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4–35)
예수님은 제자의 증거를 정답이 아니라 사랑이라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옳은가”를 외치느라, 세상이 보아야 할 표지를 스스로 지워 버렸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진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진리가 사랑의 얼굴로 드러나지 않아서일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언제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더 정확히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증언되기 때문입니다(요 13:35; 요 17:21; 고전 13:1–3).
그래서 이 글은 한 가지를 끝까지 묻고자 합니다.
“이단”은 문장을 틀리는 데서 시작되는가, 아니면 사랑을 배반하는 데서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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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저버린 자, 진짜 이단은 누구인가
–“이단”의 기준을 다시 묻다
1.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기도와 오늘의 교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요지)
또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정리하면, 예수님의 비전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일치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고,
교회의 사랑은 세상이 복음을 “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증거여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정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며, 세상은 과연
‘아, 예수님이 정말 계시구나’라고 생각하는가?”
많은 이들은 정반대의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진짜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 진짜일 리 없다”는 반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2. 사랑 대신 분열로 말하는 교회
오늘 교회의 현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교회는 수천 개의 교단과 분파로 쪼개져 있고,
“우리와 조금 다르게 색칠하는” 형제자매에게
너무 가볍게 “이단”, “사이비”, “바벨론”, “배도자”라는 말을 붙입니다.
때로는 “저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함부로 단정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기독교인을 떠올릴 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공동체”를 떠올리기보다,
판단과 정죄,
자기 의와 우월감,
세상보다 더 날카로운 내부 싸움
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교회의 표지로 주셨는데,
세상은 “사랑 외의 거의 모든 것”으로 교회를 기억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약속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기도의 방향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3. “사랑 vs. 진리”라는 잘못된 프레임
이 지점에서 흔히 등장하는 반응이 있습니다.
“또 사랑 타령인가?
이단이 판치는 시대에,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사랑을 내세워 교리를 희석시키는 건, 결국 포스트모던적 감성주의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을 천천히, 그리고 정직하게 읽어보면,
“사랑과 교리”를 서로 경쟁하는 가치처럼 놓는 것 자체가
이미 성경적 틀에서 벗어난 생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허물)를 덮느니라” (벧전 4:8)
바울은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표현을 모으면, 성경은 사랑을
“무엇보다도”,
“모든 것 위에”,
“온전하게 매는 띠”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다른 모든 계명을 묶어 주는 최상위 계명이며,
다른 모든 교리를 정리하고 완성하는 기준입니다
(참고: 롬 13:8–10, 갈 5:14).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사랑과 “교리의 바름”은 서로 경쟁하는 두 가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자체”가 교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교리입니다.
정통 교리란, 단순히 문장을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사랑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4. “사랑 없는 정통”은 정통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 문제를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도록
극단적으로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여기에 오늘 언어로 표현하면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아무리 정통이어도 – 사랑
= ‘쓸모없는 소음’
교회가 가진 지식,
정확한 교리 체계,
탁월한 변증과 논증,
눈부신 사역과 헌신, 심지어 순교적 희생까지도,
사랑이 빠지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유익이 없다”고 선언됩니다.
이는 곧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 없이 옳은 교리는, 성경의 기준으로는 옳지 않다.”
“사랑 없는 정통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통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재정의해야 합니다.
정통 교리란
“사랑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진리”이며,
정통 신학이란
“원수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동체와 세상 가운데 구현하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이 기준에서 보면,
사랑을 상실한 진리 수호는 이미 진리를 배반한 행위입니다.
5. 진짜 “이단”은 무엇인가
: 사랑을 저버린 죄
만약 우리가 성경의 이 논리를 끝까지 따라간다면,
충격적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단”의 가장 근본적 기준은
교리의 문장보다, 사랑의 유무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교리의 어떤 항목에서 다소 미흡하거나
심지어 부분적으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려고 씨름하고 있다면,
그를 함부로 “이단”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 성육신, 십자가, 부활 등
모든 교리 문장을 정확히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형제와 자매를 무자비하게 정죄하고,
원수를 미워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성경적 기준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정통”이라 부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랑을 배반한 참된 의미의 이단”
에 더 가깝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세례 방식, 성만찬 이해, 교회 구조, 예언 해석 등
수많은 교리 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고문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노골적으로 짓밟고,
예수 이름으로 이웃을 괴롭히고 죽인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는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이단’ 문제를 제기해 왔던가?”
“잘못된 교리를 가진 자”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파문당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고의로 무시하고,
서로 물어뜯고,
예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 죄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대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성경적 논리대로라면,
이 순서는 정확히 뒤집어져야 합니다.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
교리의 문장을 약간 잘못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계명과 교리를 묶는 “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이단 사냥”보다 먼저 필요한 것
: 자기 고백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과연 나는,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 왔던가?”
(요 13:34)
솔직히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변증하는 데
많은 열정을 쏟아 왔지만,
그만큼의 열정을
서로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품는 사랑에 쏟았던가?
우리는 “이단”이라는 말을
때로는 너무 쉽게 사용해 왔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냉혹함과 교만, 무자비함을 향하여
같은 기준을 적용한 적이 있던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3 요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교리적 “티”를 문제 삼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사랑 결핍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영적 자기기만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기준에서 볼 때, 이미 이단자”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대로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고발하기를 즐겼고,
하나 되라는 주님의 간절한 기도보다
“우리가 옳다”는 확신을 더 소중히 여긴 순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가 저 사람을 이단이라 부르기 전에
먼저 우리의 사랑 없음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이단이었음을 고백합니다.”
7. 사랑을 회복할 때 비로소 정통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는 언제나 소중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교리는 사랑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참되게 ‘정통’이 된다.
진리는 사랑을 세울 때에만
온전히 진리의 역할을 다한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랑이 교리 위에 있는 최상위 계명”이라는 인식,
“사랑이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첫 기준”이라는 영적 민감성,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안의 사랑 없음에 대한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버지여…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이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여전히,
교회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세상이 복음을 보게 되는 것을 갈망하고 계십니다.
8. 결론: 사랑의 정통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하는 데
복음의 에너지를 소모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복음의 능력을 사랑으로 구체화할 것인지.
정말로 무서운 이단은
성경의 문장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도
그 사랑을 삶으로 거부하는 우리 자신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이단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고,
“주님, 사랑하지 못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던 입술이,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입술로 바뀌고,
논쟁에만 쓰이던 열정이,
상처 입은 이웃을 안아 주는 사랑의 에너지로 바뀌며,
교리의 장벽 너머로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증언하는 연합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날, 세상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저들을 보니,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 것 같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말뿐이 아닌 사랑의 정통,
복음다운 복음 안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