책이 가리키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 사랑의 빛으로 성경 전체를 다시 읽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 삶 속에서 살아내게 하소서."


이 기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단지 성경 지식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는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십자가 사랑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심장 박동으로
우리 안에서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