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더 이상 용서가 없습니까?”
“모르고 지은 죄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갔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더 이상 용서가 없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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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로 다시 죄를 지었다면, 십자가는 끝난 것인가
ㅡ넘어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진 뒤 누구에게로 가느냐는 것이다
서론
“알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더 이상 용서가 없습니까?”
“모르고 지은 죄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죄를 지었습니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아갔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선택했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더 이상 용서가 없는 것입니까?”
죄와 중독으로 고통받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음속으로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간다.
그들은 요한일서의 약속을 읽는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7절
그러나 곧이어 히브리서의 무서운 경고를 만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히브리서 10장 26-27절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고의로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질문이 생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과거의 죄만 용서하는가?”
“구원받은 뒤에 의도적으로 지은 죄는 십자가의 범위 밖에 있는가?”
“중독에서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가?”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하면 사람은 두 극단 중 하나에 빠진다. 하나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방종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절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구절만 떼어 공포를 만들어서도 안 되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경고를 지워서도 안 된다. 십자가의 사랑과 성경의 경고가 어떻게 하나의 복음 안에서 만나는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의 실패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이다.
본론
1. 고의로 지은 죄가 용서받을 수 없다면, 용서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짓는 죄의 상당수는 어떤 형태로든 의지가 개입된 죄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
죄는 단순한 실수만을 뜻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 잘못인 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마음속 욕망에 동의하는 것도 죄다.
그렇다면 ‘알면서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해석할 경우,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죄가 잘못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던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럼에도 다윗은 회개했고, 베드로는 다시 부르심을 받았다.
성경은 이들의 죄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 다윗의 죄는 엄중한 결과를 낳았고, 베드로는 통곡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적 실패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크지는 않았다.
따라서 성경이 경고하는 ‘고의적인 죄’를 단순히 “잘못인 줄 알면서 한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동시에 죄의 종류와 죄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구분한다.
넘어지는 것과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드는 것은 같지 않다.
연약함 속에서 반복해서 실패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은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위기와 민수기의 제사 규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2. 레위기의 ‘부지중의 죄’는 단순히 실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위기 4장은 주로 ‘부지중에’, 곧 알지 못하거나 실수로 범한 죄를 위한 속죄제를 규정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구약의 제사는 의도하지 않은 죄만 용서했고, 의도적으로 범한 죄에는 아무런 용서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레위기 전체를 읽으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레위기 6장에는 이웃의 물건을 속여 빼앗거나, 남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맡겨진 물건을 부인하거나, 잃어버린 물건을 발견하고도 거짓 맹세한 사람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연한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거짓말과 사기와 강탈에는 분명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돌이킬 경우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는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손해를 배상하며 속건제를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구약의 제사제도조차 모든 의도적 죄를 기계적으로 용서 불가능한 죄로 규정하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행동에 의지가 개입되었는가’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죄를 깨닫고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태도였다.
민수기 15장은 이 태도를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행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민수기 15장 30절
여기에서 ‘고의로’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높이 든 손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유혹에 넘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고 공개적으로 반역하는 태도다.
본문도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민수기 15장 31절
그러므로 민수기의 경고는 “한 번이라도 알면서 죄를 지으면 용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언약을 거부하며, 회개의 길 자체를 완강하게 차단하는 반역에 대한 경고다.
다시 말해 제사가 부족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제사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용서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용서의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문을 등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히브리서 10장을 읽어야 한다.
3. 히브리서 10장의 경고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을 향한 정죄가 아니다
히브리서 10장 26절만 떼어 읽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한 번이라도 의도적으로 죄를 지을 경우 모든 속죄가 취소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장 전체의 흐름은 정반대다.
히브리서 기자는 먼저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선포한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장 10절
또한 이렇게 말한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장 14절
예수님의 희생은 반복해서 보충해야 하는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다.
한 번 드려졌고, 완전하며, 충분하고, 영원히 유효한 제사다.
그러므로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의 제사가 어떤 죄에는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을 떠나면 그 밖에 다른 제사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고서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찾을 수는 없다. 십자가 외에는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제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경고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뒤이어 나오는 표현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히브리서 10장 29절
여기에는 단순한 실수나 일시적인 유혹, 중독으로 인한 재발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그리스도의 피를 하찮게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는 태도가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연약함 때문에 넘어졌다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그분의 은혜를 끝까지 밀어내며, 믿음의 길에서 완강히 돌아서는 태도다.
따라서 히브리서 10장의 경고는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네가 다시 넘어졌으므로 십자가의 효력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 외의 다른 구원을 기대하지 말라. 그분 밖에는 다른 제사가 없다”는 경고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하나님께서 아직도 나를 받아 주실까?”라고 묻는 사람에게 히브리서 10장을 들이대며 절망시켜서는 안 된다.
죄를 두려워하며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완강하게 짓밟고 있는 상태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경고는 회개하는 사람 앞에서 문을 잠그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버리려는 사람에게 “그분을 떠나지 말라. 그분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다”라고 외치는 말씀이다.
4. 요한일서는 거룩함과 용서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한일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요한일서는 죄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 그러나 죄 없는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 사람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요한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한일서 1장 8절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자신의 죄를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곧이어 그는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장 9절
그리고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장 1절
이 구절들의 균형은 놀랍다.
요한은 “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복음의 두 진리가 함께 있다.
죄를 짓지 말라.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에게서 도망치지는 말라.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새롭게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을 설득하는 분이 아니다. 이미 완성된 자신의 희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
요한일서에서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결코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완벽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어둠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 드러내며, 그분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계속 걷는 것이다.
어둠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를 숨기고, 합리화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며, 치유를 거부하는 것도 어둠이다.
반대로 빛은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받아들이며, 다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말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일부의 죄가 아니다.
무지해서 지은 죄만도 아니다.
모든 죄다.
5. 십자가는 우리의 실패가 나타날 때마다 다시 계산되는 계약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
그분은 “네가 앞으로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본 뒤 나머지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우리가 회개할 때마다 새로 효력이 발생하는 임시 계약이 아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인간의 실패보다 먼저 있었으며, 우리의 모든 연약함보다 깊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린도후서 5장 19절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마지못해 인간을 용서하도록 설득당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
십자가는 분노한 하나님과 사랑 많은 예수님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하나 되어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이유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끝까지 보여 준 사건이다.
그렇다고 십자가가 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죄는 여전히 관계를 파괴하고, 몸을 상하게 하며, 자유를 빼앗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죄의 모든 결과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멈추게 할 수 없음을 선포한다.
죄는 우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가 그 사람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죄를 끊은 뒤에야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파괴적인 속박 속에 그대로 머물게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묵인하는 사랑이 아니라, 죄보다 강한 사랑이다.
6. 모든 성경 해석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 아래 놓여야 한다
사람은 성경 구절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면서도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한 구절은 분노를, 한 구절은 심판을, 한 구절은 형벌을 말한다. 이 구절들을 십자가와 분리해 조립하면 하나님은 작은 실수에도 자녀를 버리고, 중독에서 넘어질 때마다 구원을 취소하며, 두려움을 통해 사람을 통제하는 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지 얼마나 많은 구절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다.
어떤 하나님의 얼굴을 중심에 두고 그 구절들을 읽는가가 중요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장 2절
요한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일서 4장 8절
그리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한일서 3장 16절
하나님은 막연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같은 사랑,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원수에게까지 자신을 쏟아붓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아야 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불안과 상처 때문에 니코틴에 의존하는 자녀를 단번에 끊어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버리시겠는가?
건강한 부모라면 담배를 피우는 자녀를 염려할 것이다. 담배가 해롭다는 사실을 말할 것이고, 자녀가 그 습관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가 다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너는 이제 내 자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인간의 부모보다 사랑이 깊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그처럼 쉽게 버리시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마태복음 7장 11절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러나 죄보다 먼저 사람을 보신다.
하나님은 담배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담배보다 그 사람을 먼저 보신다. 반복되는 행동 뒤에 숨은 불안과 외로움과 상처를 보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왜 이것을 붙잡고 있는지 안다. 나는 네 상처를 안다. 네가 넘어졌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그것이 너의 전부는 아니다. 너는 이 중독보다 크고,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다.”
7. 중독은 죄책감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중독은 단순히 “마음만 굳게 먹으면 그만둘 수 있는 나쁜 습관”이 아니다.
중독에는 선택이 개입되지만, 반복된 선택은 다시 인간의 선택 능력을 약화시킨다. 불안과 트라우마, 외로움과 스트레스가 특정 행동과 결합하면 그것은 하나의 생존 방식처럼 굳어질 수 있다.
사람은 불안을 느낀다.
니코틴을 사용한다.
잠시 긴장이 완화된다.
그 후 죄책감과 수치심이 찾아온다.
수치심은 다시 불안을 키운다.
그리고 더 커진 불안을 견디기 위해 다시 니코틴을 찾는다.
이렇게 중독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불안, 갈망, 사용, 일시적 안도, 수치심, 더 큰 불안.
이 고리에서 수치심은 중독을 끊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중독을 유지하는 연료가 되기 쉽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실망하셨을 것이다.”
“나는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어차피 또 실패했으니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데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숨어 버리게 만든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리고 숨는 것이었다.
수치심은 언제나 말한다.
“하나님에게서 숨어라.”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빛으로 나오라. 너를 찾으시는 분은 너를 파괴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너를 살리러 오신 분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구분되어야 한다.
건강한 죄책감은 말한다.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
그러나 수치심은 말한다.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정직하게 드러내시지만, 우리의 존재를 쓰레기라고 선언하지 않으신다.
성령의 책망은 구체적이고 회복을 향한다.
“이 행동은 너를 파괴하고 있다. 나와 함께 여기서 나오자.”
그러나 정죄는 모호하고 절망적이다.
“너는 원래 이런 인간이다. 하나님도 너를 포기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장 1절
정죄가 없다는 말은 고칠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침을 받기 위해 먼저 버림받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8. 사람을 죄에서 끌어내는 힘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이 있어야만 죄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죄를 또 지으면 지옥에 간다.”
“다시 넘어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러한 공포는 잠시 행동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지는 못한다.
두려움 때문에 담배를 끊은 사람은 마음속 불안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마취하려 할 수 있다. 음식, 술, 음란물, 과도한 일, 쇼핑, 인정 중독, 종교적 완벽주의로 옮겨 갈 수도 있다.
행동은 바뀌었지만 상처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심판의 공포가 우리를 강권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 5장 14절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중독에 빠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것을 끊으면 사랑하겠다”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너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위로받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랑을 경험할 때 사람은 조금씩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것을 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가 아니라,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는데, 왜 나를 파괴하는 것을 계속 붙잡아야 하는가?”
“이것을 끊어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질까?”가 아니라,
“나는 이미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제 자유를 향해 걸어갈 수 있지 않은가?”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은혜는 죄를 짓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정체성과 욕망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다.
바울은 묻는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장 1-2절
또한 디도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디도서 2장 11-12절
은혜는 죄를 묵인하지 않는다. 은혜는 죄에서 우리를 양육하여 끌어낸다.
그러나 은혜가 우리를 훈련하는 방식은 매질이 아니라 사랑이다.
9. 회개는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중독과 싸우는 사람에게 회개는 흔히 이렇게 오해된다.
“이번에는 절대로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강하게 결심한다.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견딘다. 그러나 다시 넘어지는 순간 자신의 모든 회개가 거짓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에는 죄에서 떠나려는 진실한 의지가 필요하다. 죄를 계속 즐기면서 입술로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러나 회개를 한 번의 완벽한 성공과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회개는 헬라어로 ‘마음과 생각의 변화’, 곧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회개는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이다.
중독에서 회복되는 과정에는 반복되는 싸움이 있을 수 있다. 재발은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재발했다고 해서 모든 회복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을 때 무엇을 하는가이다.
숨는가, 아니면 빛으로 나오는가?
자신을 미워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가?
“나는 끝났다”고 선언하는가, 아니면 “주님, 다시 일으켜 주십시오”라고 손을 내미는가?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빠졌다. 그러나 그가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빠지는 순간 예수님을 향해 외쳤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태복음 14장 30절
그리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마태복음 14장 31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충분히 반성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셨다.
즉시 손을 내미셨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우리를 용서하도록 만드는 대가가 아니다.
이미 우리를 향해 내밀어진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다.
10. 은혜는 혼자 견디라는 명령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문제를 영적인 감정만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독은 영적·정서적·신체적·관계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와 말씀뿐 아니라 상담, 의료적 도움, 금연 프로그램,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도움을 받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의 통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감추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현재 상태를 정직하게 말하고, 자신이 언제 무엇 때문에 니코틴을 찾는지 살피며, 불안과 트라우마를 건강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단순히 담배만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 담배가 대신 감당하던 불안과 외로움과 긴장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도 함께 배워야 한다.
그리고 다시 넘어졌을 때에는 자신을 벌주며 며칠 동안 하나님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즉시 돌아와야 한다.
“주님, 또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숨지 않겠습니다. 제 행동을 합리화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걷는 삶이다.
완벽해서 빛 가운데 걷는 것이 아니다.
넘어져도 어둠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빛 가운데 걷는 것이다.
결론
십자가는 당신이 다시 넘어졌다고 철회되지 않는다
히브리서 10장은 죄를 짓고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사람에게 “너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선언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버리려는 사람에게 외치는 마지막 호소다.
“그분을 떠나지 말라. 그분 밖에는 다른 제사가 없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제사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다른 제사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과거 죄만 덮고 미래의 실패 앞에서는 효력을 잃는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다.
그분은 단번에 자신을 드리셨고, 그 희생은 완전하다.
당신이 다시 넘어졌다고 십자가가 끝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중독 때문에 울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신 것도 아니다.
당신이 죄를 미워하면서도 반복해서 실패하고 있다면, 그 실패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러나 실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죄를 합리화하지 말라.
그러나 자신을 정죄하지도 말라.
도움을 거부하지 말라.
그러나 수치심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지도 말라.
십자가 앞에서 죄는 정직하게 드러나지만, 죄인은 버림받지 않는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네 죄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 죄 때문에 너를 포기하지도 않는다.”
“나는 네가 넘어졌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너를 넘어진 모습으로만 보지 않는다.”
“너는 네 중독이 아니다. 너는 네 실패가 아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 준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라.
용서받기 위해 자신을 먼저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지 말라.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용서 안에서 깨끗하게 되어 가라.
사랑받을 자격을 증명한 뒤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나아가 그 사랑이 당신을 변화시키도록 하라.
넘어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진 뒤 누구에게로 가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다시 그리스도께로 간다면, 그곳에는 여전히 십자가가 서 있다.
그곳에는 여전히 피 흘리신 구주가 계신다.
그곳에는 여전히 당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이 있다.
그리고 그 손을 내미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정죄하지 않으시는 사랑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진리는 결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 둘은 십자가에서 하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용서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유롭게 하신다.
그러므로 숨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떠나지 말라.
십자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완성된 사랑 안에서, 당신의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