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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방언고린도 방언’, 무엇이 다른가?

이 글은 이토록 영적이지 않고 육신적으로 타락한 고린도 교회에서 성행했던 방언, 곧 고린도 방언에 초점을 맞춘 글이다. 확실히 강조하는 것은. 이 글은 현시대에 성행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글이 아니다. 고린도 방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 방언이 시작된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부터 확실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 당시, 초대 교회들은 성령 충만으로 뜨거웠다. 그러나 초대교회들 중에서 이 세상의 영의 미혹을 받아 성령을 떠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육신적으로 타락하면서 세속화 되어가고 있었던 교회가 있었다. 바로 고린도 교회였다. 바울이 지적하고 훈계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 고린도 교회는 육신적(성령이 떠난 교회)인 교회이다. -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이지 못한 육신적인 자들이며 영적으로 미숙하여 아기들과 다름없는 자들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성숙한 영적 가르침을 아직도 소화하지 못하는 영적상태에 머물러 있기에 여전히 서로 다툼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이요, 아직도 그러하니라.

 고전3:3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

 2, 음행을 용인하는 교회이다. - 고전 5:1,2 ~ 13

3,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는 교회

 고전6:1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걸어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지으려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고전6:7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4, 동성연애자, 도둑질하는 자, 우상숭배자, 술 취하는 자가 있는 교회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고전6: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니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 동성연애를 하는 자(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전6: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5,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교회

6, 성만찬을 더럽히는 교회 고전11:17~

7. 성령의 선물을 잘 모르는 교회

고전12:1 <성령의 선물>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나는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타락한 고린도 교회에서 성행했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상한 방언, 고린도 방언과 또 다른 방언, 곧 성령이 충만했던 사도들의 오순절 방언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성경의 영감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이 두 다른 방언을 비교 검토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다.

 그러나 본 필자는 지금 현시대에 교회 안에서 성행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 방언과 현재의 방언이 동일한 것인지, 또는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필자는 현재의 방언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명백히 밝힌다. 필자는 방언을 직접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현재의 방언을 비판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가졌던 고린도 방언에 대한 그의 견해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고린도 전서)을 깊이 분석한 글이다. 바로 이 점을을 확실히 주지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이처럼 육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참된 성령의 은사로 보는 관점에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vlfdy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은 이 시점에서 밝혀 두고자 한다.알아들을 수 없는 

고린도 방언, 알아들을 수 있는 오순절 방언

성경은 오순절 방언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라고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이 성령의 역사라고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은 단 한 번도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고린도 방언은 교회의 덕(유익)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교회 대신에 자기 개인의 덕(유익)만을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린도 방언이 교회의 유익을 세우지 못한 근본적 이유는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령은 교회의 유익()을 세우기 위하여 영적 선물, 곧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 성령은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만 유익을 주는 은사를 결코 주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고전10: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 중에 최상의 은사는 (방언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 최고의 성령의 은사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고전13: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사랑은 나 자신만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성령의 선물(은사)은 자기 개인의 유익보다 공동(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분명히 기록하였다.

 고전12:7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common)이익(profit of all)을 위한 것입니다.(공동)(NKJV)

 고전14:12 너희도 마찬가지라. 너희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한 이상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덕만 세우기 위한 성령의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 방언이 교회에게 유익()을 세우는 참된 성령의 은사가 되게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하여 교회가 알아듣고 유익을 얻어한다.고 다음과 같이 가록하였다.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위의 말씀들을 보면, 무엇을 하든 나 자신에게만 유익 것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 아무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덕을 세운다는 말과 유익이 된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그러나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고린도 방언자기 자신에게만 덕(유익)이 되고 교회를 위해서는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바울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위의 말씀은 그냥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는 심각한 말임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한다.

 , 참된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위한 것이고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더이상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도의 몸이다. 각 성도들은 그 몸(교회) 한 지체로서 존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가진 교회가 바로 . 그리스인이 되기 전의 옛날의 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 [6:6]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고 바울은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한 성도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처럼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고 자기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참 그리스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더나아가 교회의 유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행위는 그 성도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며 자기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인 것이다. 자기에게만 유익하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은 자기가 속하여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이기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행위는 성령을 받은 성도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자기의 덕만 세우는 고린도 방언을 하는 행위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지체라는 성경적 진리를 알지 못하는 참으로 영적으로 미숙한 행위, 곧 성숙한 그리스도인다운 행위가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성령의 은사는 각 개인이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는 능력이지, 고린도 방어처럼 자기의 덕만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그런 능력이 아닌 것이다.

 [고전12: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5:30]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각 지체(개인, 성도)는 몸(교회)을 구성하는 몸의 일 부분이다. 그러므로 몸(교회)이 건강하여야 그 결괴로 지체가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죽어가면 결국 지체도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으로서의 성도(지체)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 길이 지체를 살릴 수 있는 우일한 길이다. 만약 각 성도가 자기 자신의 덕만을 세우려고 노력하면 그리스도의 몸(교회)은 세워질 수가 없고 그 결과 교회는 죽는다. 그 결과 그 몸(교회)에 속한 각 지체인 나(교인)도 죽고 만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고린도 방언 같은 그런 것을 하는 것은 내가 사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자기의 덕만을 세우는 일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옛 나가 하는 짓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보다는 나 자신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는 자세이다. 그 길은 결국 나를 영적으로 죽이는 우상숭배와 같은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고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렇다, 우리는 교회의 유익과 나의 유익이 하나라는 성숙된 영적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일을 위하지 않고, 나만의 덕을 세우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국 라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그당시 영적으로 미숙했던 고린도 교인들과 다름이 없는 그런 세속적이며 이기적 교인들과 다름이 없는 죄인들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아직도 땅에 속한 우리의 지체를 죽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도 교인들은 그 당시까지도 그들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지 못하는 너무나 미숙한 성도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덕만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고린도 방언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참된 성령의 은사는 한 개인만의 유익을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고린도 방언은 자신의 덕(유익)만을 세운다. 그러므로 고린도 방언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고린도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유익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통역하지 않고 하는 고린도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덕(유익)만 세운다.

 고전14:17 너는 (고린도 방언으로)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교회의 성도들)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 때문에 자기의 덕만 세우는 고린도 방언은 참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권명하였다.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러므로 방언도 자기의 덕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방언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덕을 세우기만 하는 고린도 방언을 하지 말고, 오순절 방언처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을 하라는 권면이다. - 참으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고전13:5)

 오순절 방언은 참된 성령의 은사이다.

그러나 오순절 방언사도들 자신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지 않았다. 오순절이 되자 세계 각지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나라의 정상적인 언어들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살고 있었던 나라에서 모국을 방문 와서 외국어만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유대인들이 사도들의 오순절 방언을 성령의 역사로 알아듣고 구원을 얻게 되어 초대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으로 유익하였음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었다. 그러므로 오순절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세우지 않고 교회의 유익을 세운 참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방언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자기 개인의 덕만을 세우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는 고린도 방언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역사하여 발생하는 방언임이 분명한 것이다. 고린도 방언이 참된 성령의 은사라면 자기 개인만의 덕을 세우지 않는 방언이 아니라, 오순절 방언처럼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온 교회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순절 방언의 특징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사도들이 한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특정 민족들의 외국 언어였다. 따라서 사도들에게는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교회의 덕을 전혀 세울 수 없는 방언이다. 오순절 방언은 성령의 불의 혀처럼 생긴 성령의 불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외국어만 알고 있는 많은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하여 교회의 덕을 세운 방언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사도들이 외국어로 말했다는 뜻이다.

 2:7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Acts2:7 And they were all amazed and marvelled, saying one to another, Behold, are not all these which speak Galilaeans?

 2:8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가 각자 태어난 나라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

Acts2:8 And how hear we every man in our own tongue, wherein we were born?

 누가는 사도들이 외국어로 말했다고도 기록했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갈릴리말을 하는데 그들이 듣기로는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놀라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누가의 말도 맞고 듣는 유대인들의 말도 맞다. 그러나 성령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대낮에 술취해서 하는 말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말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한 오순절 방언과 영적으로 타락한 육신적인 고린도 교인들이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방언?)를 내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교회에 유익을 끼칠 수가 없는 무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전14:6 그러므로 형제들아, 만일 내가 너희에게 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로나 지식으로나 예언으로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한다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고린도 전서를 잘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떠난 교회가 되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많은 교회였음 쉽게 알 수 있다. 그 결과 심각하게 세속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되어버린 추락한 영적상태에 빠져 교린들이 육신적인 자들이 되어 있는 교회이었다. 따라서 이런 타락한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고린도 방언은 자기 개인만의 유익을 추구하고 교회의 유익은 되지 못하는 육적인 방언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이 자기 개인들만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초대교회의 유익을 세우기 위하여 성령이 선물로 주신 방언, 곧 오순적 방언은 본질적으로 자기 개인의 덕만을 세우는 고린도 방언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오순절에 세계 각지에 다른 언어(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로 말하는 방언, 곧 오순절 방언과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린도 방언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고린도 방언은 사단이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를 세속화시켜버린 성령이 없는 교인들에게 일어난 이상한 영적현상으로서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그런 고린도 방언은 결국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14: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그리고 고린도 방언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나에게 하는 것은 그 고린도 방언을 하는 자가 나에게는 야만인이나 다름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전14: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만약 사도 바울이 고리도 방언을 참된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했다면, 고린도 방언을 허공에다 말하는 것“. ”야만이라는 무례한 표현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방언을 하기를 원했을까?

다음 말씀을 보면, 마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의 개인적인 덕만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야만스럽게 여기는 고린도 방언을 하기를 원하였던 것처럼 오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위의 말씀은, 통역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 곧 교회의 덕을 세우는로서의 외국어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는 뜻이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알아들을 수 없고 허공에다 하는 고린도 방언을 하기를 원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고린도 방언이 사단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도 그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이 통역도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고린도 방언)을 했기 때문에 예배시간이 무질서해져서 교인들이 설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설교로 감동을 받던 교인들이 방해를 받게 되었다. 통역도 없이 불쑥 나온 고린도 방언 때문에 감동을 받아야 할 예배를 무질서하고 혼란 시켰다. 성령은 결코 예배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14:3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도 굳이 막지는 마십시오.(공동번역) -

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린도 방언이 허공에 말하는 것이며 야만스럽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탐탁하지는 않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고린도 방언하기를 선택하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혼란 시키는 고린도 방언의 자제를 촉구하고 교회의 품위와 예배의 질서를 지키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권면하고 있다.

 고전14:40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

만약, 고린도 방언이 참된 성령의 선물(은사)이었다면, 바울이 고린도 방언을 자기의 덕만 세우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는 것“,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야만스러운 것“, ”품위가 없는 것“, ”질서가 없는 것“, ”통역이 없이는 하지 말 것들이라고 절대로 사도 바울이 그런 식으로 평가하거나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린도 방언이 참으로 성령께서 주신 참된 성령의 은사라면, 그 방언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예배 도중에 불쑥 무질서하게 예배를 방해하도록, 성도들이 야만스럽도록 행동했을 리도 없었을 것이고 또 성령께서 그런 품위도 없는 야만스러운 행위를 허락하실 리가 없었을 것이다.

고린도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만 교회에 유익하다.

통역이 없다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교회의 덕을 세울 수도 없고 품위도 없고 야만스럽기까지 한 이런 이유로, 바울은 교회에서는 고린도 방언을 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고전14:27 누가 알지 못하는 방언(고린도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라.

 고전14:28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방언을 하기는 하는데 통역을 해야만 교회의 덕을 세운다면 성령께서는 이런 알아들을 수 없는 고린도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주시지 말고 반드시 알아 들을 수 있는 방언을 주셔야만 했다. 따라서 고린도 방언은 성령이 주신 방언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방언을 참된 성령의 선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참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의 은사라고 다음과 같이 분명히 인정 하였다. 바울은 이런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들을 각종 방언들’(diversities of tongues)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바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린도 방언은 참된 성령의 은사로 취급하지 않았다. - (아래의 고전12:10,28 절을 참조하시라).

고전12: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12: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고전12: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들”(diversities of tongues) 말함,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2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diversities of tongues)이라.

성령이 아닌 방언하는 자의 영으로 하는 방언 성령의 열매가 없는 방언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알아들을 수 없는 고린도 방언도 (성령이 아닌) “어떤 (방언하는 자의) 영의 역사이며, 성령의 역사로 하는 방언이 아니기 때문에 방언하는 자의 마음에 성령의 열매가 맺지 않는 것이라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전14:2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므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는 그가 영으로 신비들을 말함이니라.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주의할 것은, 오순절 방언은 성령의 역사라고 성경에 여러 차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은 성령이 아닌 그저 방언하는 자의 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고린도 방언을 성령이 아닌 그냥 의 역사라고 기록한 이유는 고린도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위에서 이미 열거한 여러 가지 고린도 방언 때문에 나타난 문제점들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바울이, 참된 성령의 은사라고 인정하는 방언의 은사는, 오순절 방언처럼, 분명히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언어(외국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의 은사라면 분명히 자기 자신의 덕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위와 같이 기록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복음전파를 돕는 봉사를 위하여 주셨다.

고전12:4 다양한 은사들이 있으나 성령은 동일하며

 고전12:5 다양한 봉사들이 있으나 주는 동일하며

 사도 바울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역사하시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여러 만족들의 언어로서의 방언들, 곧 오순절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불렀다.(고전 12:10) 그러나 고린도 방언을 성령이 주신 은사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이 오순절 방언의 은사는 복음전파를 해야하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장벽에 막혀 복음전파가 불가능한 경우에만 복음전파의 수단으로서 언어장벽을 초월하게 하시기 위하여 다른 민족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 모든 성령의 은사는 복음전파(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봉사를 위하여 각종 능력을 주신 선물이다. 오순절 방언은 분명히 복음전파를 위하여 주셨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은 복음전파를 위한 봉사를 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덕만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주신 선물(은사)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바울은 고린도 방언은 통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통역자를 세워도 그 통역자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알 수 없는 말, 곧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역할 수가 없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통역이 불가능 하다면 뜻을 설명할 수가 없었고 뜻을 이해시킬 수 없는 말은 상대방에게 야만을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방언의 뜻을 알 수가 없어서 통역이 필요하면 그 방언을 말하는 고린도 교인 자신이 그 당시에 고린도에서 통용되는 누구나 알아듣는 로마어(라탄어)나 헬라어로 본인이 직접 통역하면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의 문제는 본인 자신도 뜻을 모르는 말이었다.

 바울은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가 사용하는 언어 사용능력을 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모든 은사들 중에 최고의 은사는 방언이 아니라 사랑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바울은 14장에서 고린도 방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울 당시에는 세계 각 이방 만족과 국가들에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이 히브리어 이외에는 다른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여러 다른 방언들, 곧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족속들에게 통역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치는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그런 외국어로서의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주신 것이다.(고란도 방언처럼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없는 개인적이며 통역불가능한 방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의 은사도 역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고린도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거나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로서의 방언 은사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가르친 방언 은사는 알아듣고 통역이 가능한 통용중인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를 뜻하는 것이었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복음전파를 위한 것도 아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닌, 어떤 민족이나 국가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고린도 방언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이라고? -

하나님이 가장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죄인들이 그분의 뜻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알고 믿게 하시어 인을 쳐주시는 것이다.(1:13)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 말씀으로 이해시키시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인간과 소통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이시며 기록할 수도 있고 외국어로 번역(통역)할 수도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주신 분이다. 선지자를 통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시고 성령을 받은 자들로 여러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교하게 하시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시는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의 견해로는 알아들을 수 없고 야만스럽게 말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고린도 방언은 성령이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다른 영이 역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끝내는 말.

현시대의 방언이 고린도 방언과 동일한 방언이 이닌, 참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령이 주신 선물로서의 방언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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