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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란 무엇인가?
기생 라합은 과연 거짓말을 하였는가?

거짓은 진실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은 과연 진실일까?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사실이 진실과 다르다면 사실도 거짓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을까? 먼저 이 사실과 진실의 다른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말과 참말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해야만 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을 그냥 바위덩어리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아니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구룡폭포를 바위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진실은 아니다. 폭포의 아름다움이 폭포의 진실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인간을 그냥 고깃덩어리라고 말해도 그것은 사실일 뿐이지 진실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의 아름다움, 곧 사랑이 인간의 진실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은 먹고 싸고 잠자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뿐이지 결코 진실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때에 마침내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때에 마침내 인생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사실을 정확하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은 만약 아름다움이 빠져버린다면 그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을 떠난 모든 사실은 거짓이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眞善美가 제거되면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일 뿐이지 진실은 아닌 것이다. 진실이 아닌 것은 결국 거짓이다. 그러므로 진실이 아닌 사실은 결국 거짓이라는 말이다.

眞善美는 사랑의 구성요소들이다. 사랑은 진실하며,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거되어 있는 모든 사실은 진실이 아니며 결국 거짓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속의 모든 사실은 거짓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모든 거짓, 곧 죄는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는 계속 거짓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덮어주면 그 거짓은 진실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죄를 덮는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참말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정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법적으로 간음을 행동으로 범하지 않았다면 “나는 간음한 일이 없다”라고 법정에서 말하면 그 말이 법적으로는 참말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행동으로는 간음을 행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간음을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사실이요 참말이며 거짓말이 아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는 다음과 같이 참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간음을 범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경적으로는 진실이며 참말이다.

이처럼 거짓말과 참말의 구분은 하나님이 인정되느냐 인정되지 않느냐에 따라서 놀랍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거짓이냐 아니냐를 밝히려고 할 때에 항상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진다. “이 여자는 나의 아내입니다”라고 말했을 때에 그 남녀들이 이혼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 말은 사실이며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해도 이 세상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세상이 아닌 영적인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그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은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일지라도 그들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들은 이혼한 상태라고 간주된다. 그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에만 그들은 더 이상 사실상의 부부가 아닌 진실한 부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유무가 거짓과 참을 구분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여부가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육적인 이기적인 세상과 영적인 사랑의 하늘나라의 참과 거짓은 그 기준이 완연히 다르다. 참으로 이 육적인 세상에서 마저 사실이 아닌 말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죄인인 것도 모르는 너무나 이기적인 마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서로를 속이고 사는 상황에서만 거짓말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므로 ‘사실’이란 사랑이 있는 ‘진실’로부터 사랑을 제거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라합은 거짓말을 했는가?
여리고 성의 라합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의 가슴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쳐흐르게 되었다. 그 기생 라합은 여리고의 관원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진실을 말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노아의 아들 함은 그의 아버지인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그가 본 사실대로 그의 형과 아우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함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는 그의 아버지 노아에 대한 사랑이 그의 가슴 속으로부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사실이 사랑이 아닐 경우에는 진실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함의 형인 셈과 동생인 야벳은 그 사실을 함으로부터 듣고 그 사실을 사랑으로 덮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아비 노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부끄러운 시실을 사랑으로 덮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부끄러운 사실을 아름다운 진실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에 사랑이 더하여 질 때에 그 사실은 마침내 진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합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여리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실을 덮고 말하였다면 그는 진실을 말한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참 말과 거짓말을 구분하는 기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말이냐 참말이냐를 순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기준으로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기준으로 하여 참말을 말한다고 확신하며 말했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 것을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듣고 또 다시 그들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확신하며 서로 싸운다. 죄인들의 생각은 진리로부터 떠나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각각 서로의 판단기준이 진리보다는 각자 자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달라져 있기 때문에 한사람에게 참말인 것이 또 다른 한사람에게는 거짓말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사람의 말이 과연 참인가 거짓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는 불변의 진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양심을 그 영원한 진리에 맞추어서 나의 말이 과연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를 구별하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과 거짓의 판단기준이 나 자신의 양심인지 아니면 영원불변한 진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인지를 확실히 올바로 인식해야만 마침내 진정한 참말을 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다. 이러한 진리를 모르면 우리는 거짓의 속박 속에서 살면서 마치 참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자기는 확실히 참말을 한다고 확신하고 있을지라도 사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빠져 있는 각자의 거짓으로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진리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위의 성경말씀을 기준으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서 알기 전에는 자유를 모르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에도 자기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하며 거짓말을 하면서도 참말을 한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실이 진실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필자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 아이들에게 반드시 하버드대학에 합격해야만 자식대우를 해줄 것이며 또 비싼 스포츠카를 선물로 사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토록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다그친 이유도 아빠로서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참말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필자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그것이 바로 그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나의 명예와 자존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기심이 그 사랑의 뿌리에 있었다는 참말을 마침내 고백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진리가 나를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한 것이다.

생명을 위한 것이 진실이다.
또 필자는 과거에 술을 무척 즐겨 마셨다. 이 세상에 술이 없다면 살맛이 없다고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나는 술을 좋아 한다.” 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 말이 참말이라고 확신하며 말했다. 그 이유는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죽이는 술을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것은 분명히 거짓이다. 진실은 생명을 위한 것이라야 하며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망과 함께 하는 것이면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거짓이다. 그러므로 거짓은 사망이며 거짓은 사망과 함께 한다.

참 나와 거짓 나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술이 싫어졌다. 도저히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확실히 말할 수가 있다. 마침내 “나는 술을 싫어한다.” 라고 참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랑의 능력으로 변해가면서 옛날의 모든 참말이 거짓말로 변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상구는 술을 싫어하는 이상구였다. 이것이 이상구의 진실이었다. 이 이상구가 참 이상구였다. 하나님은 술을 좋아하는 변질되고 거짓된 사망의 이상구를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생명의 참 이상구로 만들어주셨던 것이다. 사실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시면 그 사실은 진실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이상구는 사실상 이상구였지만 진실의 이상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짓의 이상구가 말하는 사실은 거짓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나버린 아들 함은 거짓의 함이었다. 거짓의 함이 말하는 아비 노아가 술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망적 사실들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가 말한 사실은 진실이 아닌 거짓이었다. 그 이유는 함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난 사망적이며 거짓의 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그 사실이 사랑으로 덮어진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생 라합도 하나님을 만나면서 여리고의 거짓 라합이 더 이상 아니었다. 거짓 라합은 하나님의 사랑에 덮여서 하늘나라의 참 라합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과거의 사실대로 말한 것들이 그에게는 거짓말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상구가 술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처럼 하나님이 없이 나 자신이 기준이었을 때와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진리가 기준이었을 때의 참과 거짓의 기준이 달라지면 참과 거짓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나는 거짓의 나였다. 나에게는 아무런 기준이 없었다. 오직 내가 나에게 기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의사로서 술이 해로운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술이 좋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술이 건강에는 해로울지라도 술은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거짓 느낌인가? 자기의 몸을 망가뜨리며 생명에 해를 끼치면서 행복감을 느끼다니! 이것은 거대한 모순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감은 사망적 행복감이 아닌가! 만약 나 자신을 죽여 가는 것으로부터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 행복감은 참 행복감이 아닌 거짓 행복감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거짓 행복감은 사망적 행복감이다. 진정한 행복감은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생명적 행복감이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해야만 참 행복을 더 깊이 맛볼 수가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인 것이다.

라합도 여리고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생명을 주기 위하여 한 그 “거짓말”진실로는 사람들을 살리려는 참말인 것이다.

사랑을 주는 것은 참 행복감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인간을 건강하게 해 준다. 이렇게 건강과 행복, 곧 행복과 생명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진리이다. 그리고 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곧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이 참 행복이다.

[요1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거짓 나의 사실은 사단의 사망적 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모순된 거짓 행복, 거짓 느낌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사망으로 이끌어가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논리적으로는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설명만이 가능하다. 그 영적인 이유는 인간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을 사망으로 이끌어가려고 애를 쓰는 사단의 세력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사단은 인간에게 사망의 길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여 인간을 속여야만 인간이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생명이시지만 사단은 거짓의 원조이며 사망이다. 사단에게 속아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거짓이 진실로 여겨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아니면 사단의 사망의 세력 안에 있는지가 참말과 거짓말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사단에게 속하여 있었다. 가인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과 양심대로는 자기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이 참인 줄로 알았지만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그 제물은 거짓 제물이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제물자체가 무엇이냐?” 라는 문제 보다는 그 제물을 드리는 가인과 아벨의 “마음의 중심이 어떠하냐?” 가 훨씬 더 중요하신 분이다. 만약 가인이 아벨처럼 양을 잡아서 제사 형식으로는 동일한 제사를 드렸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인의 마음을 받으실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의 제물은 자신의 공로의 표현이며 결국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자존심의 충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에게 바치는 것고 다름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벨이 양을 제물로 드리는 마음과 가인이 양을 제물로 드리는 마음이 달랐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중에서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면서 자신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참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들의 헌금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 자신에게 바쳐진 것일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들의 참말이 거짓말이 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확신하고 있던 사울이 모세의 율법대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에도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스데반을 죽인다고 확신하며 자기의 행위에는 아무런 거짓이 없으므로 지기의 양심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사단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네가 한 일은 옳아!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공헌을 했어!” 라고. 가인이 자기의 제사가 옳은 제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확실히 믿었던 것처럼 사울의 판단에도 자기의 행위가 거짓이 아니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 당시 가인이나 사울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 오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단의 거짓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던진 돌에 맞아 피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비췬 그 놀라운 사랑의 빛은 사울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자기를 죽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의 얼굴을 스데반의 얼굴에서 발견하면서 그는 참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사단의 거짓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 그 사울이 마침내 바울이 되면서 옛 사울의 참말은 새 사울인 바울에게는 이제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사울이 경배하던 하나님의 영은 거짓의 영이었지만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었다. 영이 바뀌면 참말과 거짓말은 바뀌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진리가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욥은 자기가 늘어 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다시 참으로 깨달아 알면서 지금까지 자기가 했던 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욥42:3 (하나님의 진리를)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표준새번역)

욥42:6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한글KJV)

욥은 마침내 자기가 그 때까지 부르짖고 있었던 말들이 거짓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욥의 하나님도 바뀐 것입니다. 욥도 마침내 참 하나님을 만나 거짓의 영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고 진리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이 온 우주의 하나님, 그리고 만민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그에게 임하신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모든 세상 사람들, 특히 자기가 살고 있는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도 자기처럼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기처럼 새로운 희망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알고 그것을 바라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하여진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여리고의 기생이 아니었다. 그는 창주주 하나님의 귀중한 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라합에게 친히 사랑의 영,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셔서 온 여리고 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라합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라합은 성령의 감동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2:11 ---- 이는 주 너희 하나님은 위로는 하늘에, 아래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심이라.

사도 바울도 라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결심을 하고 정탐꾼들을 도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11:31]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야고보도 라합의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약2: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물론 라합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런 행동을 취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돈으로 매수당한 이기적이며 매국적 행동이다. 그런 말과 행동은 라합 자신에게와 여리고 주민들에게는 분명히 거짓말이었으며 거짓된 행동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의 영으로부터 분리된 사단은 라합의 이러한 진리의 영으로 한 말과 행동을 거짓이라고 부르며 국가에 대한 배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라합의 행동은 분명히 거짓이었다. 그러나 라합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라합의 행동은 자신의 한 목숨은 잃는 한이 있더라도 여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받아드려야 한다는 구원의 신념에 넘친 믿음의 결과로 취한 행동이었다. 만약 라합이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또 사단이 부르짖는 애국심과 도덕심에 자기의 양심이 걸려 그 히브리 정탐꾼들을 여리고 군인들에게 내어 주었더라면 여리고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맞이하지 못하고 큰 전쟁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을 것이다. 라합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진리의 편에 서서 여리고 성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이러한 정신은 순교자의 정신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진리의 영에 감동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진정한 믿음으로 판단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제로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여리고 거민들의 경우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해 주신 모든 지역을 점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를 거절한 백성들은 그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성을 그들에게 나타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이끌려 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온 세상에 복음의 초청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제사 제도의 교훈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만백성 앞에서 높임을 받으시고 그분을 쳐다보는 자는 다 살아야 했다. 가나안 사람 라합과, 모압 사람 룻과 같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서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과 연합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증가됨에 따라 저희는 국경선을 점점 넓혀서 마침내 저희의 나라가 온 세계에 미치게 되어야 했다.” (실물 290)

그러나 여리고인들은 그들의 성문을 꽉 닫아버렸다. 그동안 소문을 통하여 들어왔던 위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성을 향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성곽 주위를 돌면서 여리고 인들에게 나팔로 호소하게 하시었다. 여기서 나팔 소리는 제사장의 나팔소리이며 이 나팔소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여리고 성 안의 자녀들이 거짓의 영으로부터 깨어서 나와 사랑의 진리 안에 들어오라는 호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며 매일 여리고 성을 돌고 있을 때마다 여리고 인들을 거짓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자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절한 음성이 오직 성문을 꼭 잠그고 있는 여리고 백성들의 마음속에 호소하시고 계셨다. “내 사랑하는 여리고 사람들아! 나는 너희를 창조하고 너희를 사랑하는 너희의 하나님이란다! 이제 성문을 열고 나의 백성들을 맞이하여 나를 받아드리고 사단의 거짓에 더 이상 속아서 살지 말고 진리를 받아드려 생명의 길로 들어오지 않겠니! 내 사랑하는 여리고의 자녀들아! 부디 문을 열어다오!

만약 여리고의 백성들이 문을 열기를 끝내 거부한다면 그들은 생명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망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생 라합만은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의 호소를 이미 듣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이방 신을 섬기며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고 거짓과 사망 속에 거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호소에 반응하여 마음의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여리고 사람들은 라합이 받아드린 이 하나님의 생명의 호소를 거부하고 마음의 성문을 꾿게 닫고 사망 속에 거하며 사망을 선택하고 있었다.

참 안식일과 거짓 안식일
안식일 계명도 그 계명 속에 녹아 있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진리의 안식일은 거짓의 안식일이 되어버린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주신 복이 생명이며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식일은 그 복을 받아드리는 날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휴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안식일을 진실로 지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안식일 속의 복, 곧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진실의 안식일이 아닌 사실의 안식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사실의 안식일은 곧 율법주의적인 안식일로 되어버린다. 이런 안식일은 거짓 안식일이다. 사랑 없이는 사실은 진실이 될 수 없을 분만 아니라 그 사실이라는 것도 오히려 거짓이 되어버린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제사장이 안식일에 쉬지 않고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을 보자.

[마12: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안식일의 초점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에 있다는 뜻이다.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12: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따라서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행했을지라도 그 행한 것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행한 것이면 안식일을 참으로 옳게 지키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안식일은 거짓안식일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에 따라서 참과 거짓은 완전히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합이 거짓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밖에서는 참말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참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을 떠나서 해석된 모든 성경적 사실은 진실일 수가 없다. 사랑이 제거된 모든 사실들은 결국 거짓인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진실, 사실, 거짓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가 각 사람들의 개념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참 사랑과 거짓 사랑
자녀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한국인 부모들의 헌신적인 강제적 사랑은 한국인들에게는 진실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제하시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시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분이 자녀들에게 강제하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국부모들의 강제하는 사랑은 한국인들에게는 진실의 사랑으로 통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닌 거짓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참이냐, 거짓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절대자가 아닌 환경에 다라서 항상 변할 수 있는 인간의 의견이 될 수 없다. 참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변치 않으시는 절대자 만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라합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여리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기게 하기 위하여 여리고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였으나 그 거짓말은 하나님을 받아드리지 않는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었으나 하나님께는 참말이었다.

그러므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인정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는 절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절대적 진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진리뿐이며 하나님 자신일 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마침내 참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라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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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노래 2017.09.28 01:40
    평소에 사실을 말하면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던 저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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