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반대가 된 하나님

by 벚꽃향기 posted Dec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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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고린도전서 1:18 (개역개정)


십자가는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어리석은 실패로 보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깊은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난다.

바로 이 역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사랑의 참모습이 가장 또렷하게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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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반대가 된 하나님, 십자가에서 드러난 본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깊이,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을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우주의 창조도,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도, 병자가 치유되는 장면도 아니다. 인류의 죄와 저주와 하나님 버리심을 온몸으로 떠안고, 한 범죄자처럼 조롱당하며, 나무에 매달려 피와 숨을 잃어 가는 그 한 사람,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다. 성경은 이 충격적인 장면을 가리켜 말한다. “이는 사랑이라”(요일 4:10).

이 글에서는 바로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왜 성경 전체를 읽는 가장 깊은 해석의 기준이 ‘십자가 모양의 사랑’이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성경적으로 풀어 가 보려 한다.


1. 인간의 가장 깊은 직관: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설명되지 않는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인생이 정말로 의미가 있으려면, 그 의미는 결국 “사랑”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돈, 성공, 명예, 건강이 아무리 좋아도, “사랑 없이 이것들을 가지고 사는 삶”을 떠올리면 허무가 먼저 떠오른다. 반대로, 고난과 눈물이 많더라도 “내가 정말 사랑했고, 사랑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인생을 실패라고 말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현대인들이 “물질”밖에 인정하지 않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마치 사랑과 도덕과 의미가 진짜 있는 것처럼 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철학적으로는 “우연한 분자들의 움직임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내 자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진실과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건다. 이 모순은 우스운 착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증언이다.
“삶이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사랑이다.”

성경은 바로 이 가장 깊은 인간의 직관이 우연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요일 4:8). 그리고 그 사랑이 역사 속 한 순간, 한 장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났다고 선포한다. 바로 십자가다.


2. 영원 전부터 존재하던 사랑: 삼위 하나님의 ‘내부 이야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홀로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는 “관계적 사랑”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홀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성령은 그 사랑의 호흡처럼 두 위격을 잇는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상호 내어줌, 상호 신뢰, 상호 영광 돌림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비밀을 이렇게 요약하신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말이 단지 ‘호의적인 감정’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던 그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임을 선언하셨다.

요컨대, 창조의 목적은 이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신부”를, “동참자”를 더하는 데 있다(엡 5:25–32).
하나님은 아들을 위해 “신부”를 원하셨고, 그 신부가 바로 우리다.
우리는 그 영원한 사랑의 춤, 삼위 하나님의 내적 교제 속으로 ‘초대’되었다.


3. 이 사랑은 어떻게 역사 안에 드러나는가: 십자가의 역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멍 난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서로를 이용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면서도 결국은 서로를 삼키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은 이 상태를 단순한 도덕적 실수 이상으로, 어둠의 권세, 마귀의 일에 사로잡힌 현실로 묘사한다(요일 3:8).
우리는 단지 ‘잘못된 선택을 한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악의 구조에 협력하는 포로다.

하나님이 이 상황 속으로 내려오신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아들을 죄를 모르는 분임에도 “죄 자체”처럼 취급되게 하신다(고후 5:21).

율법의 저주를 자기 몸에 끌어안게 하신다(갈 3:13).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 범죄자 취급을 받게 하신다(사 53장).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들 손에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힌다(행 2:23).


이 모든 역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자기의 정반대가 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계시하셨다.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 죄가 된 것처럼 취급되시고,
저주를 물리쳐야 할 분이 저주를 몸에 입으시고,
심판하셔야 할 분이 피고석에 서서 형을 받으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절대적인 원리를 만나게 된다.

사랑의 깊이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감수하는 ‘자기희생의 깊이’로 드러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깊이까지 내려가는 희생으로 드러나야 한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다.


4.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하나님 버리심

예수님의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단지 고통의 외침이 아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친밀함이 우리를 위해 ‘찢어지는 것처럼 경험된 순간’이다.

물론, 하나님이 실제로 본질적으로 분열되셨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아들은 인간의 자리, 하나님을 상실한 자리, 절대적 고독과 어둠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세상의 죄로 인해 맞닥뜨려야 할 모든 어둠과 저주와 공허를, 그분이 자기 몸과 전 존재로 겪으신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만약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조금 덜 사랑해도 되는 사랑이라면,
십자가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사랑이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향해 가지신 사랑과 동일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극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 희생하고 말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전부 내어주는 것” 외에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는 절정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우연히 선택된 형벌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본질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한 자리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무한한 강도가,
죄와 하나님 버리심이라는 우리 존재의 무한한 어둠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이 충돌의 지점이 바로 “나무에 달리신 하나님”이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추상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 장면보다 더 깊이, 더 멀리,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하나님의 사랑은 상상할 수 없다.


5. 십자가는 진노를 달래는 제물이 아니라, 사랑을 드러내는 계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해 왔다.

“아버지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아들이 대신 맞아 죽었다.”


이 그림 속에서 아들은 마치 “선한 제3자”처럼 보이고,
아버지는 “도덕적 질서를 위해 분노를 쏟아야만 하는 분”으로 그려진다.
이때 십자가는 주로 ‘분노를 달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요 1:1, 요 20: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


즉,
심판하시는 분과 심판받는 자가 십자가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죄를 미워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시기 위해 자기의 심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억지로 끌려온 제3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이다.
십자가에서 진노가 달래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우리 죄의 무게와 저주와 심판을
그냥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분은 차라리 그것을 자기 자신이 감당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최고의 거룩함이 가장 더러운 자리로 내려가고,
최고의 의로움이 가장 부당한 판결을 받고,
최고의 권능이 가장 무력해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리.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렇게까지 내려오는 것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의 실제 의미다.”


6.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의 실제 의미

이제 우리는 조금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그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을, 나에게도 향하고 계신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기도대로, 우리는 “그가 아들을 사랑하신 그대로”(요 17:23) 사랑받는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을 바라보실 때 가지시는 그 눈빛과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둘째, 이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다.
우리가 먼저 “충분히 변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롬 5:8),
아직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할 때,
십자가에서 이미 선언된 사랑이다.

셋째, 이 사랑은 실제적인 참여를 의미한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놓인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나의 새 생명이 되며,

그분이 아버지께 받으시는 사랑이 나에게도 그대로 흐르는 것을 뜻한다.

넷째, 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완전하다.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거룩하게 살고, 더 많은 사역을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이미 선언된 사랑은
“더 사랑받을 수도, 덜 사랑받을 수도 없는 사랑”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미 하나님이 줄 수 있는 사랑의 100%를 받고 있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전부를 주셨다.
아들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후에
더 줄 것이 없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그 사랑을 더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7. 성경의 가장 깊은 통일성: ‘십자가 모양의 사랑’이라는 해석의 규범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 해석의 문제에 도달한다.

고대 교회 전통에는 이런 원리가 있었다.
“성경의 어떤 해석이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세우지 못한다면
아직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랑의 규범’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흐릿하게 정의되어,
어떤 사람들은 적을 죽이면서도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을 교정한다”고 말했고,
어떤 신학은 사랑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영원한 지옥고를 미리 예정하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모호함을 깨뜨리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장).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중보하셨다(눅 23:3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본받는 것”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자신을 내어주어 사랑의 제물이 된 삶”과 동일시한다(엡 5:1–2).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 “사랑”이란,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놓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십자가 모양의 사랑,
곧 자기희생적이고, 타자지향적이며,
원수와 죄인을 품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사랑이
성경 해석의 최종 규범이 되어야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성경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폭력 이야기들,
“하나님이 저들을 진멸하라 명하셨다”는 표현들은
그 자체가 곧바로 하나님의 최종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당시의 제한된 인식 속에서

하나님을 믿었으나 아직 완전히 사랑을 알지 못한 공동체가

자기들의 전쟁과 승리를 이해하려 애쓰면서

하나님을 그 이야기 속에 끌어들인 흔적일 수 있다.


십자가는 이 모든 텍스트 위에 최종적인 빛을 비춘다.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이 본문을, 원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만약 조화시킬 수 없다면,
그 본문은 ‘부분적이고 깨진 증언’이거나,
사랑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상징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의 깊은 통일성은 한 단어로 요약된다.

십자가 모양의 사랑.


성경은 이 사랑을 준비하고(구약),

이 사랑을 드러내고(복음서),

이 사랑의 의미를 해설하며(서신서),

마침내 이 사랑이 승리하는 세상을 소망하게 한다(계시록).


8. 십자가와 부활: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

세상의 수많은 사랑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큰 이야기의 그림자다.

목숨을 건 연인들의 사랑,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희생,

자녀를 위해 자신을 태우는 부모의 사랑.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에서 설명하기 힘든 울림을 느낀다.
마치 누군가 우리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바로 이것이 인생의 진짜 의미다.
이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다.
너는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사랑 이야기는
결국 죄, 오해, 오락가락하는 감정, 죽음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가장 뜨거운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식고,

가장 고귀한 희생도 오해받고 잊혀지며,

가장 순수한 약속도 죽음 앞에서 중단된다.


그런데 성경은 말한다.
이 모든 찬란하지만 깨지기 쉬운 사랑 이야기들은,
한 이야기를 향해 나아가는 그림자라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자신을 전혀 원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주신 이야기.”


아무도 그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하고,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은 가장 큰 사랑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사랑이 부활 안에서 확인된다.
부활은 단지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심을 보여주는 쇼”가 아니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신 그 사랑이
헛되지 않았음을,
죽음조차 그 사랑을 삼키지 못했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부활은 그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만이 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이보다 더 부당한 대상에게,
이보다 더 큰 희생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


9. 이 사랑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질문은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

“이러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고 계신 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를 감시하는 재판관”으로만 상상해 왔다.

혹은 “내가 잘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가실 분”으로 오해해 왔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그 모든 왜곡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분은 이미 가장 비싼 값을 치르며,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둘째, 우리는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다.
신앙생활은
“정죄당하지 않기 위해 버티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에 조금씩 마음을 여는 여정이다.

셋째, 우리는 이 사랑을 삶으로 증언하는 부르심을 받았다.
십자가의 사랑은 단지 우리가 감탄하고 눈물 흘리고 끝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원수를 저주하는 대신, 축복으로 응답하고,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대신, 그들을 위해 손해보며,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그것을 내려놓는 삶.


이것이 바로
“십자가 모양의 교회”,
“십자가 모양의 신자”가 부르심 받은 자리다.

넷째,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십자가 사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해석이든,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의 십자가와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해석을 의심해야 한다.

어떤 교리든,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교리를 다시 물어야 한다.

다섯째,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이 사랑을 증언하는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설교, 강의, 글쓰기, 상담, 사역은
결국 하나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복음의 중심을 제대로 붙잡지 못한 것이다.


10. 결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요약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로 존재하셨다.

2. 창조의 목적은 이 사랑에 신부를, 동참자를 더하는 것이다.

3. 우리는 죄와 어둠 속에 갇혀 이 사랑을 거부했다.

4.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5.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정반대가 됨으로써,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를 계시하셨다.

6. 부활은 이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하나님의 승인의 선언이다.

7.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연합시키며,
삼위 하나님의 내부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타오르게 하신다.

8. 성경 전체는 이 십자가 모양의 사랑을 준비하고, 증언하고, 적용하는 책이다.

9. 신앙생활의 본질은
이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랑의 모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값싼 위로가 아니다.

그 말은,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사랑으로
당신을 향해 서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 사랑 앞에서 계속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떨리는 마음으로라도
“예, 저는 그 사랑을 받겠습니다”라고
입을 열 것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를 부르신다.

“보라, 내가 네게 내 마음을 다 주었다.
너는 이제 무엇을 나에게 내어주겠느냐?”


이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더 이상 우연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 속 한 장면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 삶은 세상 어떤 이야기보다도 깊고,
무겁고, 아름다운 복음의 향기를 내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