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시작되지 않았다
—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다
1. 한 문장이 모든 것을 심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 선언보다 더 아름답고, 동시에 더 두려운 문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이 사랑을 하신다”는 수준의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정체를 규정하는 존재론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랑이 하나님께 여러 성품 중 하나라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을 뒤로 물리고
다른 항목(분노, 권능)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든 사랑으로만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가끔 작동하는 기능’이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창조 이전부터 이미 사랑이실 수 있었는가?
피조물이 없던 영원 전에도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현실이었는가?
이 질문을 정직하게 따라가면,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예수 안에서 드러난 삼위일체의 풍경으로 이끌립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 더 정밀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2. “사랑”은 성품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2-1. “하나님은 사랑하신다”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거리
“사랑하신다”는 말은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랑이시다”는 말은 존재를 가리킵니다.
행위는 선택될 수도,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는 멈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렇게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닌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으신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검증을 받습니다.
만약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순간에는 사랑을 거두고 폭력과 보복을 정당화한다면,
나는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붙잡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까지 오면 다음 질문은 논리적으로 필연입니다.
2-2. “창조 이전”에도 사랑이 참이려면
사랑이 하나님 존재 자체라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들기 전에도 사랑이셨고,
피조물이 없어도 사랑이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창조 이후에 시작된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없던 영원 전, 하나님 안에
실제적인 사랑의 ‘관계’가 존재했는가?
성경은 이 질문을 추상적인 철학 개념으로 풀기보다,
한 사람의 삶과 기도와 관계로 답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입니다.
3.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 내부의 관계”
3-1.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 그런데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신다
예수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 1:1–14; 골 1:15–17; 히 1:3).
그런데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는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가리키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다”(요 14:28)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대로 행한다”(요 5:19)
새벽과 밤을 가르며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막 1:35; 눅 6:12)
자신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라고 증언하시는 예수(요 5:30; 8:16)
이 모든 진술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 우리를 몰아갑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 살아가신다.
즉,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내부의 ‘너와 나’의 관계를 목격합니다.
3-2. 예수는 성령으로 사역하신다 — 그리고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 약속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았다고 선언하시고(눅 4:1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28).
또한 떠나신 후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 14–16장).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아버지께 기도하며 아버지와 자신을 구별하신다.
예수는 성령으로 사역하시며, 성령을 또 다른 위격으로 증언하신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 신앙의 핵심인 “한 분 하나님”(신 6:4)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 조합은 우리에게 한 가지 고백으로 수렴합니다.
한 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교제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전통은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추상적인 철학 용어 대신,
예수의 삶 자체로 이 진리를 드러냅니다.
이제 우리는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사랑이셨는가?”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4. 두 가지 신: ‘외로운 전능자’ vs ‘사랑의 공동체’
4-1. 외로운 전능자의 치명적 한계: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많은 종교적 상상 속에는 이런 신이 있습니다.
우주에 한때 아무도 없고,
오직 전능한 한 신만 덩그러니 있었던 상태 —
영원한 고독자.
그러나 여기에는 차갑고도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관계적 실재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만 사랑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혼자였던 신은,
아무리 선하다고 주장해도
그 자체로 사랑일 수 없습니다.
그 신이 사랑하려면 먼저 대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즉, 창조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 됩니다.
그 결과, 이런 신에게서 ‘사랑’은
영원한 본질이 아니라 어느 시점에 시작된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는 선언은 더 이상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라,
“어쩔 때는 사랑하시기도 한다”는 정도로 퇴색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는 쉽게 잔혹해집니다.
사랑이 본질이 아니라면,
신은 얼마든지 사랑을 거두고
“내 편의 정의”와 “우리 편의 폭력”을 앞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4-2. 삼위 하나님: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다 — 사랑이 ‘항상 이미’ 있다
반대로,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며 내어주십니다(요 3:35; 5:20).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시며 신뢰와 순종으로 응답하십니다(요 14:31).
성령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시는 사랑의 영이십니다(롬 5:5).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 3:17; 17:5).
이 기쁨과 사랑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 안에서 충만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로 인해
사랑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없어도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현실입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선언이
거짓 섞이지 않은 진리가 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영원한 사랑이
역사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자리는 어디인가?
성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십자가입니다.
5. 십자가: 삼위 사랑이 역사 속으로 흘러넘친 순간
5-1. 십자가는 “삼위 하나님의 사건”이다
십자가는 종종
“아버지가 아들을 벌주는 장면”으로 오해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삼위 사랑의 합창입니다.
성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심”(요 3:16; 롬 8:32)
성자: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주심”(갈 2:20; 엡 5:2)
성령: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으심”(롬 5:5)
특히 예수의 말씀은 모든 왜곡을 차단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노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아들은 억지로 끌려간 희생양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주체입니다.
아버지는 바깥에서 냉정한 재판장으로 서 계신 분이 아니라,
아들의 고통을 등지고 서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 속으로 함께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이 사랑을 우리의 현실로 번역하여,
교회와 세상 속에 생명으로 흐르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이 폭력을 사용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폭력을 당하심으로
폭력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5-2.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비(非)복음의 폭력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두려운 분별을 마주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외로운 전능자를 믿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편을 무조건 들어주는 신
내 종교 집단을 위해 타인을 짓밟아도
정당화해 주는 신
원수에게 끝없는 고통을 가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부르는 신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는 정반대의 길을 가십니다.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눅 23:34).
보복이 아니라 용서를 선택하십니다.
원수를 껴안는 사랑으로 악을 폭로하십니다(롬 5:8, 10의 논리).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문장은
우리 신앙을 위로하는 동시에 심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폭력, 배제, 우월감이 있다면,
십자가는 그것을 복음의 빛으로 드러냅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은
원수에게까지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을 이용해
네 욕망을 강화할 수 없다.
6. 구원과 교회: 사랑의 공동체로의 초대, 그리고 경고
6-1. 구원은 ‘주소 이전’이 아니라 ‘참여’이다
삼위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이시라면,
구원은 단순히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사 간다”는
공간 이동이 아닙니다.
구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초대받아 참여하는 사건입니다(요 17:21–26).
성부는 우리를 “그 아들 안에서” 받아들이십니다(엡 1:3–6).
우리는 성자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습니다(요 1:12).
성령은 그 아들의 영으로 우리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부르게 하십니다(롬 8:15–16).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벧후 1:4)
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즉, 구원은 단순한 신분 변경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살도록
빚어져 가는 삶입니다.
6-2. 교회는 ‘사랑의 삼각형’을 보이게 하는 아이콘이다
예수는 교회의 정체를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교회가 하나님을 증언하는 방식은
논리의 과시나 권력의 우위가 아니라
사랑의 형상화입니다.
서로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
약함을 숨기지 않고 서로 짐을 지는 공동체
“내 권리”를 내려놓고 “너의 유익”을 선택하는 공동체
그럴 때 교회는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작은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표지가 됩니다.
반대로,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고백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경쟁, 혐오, 배제, 권력 다툼이 지배한다면,
우리는 실제로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이 아니라
“고독한 힘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복음은 부드럽지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공동체인가?
아니면 당신의 욕망을 합법화해 주는
고독한 힘의 신인가?
이 질문은 누구도 안전하게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를 진짜 자유로 이끄는 질문도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처음에 붙들었던 그 한 문장을
삼위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다시 고백해 봅니다.
7. 처음과 마지막: 사랑이라는 명사, 사랑이라는 동사
지금까지의 논리는 한 흐름으로 모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2)이 선언이 참이려면,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 안에 사랑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
3)예수의 삶과 기도와 성령의 증언은
하나님이 삼위의 사랑의 교제이심을 드러낸다.
4)십자가는 그 영원한 사랑이
원수에게까지 흘러넘친 삼위 하나님의 사건이다.
5)구원은 그 사랑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초대이며,
교회는 그 사랑을 가시화하는 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만
담대하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영원 후까지도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명사이셨기에,
시간과 역사 속에서 언제나
사랑이라는 동사를 행하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신”을 이용해 내 편을 강화하는
종교적 계산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저들을 박살내 주는 신”이 아니라,
원수까지 껴안으시며
우리에게도 그 길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초대는
권력의 명령이 아니라
식탁의 초청처럼 들립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우주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사랑이 계십니다.
고독한 전능자가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공동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이 사랑 안에 거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언제나 사랑인 하나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