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오지 않으신 하나님

by 벚꽃향기 posted Aug 31,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 마태복음 27:42

==========================================================


내려오지 않으신 하나님


서론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

십자가 아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생각해 보면 이상한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력함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능력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왕이라면 자신을 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면 저 끔찍한 십자가에서 당장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조롱 속에 십자가의 가장 깊은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내려올 수 없어서 내려오지 않으신 것일까요?

복음서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체포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 마태복음 26:53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 요한복음 10:18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한 선한 사람이 거대한 제국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된 사건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로마가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증언하는 더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그분은 피할 수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으셨고, 힘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보복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오래 사시면 안 되었습니까?

왜 하필 십자가입니까?

왜 끝까지입니까?

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까?



본론 | 사랑이 끝까지 갔을 때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은 십자가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아주 중요한 오해 하나를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은 그분이 고통 자체를 원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고통을 즐기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채찍을 맞고 싶어 하신 것도 아닙니다.
못에 박히고 싶어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를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고통은 십자가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찾아가셨다.”

그보다 훨씬 정확한 표현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차이는 결정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폭력과 죄악을 찾아가신 분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를 끝까지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 나라의 삶이 폭력과 두려움과 자기보존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과 충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버림받은 자를 품었습니다.
죄인이라 낙인찍힌 자와 식탁에 앉았습니다.
종교적 위선을 폭로했습니다.
권력의 논리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전혀 다른 통치를 선포했습니다.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란 하나님이 고통을 좋아하셔서 만들어 낸 장소라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악의 세계 한가운데 들어와 끝까지 사랑으로 남았을 때 도달한 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몸이 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용서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자기를 낮추어 섬기라.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움켜쥐지 말고, 사랑을 위해 내어주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말로 가르치는 동안에는 이 모든 말이 아름답게 들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질문이 생깁니다.

그 가르침은 실제 상황에서도 유효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과
원수가 실제로 나를 죽이려 할 때 그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를 말하는 것과
내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폭력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과
칼과 군대와 국가권력이 나를 향할 때도 칼을 들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도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고, 자신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가르침 뒤에 덧붙여진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한 몸으로 응축된 사건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삶과 죽음이 그곳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만일 예수님이 내려오셨다면, 사랑에는 한계선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제 사고실험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사람들이 외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

그리고 예수님이 정말 내려오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못이 풀립니다.

예수님이 땅에 내려섭니다.

압도적인 하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자신을 조롱하던 자들을 심판하고, 로마 군인들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모든 사람 앞에서 입증합니다.

그 순간 누가 더 강한지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것도 분명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원수가 정말 위험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더 큰 폭력이 정답이다.”

“생명을 내어주라. 그러나 실제로 죽게 되면 자기보존이 먼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마지막 행동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더 심각한 문제도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하나의 한계선이 그어집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는 사랑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이 선을 넘어가면 그 사랑도 끝난다.”

그러면 인간은 영원히 질문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그 선을 넘지는 않았을까?

혹시, 내 죄가 너무 크지는 않을까?

혹시, 하나님을 너무 오래 거부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이미 나는 너무 많이 망가진 것은 아닐까?

혹시, 하나님도 나에게 마침내 “이제는 끝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그러나 십자가에서 인간은 할 수 있는 거의 최악을 하나님께 행합니다.

배신합니다.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침을 뱉습니다.

조롱합니다.

채찍질합니다.

못을 박습니다.

마침내 죽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 하나만 남습니다.

인간의 죄가 끝까지 갈 때, 하나님의 사랑도 끝까지 갈 것인가?

십자가에서 복음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최악을 행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여전히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신 장소가 아닙니다.

그 사랑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실제 역사 속에서 드러내신 장소입니다.


4. 십자가는 사랑을 보여주는 ‘시범’이 아니라, 죄를 실제로 짊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부족합니다.

십자가가 단지 “하나님의 사랑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육”이라면 여전히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꼭 죽어야 했습니까?”

신약은 십자가를 단순한 사랑의 시범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실제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신약은 그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희생입니다.

속량입니다.

화해입니다.

언약입니다.

죄를 담당하는 사건입니다.

악한 권세에 대한 승리입니다.

새 아담의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경쟁하는 설명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다이아몬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십자가라는 한 사건의 깊이를 서로 다른 언어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와 그 파괴적 결과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 고린도후서 5:1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단지,

화가 난 하나님이 죄 없는 제삼자(예수)에게 고통을 가해 분노를 풀었다는 그림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신약의 그림은 훨씬 깊고 풍성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만든 죄와 적대와 죽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짊어지고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게 되신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이 십자가의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마음이 없었는데 예수님의 피를 보고서야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미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까지 가셨습니다.


5.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는 폭로되고, 그 악순환은 그리스도의 몸에서 멈춥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놀랍게도 가장 선하고 가장 사랑하신 분 앞에서 인간 사회의 거의 모든 세력이 연합합니다.

종교적 권력이 참여합니다.

정치 권력이 참여합니다.

제국의 폭력이 참여합니다.

군중의 두려움이 참여합니다.

제자의 배신과 도망도 참여합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온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죄란 단지 몇 가지 규칙을 어기는 행동이 아닙니다.

죄는 사랑을 위협으로 느끼고,
진실을 제거하며,
자기보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깊은 질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악을 쏟아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 다시 악이 나오지 않습니다.

폭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증오가 들어옵니다.

그러나 증오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저주가 들어옵니다.

그러나 용서가 나옵니다.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가 다시 증식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악의 고리가 끊깁니다.

인간의 역사는 너무나 자주 이 구조를 반복해 왔습니다.

상처를 받습니다.

보복합니다.

상대가 더 크게 보복합니다.

그 보복이 다시 더 큰 보복을 부릅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습니다.

악의 가장 무서운 승리는 상대방을 죽이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악에게 저항하던 사람마저 악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폭력에 맞선다는 이유로 똑같은 폭력이 된다면, 사람은 이겼을지 몰라도 폭력의 논리는 승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 고리를 자신의 몸에서 멈추셨습니다.

죄는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그리스도를 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악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6. 하나님은 원수를 없애는 대신, 원수 됨을 없애십니다

세상의 승리는 대개 상대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을 죽이면 승리합니다.

반대자를 굴복시키면 승리합니다.

더 강한 군대와 더 큰 힘을 가진 자가 최종 승자가 됩니다.

로마 제국도 바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승리의 정의 자체를 바꾸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로마서 5:10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화해된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 자체를 제거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적 승리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모두 쓸어버리셨다면, 누가 더 강한지는 증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믿어 온 가장 오래된 신화,

“결국 더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옳다”

라는 믿음은 그대로 남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왕이라면 적을 죽여라.”

그러나 십자가의 왕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원수를 사랑하여 원수 됨 자체를 끝내는 데 있다.”

세상은 말합니다.

“능력이 있다면 자신을 구하라.”

그러나 십자가는 묻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가?”

그래서 바울에게 십자가는 세상의 지혜로 볼 때는 미련해 보이고, 세상이 생각하는 능력의 기준으로 볼 때는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참된 지혜와 능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7.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참된 인간의 길도 끝까지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줄 뿐 아니라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도 보여줍니다.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합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 의와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로마서 5:19

빌립보서 2장은 그 순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중요한 말은 “죽기까지”입니다.

첫 아담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움켜쥐려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를 신뢰하십니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우리 대신 무언가를 해주신 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참된 대표로서 인간의 길을 끝까지 다시 걸어가신 새 아담입니다.

아담에게서 우리는 인간성의 실패를 보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인간성의 미래를 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한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십자가가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8. “내 뜻대로 마시옵고” ― 십자가에는 사랑뿐 아니라 신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가신 이유를 인간에 대한 사랑만으로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심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살고 싶으셨습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곧이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가 고통 자체를 좋아하셔서 아들을 고문해 죽이기를 원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평생 선포해 온 하나님 나라의 길을 죽음 앞에서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원수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 폭력을 사용해 살아남기보다 아버지의 사랑의 길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신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신뢰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신뢰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입니다.


9. “내려올 수 있었다”와 “사랑을 배반할 수 있었다”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답하기 난해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었다면, 정말 사랑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명을 실패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까?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해 왔습니다.

한편으로 성경은 예수님의 시험을 실제적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배고프셨습니다.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배신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심히 괴로워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분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간성은 연극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고전적 기독교는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뛰어난 한 인간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생깁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능력이 있다는 것과 사랑을 배반하는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힘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힘을 자기보존과 보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그분이 계시해 온 하나님 나라와 자신의 존재 자체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선과 악 가운데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자유는 그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자유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보다 자유로우십니다.

악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의 강압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가 완전한 선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과 증오가 50 대 50으로 가능했는데 예수님이 간신히 사랑 쪽을 선택하셨다.”

오히려 십자가는 이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가장 완전하고 자유롭게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최악을 행했을 때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 아닌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10. 못이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못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붙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못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내려오실 수 없어서 남아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끝까지 십자가 위에 머물게 한 것은 로마의 철못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부른 인간을 마지막 순간에 버리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밤을 놀라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요한복음 13:1

끝까지.

마지막까지.

완전히.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 요한복음 19:30

이 두 문장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다 이루셨습니다.


11. 십자가는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오래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 끝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가?”

“내가 너무 망가진다면?”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

“내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또 밀어낸다면?”

“내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큰가?”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가?”

말로는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까지 직접 들어가십니다.

배신을 경험하십니다.

수치를 당하십니다.

불의를 겪으십니다.

고통을 당하십니다.

버림받음의 심연을 지나십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에게 말합니다.

네가 떨어질 수 있는 어느 곳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다.

이 말은 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죄는 결국 사랑의 주님을 죽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그 모든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기근도, 위험도, 칼도, 죽음도, 생명도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본 사람이 내린 결론입니다.


12. 그러나 십자가에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복음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만으로는 아직 마지막 문장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다 죽고 모든 것이 끝났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순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있으면 마지막 문장은 이것입니다.

폭력이 사랑을 죽였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 문장이 바뀝니다.

폭력이 사랑을 죽였지만 죽음조차 그 사랑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예수님이 죽음을 피해 살아남으신 것과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말합니다.

“예수는 죽음을 피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죽음이 예수를 삼켰으나 끝내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예수 한 사람에게 일어난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미래가 이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죄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폭력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무덤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랑이 마지막입니다.


결론 |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이유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고통을 좋아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피를 보지 않고서는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살리려고 사랑의 길에서 물러서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평생 가르쳐 온 원수 사랑을 마지막 순간에 배반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폭력을 바깥에서 심판만 하지 않고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 그 악순환을 끊으셨습니다.

원수를 죽여 없애는 대신 원수 됨을 없애는 화해의 길을 여셨습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끝까지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참된 인간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로만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최악을 행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여전히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의 조롱은 역설적으로 복음의 정곡을 찌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대답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사랑하는 자들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자신에게 악을 행한 원수를 더 큰 폭력으로 제거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악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

인간이 “여기까지 오면 당신도 우리를 버릴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십자가는 말합니다.

“아니다. 여기에서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인간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며 다시 묻습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는 더 깊이 내려가십니다.

배신 속으로.

수치 속으로.

고통 속으로.

죽음 속으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가장 깊은 곳에서 대답하십니다.

“여기에서도.”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너희가 나에게 최악을 행하여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며, 부활은 “그리고 그 사랑은 결국 죄와 폭력과 죽음보다 강하다”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구원의 기술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가장 알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힘이 있으면서도 힘으로 자신을 구하지 않으시는 분.

원수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원수를 향한 사랑을 철회하지 않으시는 분.

인간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우리의 가장 깊은 어둠 속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는 분.

그리고 죽음 속까지 들어가 그 죽음을 생명으로 뒤집으시는 분.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라고 묻는 사람에게 복음은 복잡한 계산을 먼저 내놓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 순간에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그토록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오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신 그분은 패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칼보다 강한 사랑으로,

증오보다 강한 용서로,

죄보다 강한 은혜로,

죽음보다 강한 생명으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사랑에는 끝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너도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