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전쟁이 있었더라.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우고,
용도 그의 천사들과 함께 싸웠다.”
(요한계시록 12:7)
설명되지 않는 눈물 뒤에는,
때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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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전쟁터가 된 창조세계, 그리고 십자가의 하나님
우리는 고난을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일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설교와 책들은 욥기를 이런 질문에 대한 대표적인 해답처럼 사용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다 뜻이 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알게 된다.”
물론 이런 말은 때로 사람을 잠시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욥기는, 그런 식의 단순하고 정리된 설명을 무너뜨리기 위해 성경 속에 들어온 책에 가깝습니다.
욥기가 보여 주는 것은,
악의 비밀이 어떤 숨겨진 하나님의 설계도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전쟁터가 되어 버린 창조세계의 비극적 현실 속에 고통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질문들—고통, 악, 하나님의 침묵, 인간의 무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비로소 더 깊이 밝혀집니다.
십자가는 욥기가 던진 질문을 복음의 빛 아래에서 다시 읽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글은 바로 그 관점에서, 욥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복음 중심으로 다시 읽어 보려는 시도입니다.
1. 하늘의 프롤로그 — 보이지 않는 전쟁, 땅 위의 눈물
욥기 1–2장은 일종의 하늘 무대 뒤편을 보여 줍니다.
땅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야기가, 갑자기 하늘의 장면 속에서 열립니다.
하나님의 회의 자리 가운데, 낯선 존재 하나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사탄(satan). 뜻은 “대적자”, “고발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욥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이 만드신 관계 질서 전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의 도전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정말 그럴까?
하나님이 보호해 주고 복을 주니까 그런 것 아닌가?
울타리를 걷어내 보라.
복이 사라지면, 누가 하나님을 공짜로 사랑하겠는가?”
이 고발은 단순히 욥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주 전체를 향한 냉소입니다.
“사랑은 없다.
신뢰도 없다.
헌신도 없다.
결국 남는 것은 계산과 거래뿐이다.”
이것이 사탄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 고발을 힘으로 눌러 버리지 않으십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억지로 입을 막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셨다면, 오히려 사탄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봐라. 이 신도 결국 힘으로 반대자를 침묵시키는 존재 아닌가.
사랑이 아니라 힘으로 지배하는 분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은 폭력으로 침묵을 강요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서 이 고발이 실제로 반박되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욥이 등장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보호의 울타리를 거두십니다.
그리고 사탄이 욥을 공격하도록 허용하십니다.
다만 한계를 두십니다.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라”(욥 1:12, 2:6).
여기서 두 가지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1) 이 장면은 ‘문학적 프롤로그’다
이 부분은 “사탄이 매번 하나님께 일일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아야만 행동한다”는 식의 행정 구조를 설명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마치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사후 세계의 세부 구조를 지도처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욥기 프롤로그의 핵심 목적은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 전체의 질문을 세팅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거래 없는 사랑이 가능한가?”
이 질문이 이야기의 중심축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하나님이 욥을 실험용으로 사용하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욥기는, 하나님을 고난의 직접 설계자로 보는 신학을 깨뜨리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고난의 궁극적 기원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터가 되어 버린 세계 속에서 벌어진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으로 선한 길을 여시는 분이십니다(롬 8:28).
2) 욥과 친구들은 이 하늘의 대화를 전혀 모른다
이 비밀을 아는 존재는 오직 독자뿐입니다.
욥도 모르고, 친구들도 모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욥기 전체는 바로 이 무지(無知),
그리고 그 무지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과 타인을 잘못 해석하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즉, 욥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땅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뒤에는
인간이 볼 수 없는 차원의 전쟁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싸움과,
자유로운 영적 존재들의 선택과,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들이 얽혀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대부분을 모른다.”
이 무지를 모른 채, 인간은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을 단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2. 욥의 친구들 — 설명은 많지만 사랑은 없는 ‘설계도 신학’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참 잘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고 옷을 찢고 울며, 욥 곁에 앉아 칠 일 밤낮을 말없이 함께 있어 줍니다(욥 2:11–13).
사실 이것이 가장 좋은 위로였습니다.
문제는 욥이 입을 열어 자신의 고통을 토해 내기 시작한 다음부터입니다.
그 순간 친구들은 더 이상 함께 울지 않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신학 공식을 꺼내 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늘 옳게 갚으신다.”
“그러니 네가 이렇게 큰 재앙을 당한 것은, 반드시 네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엘리바스의 말이 대표적입니다.
“죄 없는 자가 망한 일이 어디 있느냐?
정직한 자가 끊어진 일이 어디 있느냐?”(욥 4:7–9 요지)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기도 하고,
정직하게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성실한 사람이 병으로 쓰러지고,
악한 자가 오래 번영하는 일도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실보다 자기 신학 체계의 안정감을 붙듭니다.
왜냐하면 그 공식이 무너지면 자기들도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행은 반드시 그 사람 탓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욥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치시는 것은 사랑의 징계다.”
“회개만 하면 다시 복을 받을 것이다.”
“네 장막이 평안해질 것이고, 네 자손도 다시 많아질 것이다”(욥 5장 요지).
이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무 잔인합니다.
자녀를 잃은 사람에게,
몸이 썩어 가는 사람에게,
재산과 명예와 삶의 기반이 무너진 사람에게,
“이건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야.
네가 제대로 회개하면 다시 다 돌려받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
욥기는 이런 말을 위로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마지막에 이 신학을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나에 대하여 옳게 말하지 아니하였다”(욥 42:7).
이것이 중요합니다.
친구들의 문제는 단지 말투가 나빴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이 미리 짜 두신 설계도대로 일어난다”는 사고방식,
곧 설계도 신학의 대표적 초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욥기는 그 신학을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3. 욥의 반란 — 정직한 탄식, 그러나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
그러면 욥은 옳았을까요?
욥기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욥은 친구들보다 훨씬 정직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모든 신학적 결론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욥도 친구들과 같은 기본 공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직접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친구들과 다른 점은,
욥은 자기 고통 앞에서 그 공식을 억지로 미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특별히 더 악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재앙이 내게 닥쳤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 쪽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쪽에 있는 것 아닌가?”
같은 전제에서 친구들은 “네가 잘못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욥은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시다”는 결론을 냅니다.
그래서 욥은 마침내 아주 격렬한 말들까지 쏟아 냅니다.
하나님은 무고한 자의 재앙을 비웃으신다고 말합니다(욥 9:23–24).
억울한 자들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욥 24:12).
하나님이 마치 사냥꾼처럼 자신을 쫓아 무너뜨리려 하신다고 탄식합니다(욥 10장, 16장, 30장).
이 탄식은 충격적일 만큼 솔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얼굴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외쳤지만,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폭군처럼 상상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친구들보다 욥을 더 기쁘게 여기십니다(욥 42:7).
왜일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오해하면서도 하나님께 직접 매달렸고,
친구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고통당하는 사람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욥은 판단이 흔들렸지만,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기보다, 차라리 하나님과 씨름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여전히 “정직하고 곧은 자”로 남습니다.
그러나 결국 욥도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욥 42:3),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즉, 욥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따지고 울부짖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그 솔직함이 만들어 낸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는,
마침내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왜곡을 풀어 주는 하나님의 대답은,
감추어진 비밀 계획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전쟁터가 된 피조세계의 현실입니다.
4.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 — 광대한 창조세계와 인간의 작은 시야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이런 일을 당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그 욥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 공세입니다.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 있었느냐?”(38:4)
“네가 땅의 넓이를 다 측량해 보았느냐?”(38:18)
“빛이 어느 길로 퍼지는지 네가 아느냐?”(38:24)
“하늘의 법칙을 네가 아느냐?”(38:33)
하나님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너는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너는 창조의 깊이와 넓이와 복잡성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짧은 공식으로 모든 사건을 재단하느냐?”
이 지점에서 현대의 ‘카오스 이론’이나 ‘나비 효과’는 좋은 비유가 됩니다.
지구 반대편의 작은 변화 하나가, 한참 뒤 거대한 폭풍의 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통찰 말입니다.
어떤 사건이 왜 그때, 왜 그 자리에서, 왜 그런 방식으로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건에 영향을 준 수없이 많은 변수들을 알아야 합니다.
우주적 차원의 상호작용, 생물학적 조건, 인간의 선택, 타인의 결정, 역사적 우연,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까지 다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너를 벌하시는 것이다.”
“저건 하나님이 특별히 축복하신 증거다.”
“이 일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다.”
욥기의 하나님은 이런 단정을 무너뜨리십니다.
“너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 무지를 잊어버린 채,
내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고난의 이유가 우리에게 해명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의 성품이 어둡거나 변덕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피조세계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설계도라기보다,
피조세계의 복잡성, 수많은 자유의지들의 충돌,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미지의 요소들 속에 놓여 있습니다.
5.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
— 레위야단, 베헤못, 그리고 우주적 전쟁의 현실
하나님의 대답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레위야단과 베헤못을 보여 주십니다(욥 40–41장).
이들은 단순히 신기한 동물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상징 세계에서 이 존재들은
혼돈, 위협, 길들여지지 않는 악의 세력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거대한 짐승, 제어할 수 없는 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
질서를 비웃고 삶을 위협하는 세력.
하나님은 이것들을 욥에게 보여 주시며,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세상은 너무 단순하다.
세상은 너와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지금 실제로 혼돈과 싸우고 있다.
창조를 파괴하려는 세력과 전쟁하고 있다.”
이것은 욥기만의 낯선 이미지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이런 언어를 사용합니다.
시편 74편과 89편에서는 바다와 용, 뱀을 꺾으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이사야 27:1에서는 하나님이 레위야단을 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에 오면 이 전쟁은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악한 영들을 내쫓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침입하고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은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2:15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해제시키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보면 욥기의 레위야단과 베헤못은
신약에서 더 분명히 드러날 우주적 전쟁의 그림자이자 예고편입니다.
즉, 욥기의 핵심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악과 고통은
그저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로 간단히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도 맞서 싸우고 계시는
실제 전쟁의 산물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욥과 친구들은 둘 다 잘못되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직접 심판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으로 욥을 정죄했습니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직접 행동으로 받아들였고,
그 해석으로 하나님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두 입장을 함께 무너뜨립니다.
“악은 내 계획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그것과 싸우고 있다.
너희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6. 십자가와 부활 — 하나님이 고통 앞에서 하신 가장 결정적인 응답
이제 우리는 욥기의 모든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욥기는 하나님이 악 앞에서 정확히 누구의 편에 서 계신지를 실루엣처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친구들의 말처럼 피해자를 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드러나지만,
그분이 그 피해자의 자리에 얼마나 깊이 들어오시는지는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 실루엣이 얼굴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시는 정도를 넘어,
직접 고난받는 자의 자리에 들어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의 폭력과 배신과 불의와 질병과 죽음이 한 몸 위에 쏟아지는 그 자리를 스스로 감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욥의 절규를 떠올리게 하는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재앙 속에서 하나님을 고발하는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는 인간과 피조물 전체의 자리에서,
그 고통을 짊어진 대표로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십니다.
더 깊이 말하면,
하나님은 그 외침을 하늘 멀리서 듣고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자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외침을 몸으로 감당하십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고난을 몰래 설계한 신이 아니다.
나는 고난을 몸소 짊어진 하나님이다.
나는 악을 만들어 낸 자가 아니라,
악과 맞서 싸우다 상처 입은 어린 양이다.”
그리고 이어서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은 단지 “사람은 죽어도 끝이 아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우주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결정적으로 승리했다는 선언입니다.
죽음과 악과 어둠의 세력이 최종 권력을 갖지 못한다는 선포입니다.
골로새서 2:15의 말처럼,
십자가와 부활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패배를 드러낸 공개 사건입니다.
물론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아픕니다.
전쟁은 끝난 것 같지 않습니다.
고통은 계속되고, 죽음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살아갑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지만, 그 완성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레위야단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아직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긴장 속에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은 이 전쟁터 한복판에서,
우리를 예수의 길—곧 어린 양의 길, 십자가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입니다.
그래서 욥기의 질문은 십자가와 부활, 성령 안에서 이렇게 다시 번역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지금도 모든 답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질문으로 부름 받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나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어떻게 사랑으로 싸울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현재적 부르심입니다.
7. 다니엘 10장 — 지연된 응답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전투
욥기와 함께 다니엘 10장은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현실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다니엘은 3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합니다(단 10:2–3).
그런데 아무 응답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라면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내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뭔가 내가 잘못했나 보다.”
그러나 21일 후 나타난 천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가 기도하기 시작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렸으나,
바사 왕국의 군주가 스물하루 동안 나를 막았고,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다”(단 10:12–13 요지).
이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 응답의 지연은
언제나 하나님의 외면 때문도 아니고,
항상 인간의 믿음 부족 때문도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실제 전투가 있습니다.
만일 천사가 이 비밀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다니엘은 끝까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도의 지연,
많은 설명되지 않는 고통,
많은 예상 밖의 무너짐들 뒤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전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와 다니엘은 함께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모르면서 단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외면하셨다”고 쉽게 결론 내리는 것도 오만이고,
“분명히 네 죄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오만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모든 내막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내막을 다 알지 못한 채로도
예수의 편에 서서 신실하게 사랑하고 버티며 참여하도록 우리를 붙드는 끈입니다.
8. 결론 — ‘왜 이런 일이?’를 넘어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왜?”를 묻습니다.
왜 내 아이입니까?
왜 하필 지금입니까?
왜 저 사람입니까?
왜 이런 방식입니까?
그러나 욥기는 놀랍게도 그 질문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종류의 “설명”을 주지 않습니다.
욥은 끝까지 하늘의 프롤로그를 듣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난 뒤에 있었던 사탄의 고발도 모릅니다.
레위야단과 베헤못의 정체에 대해서도 자세한 해설을 듣지 못합니다.
대신 욥이 얻게 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과 친구들이 얼마나 모르는 존재들인지를 깨닫습니다.
둘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렸던 자신의 정직함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셋째,
그 정직함 속에서라도 끝내 왜곡해 왔던 하나님 이미지를 내려놓는 자리로 부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성령 안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구체적 이유를 억지로 밝혀내는 사람이 되기보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을 붙들고
이렇게 묻는 사람으로 부름 받습니다.
“주님,
이 상황 속에서
저는 어떻게 부상당한 이웃 곁에 서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욥기는
“고난의 수수께끼를 푸는 비밀 해설서”가 아니라,
설명을 서둘러 던지지 않고
사랑으로 함께 싸우는 사람을 빚어 내는 책입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친구들처럼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네 탓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욥처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폭군으로만 규정한 채
그 절망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지도 말라.
오히려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 자신이 피해자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설명자가 아니라,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 동행자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지금도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끄십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 믿음,
복잡성과 모호함을 견디는 용기,
악의 내막을 다 몰라도 예수의 편에 서서 울고 기도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을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악의 비밀은
전쟁터가 된 창조세계의 깊은 수수께끼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더 이상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얼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 안에서 승리를 선포하셨으며,
지금도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울며 싸우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당한 이웃을 볼 때, 먼저 물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대신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이 전쟁터 한복판에서
제가 오늘 어떻게
당신의 사랑과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능력을
이 사람 곁에서 드러내기를 원하십니까?”
욥기는 바로 그 질문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붙들고 서는 사람들 안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승리는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