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43–45
“너희는 원수를 미워하라 배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여 너희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임을 드러내라.
아버지는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도 빛을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리신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늘 당신을 무너뜨린 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너는 누구의 자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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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재판하는 눈에서,
어린아이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1. 사랑하기 힘든 얼굴들, 그리고 그 뒤에 숨으신 예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라는 것을.
짜증내는 가족, 까다로운 고객, 늘 자신만 옳다고 말하는 사람, 이유 없이 비난하는 이웃….
이들은 전혀 “예수님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어떤 사람을 대하든, 그 사람은 단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 숨어 계신 주님과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격, 태도, 말투는 때로는 너무나 거칠고, 불편하고, 심지어 역겹기까지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예수께서 나를 그분의 사랑으로 부르시는 자리이다.”
이 관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문제”로 보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말과 표정과 마음은 복음에서 멀어져 갑니다.
2. “예수”라는 이름으로 다시 보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그 거친 겉모습을 뚫고, 그 뒤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매일 이렇게 기도하며 봉사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제 앞에 오는 이들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해주십시오.
불친절하고, 까다롭고, 비합리적인 사람들의 거친 겉모습 뒤에 숨으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제가 그들에게 하는 모든 섬김이 곧 당신께 드리는 섬김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이 기도는 단지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겉모습”에서 “실제 영적 현실”로 돌려놓는 복음적 훈련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대할 때 마음속으로 조용히 “예수님… 예수님…” 하고 이름을 속삭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지금 나는 예수님을 대하고 있다”는 진리를 마음 깊은 곳에 다시 새기는 행위입니다.
눈 앞에는 짜증내는 사람이 보이지만,
영의 눈으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께서,
이 사람의 가장 깊은 상처와 죄와 어둠을 안고 서 계신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감정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보느냐”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바뀌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태도도 바뀌지 않습니다.
3.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단지 “까칠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잔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의적이고, 음흉하고, 차별적이며, 폭력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끝없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 안에서는 본능적으로 혐오와 분노가 치솟습니다.
“저 사람은 인간 이하야. 저 인간은 변할 리 없어. 저런 쓰레기는 없어져야 세상이 깨끗해져.”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이 “악에 눌린 세상”이며(요일 5:19),
사람들의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과 상처 속에서 찢겨 왔음을 알려줍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잔인하거나, 차별적이거나, 변태적이거나, 폭력적인 존재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한때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웃고 울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영적으로 병든 세상입니다. 거짓, 두려움, 폭력, 수치, 버림받음, 학대, 구조적 불의, 악한 영적 세력들이 우리를 끊임없이 찢어놓습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모욕과 무시에 노출되고,
누군가는 사랑 대신 통제와 폭력 속에서 자라며,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돌처럼 굳히는 법을 배웁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비틀어지고 굽어집니다. 물론 이것이 그들의 책임을 완전히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각 사람 안에는 여전히 선택의 몫, 응답의 몫이 있습니다.
다만 그 복잡한 영향을 모두 아시고, 그 사람이 실제로 얼마나 “선택”했고 얼마나 “끌려갔는지”를 정확히 분별하실 수 있는 분은 전능하시며 전지하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롬 12:19-20).
이 말씀은 폭력과 학대를 그저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거리를 두고, 도움을 요청하며, 공동체와 법의 보호를 구하는 ‘경계의 결단’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계의 행위조차, ‘보복’이 아니라 ‘보호’와 ‘죄의 확산을 멈추게 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쥐고 있으려 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곧 최종 판결과 심판의 권한을 스스로 움켜쥐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위험을 막기 위해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사람을 단정하고 응징하려는 마음까지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얼마나 악한가, 얼마나 책임이 큰가”를 저울질하며 속으로 재판관 역할을 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사랑의 자리에서 떠나 심판자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하나님만이 차지하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과거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내면의 상처, 외로움, 공포, 왜곡된 배움의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적 차원에서 어떤 공격과 속임수 속에 그가 살아왔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최종 책임 비율”을 계산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일입니다. 그 시도는 우리를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절대적 판결을 내리려는 불완전한 재판관이 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태도는, 심판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우리는 사랑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4. 어른의 얼굴을 찢고 나오는 ‘작은 아이’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복음적인 상상 중 하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보지 말고,
언젠가 한때 존재했던 “어린 시절의 그 아이”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남을 짓밟고 조롱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릴 적에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 했던 아이였을 것입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 칭찬받고 싶었고,
작은 실수에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아마도 너무 자주 비교당하고,
너무 자주 무시당하고,
너무 자주 “넌 왜 이것밖에 안 되냐”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공격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거짓과 과장을 습관처럼 쓰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강한 척, 모른 척, 못 본 척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괴물같은 어른의 얼굴”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 사람 안에 아직도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보게 해주십시오.
그 아이가 처음 상처 받았던 순간을,
그때부터 굳어져 버린 마음을,
그리고 그 아이를 품고 계신 주님의 애통함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볼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속에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혐오의 감정만 있던 자리에,
연민과 안타까움이 아주 작은 틈을 내기 시작합니다.
복음은 바로 그 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괴물”이 아니라
“상처받은 아이”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조금씩 동참하게 됩니다.
5. 지금 내 앞의 이 사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며 만나는 사람은 수십 명, 수백 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너의 시선 안에 들어온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신 그 한 사람”이며(요 3:16),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바로 그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엡 5:2 참조).
복음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인류 사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지금 이 자리, 이 상황, 이 관계 속에서
“눈앞의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지금 이 사람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기회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이 순간, 이 사람만이 가장 중요하게 보이게 하소서.
제가 해야 할 다른 일들,
떠올려지는 다른 사람들,
마음을 뺏는 온갖 생각들보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한 영혼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지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정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시간 낭비”로 여기지 않고,
이 관계를 “성가신 방해”로 보지 않습니다.
이제 이 만남은, 복음의 현장이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가치가,
우리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작은 행동 하나를 통해
지금 눈 앞의 사람에게 흘러들어가는 자리입니다.
6.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할 때, 복음은 ‘설명’에서 ‘현실’이 된다
우리는 복음을 설교로 들을 수 있습니다.
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복음의 요구 앞에서
실제로 순종하기 시작할 때,
복음은 더 이상 “사상”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감정이 편안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반역과 배신이 그분의 심장을 찢었음에도,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비슷한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재현’하게 됩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람을 위해 피 흘리셨습니다.
제 안에 없는 사랑을,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십시오.
제 마음의 분노와 혐오를,
주님의 눈물과 자비로 바꿔주십시오.”
이 기도를 드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 사랑은 내 안에 원래 있던 자원이 아니라,
– 십자가에서 흘러나와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 몸부림 칠 때,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동시에 치유하고 계십니다.
정죄와 분노와 증오에 잠식되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엡 5:1)가 되어 갑니다.
7. 결론: 오늘 당신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
마지막으로,
지금 당신 마음에 떠오르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 이름만 들어도 속이 뒤틀리는 사람
– 만나면 반드시 기분이 상하는 사람
–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복음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바로 그 사람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사람의 과거를 모릅니다.
그 사람의 상처의 깊이도 모릅니다.
그 사람의 죄에 어느 정도까지 책임이 있는지,
어디까지가 피해이고 어디부터가 가해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그 사람 또한 예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신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심할 수 있습니다.
–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 나는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 혐오를 붙들고 살기보다,
– 십자가의 사랑으로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망친다”가 아니라,
– “저 사람을 사랑할 때, 내 안의 복음이 더 깊어지고 있다”고 믿겠다고.
오늘 당신이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그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신
“복음의 훈련장”입니다.
그 사람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이,
당신의 영혼을 예수님의 십자가 쪽으로 한 걸음 더 옮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의 모든 순간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그들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셨고,
내가 그들을 향해 내뻗은 작은 사랑의 손길 속에서
주님 자신이 나를 품고 계셨다는 사실을.”
그날, 우리는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기 힘든 이들을 통해
제게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얼굴들 뒤에 숨으신 당신을
조금이나마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