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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에 대한 답 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의 자유를 준다는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근데 내 아이들에게 이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기가 쉽질 않아요.

요즈음 방학이어서 날마다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학교 울을 벗어나니 온통 제 멋대로 하라고 부추기는 문화들로
꽉 차있는 환경에서 이것을 허락하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방학이 끝 나갈 때 쯤 되니 난 이미 아이만 보면 웃음이 사라지고
윽박지르는 모양새만 보여주고 있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 썩입니다. 머리는 봉두남발에 다가 옷은 명품이다 뭐다
매주 한 벌 씩 사드립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이런 청소년 문화에 젖어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

박사님 이번 목회자 세미나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이와 서로 극단으로 치우친 때문이란 것을 .... "

"늘 반복되는 나의 나약한 인내가 부끄러워집니다.
감동적인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박사님 강의 너무나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답 글

박 진숙 님.
목회자 수양회 동영상 인터넷방송을 보시고 은혜를 받으셨다니 참으로 기쁩니다. 더 많은 분들이 함께 보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참으로 혼란한 이 시대에 자녀들을 올바로 주님께로 이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님의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의 이 부족한 답이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우선, 님의 냐약한 인내심에 대한 ‘부끄러움’의 고통에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와 용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이런 청소년 문화에 젖어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 에 대한 답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곧 답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지요. 만약 우리의 잘 못된 선택을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사랑의 정의가 이렇게 나타날 수가 없지요.(홈페이지 성경공부 자료실에서 “하나님은 금하신 것도 허락하신다”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전13:5]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나님(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 얼마나 은혜로우신 말씀입니까? 당신께 유익한 것이 우리들에게도 가장 큰 유익이 되거늘,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우리에게 유해한 것을 선택할지라도 당신의 선택을 강요하시는 무례함을 우리들에게 보이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내시지 않고 견디십니다. - 참으로 모든 것을 참으시며 견디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내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 속에서 "온유"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님께서 아무리 님의 '속 부글거림'과 님의 나약한 인내를 스스로 부끄러워하시고 계시는 동안에도 우리 주님은 절대로 성내시지 않고 온유하심으로 인내하시며 님의 그 '부끄러워하시는 고통'을 그분도 함께 느끼시며 안타까워하시고 계십니다.

부글거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딸(진숙이)이가 또 부끄러워하는 고통을 안고 있다니---  
바로 이러하신 주님의 고통을 아시면 적어도 부끄러워하시는 고통은 가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또, 내가 주님을 고통스럽게 해드렸구나!"라고 부끄러워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알면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요. 진정한 사랑 속에서는 부끄러움은 없어지겠지요, 그리고 부끄럽기 보다는 더 담대하여 지겠지요, 왜?, 사랑 속에서는 나의 자존심이 녹아내리니까요!  사랑 속(그리스도 안)에서는 부끄러움은 없어지지만 무례히 행치는 않게 되지요.

사랑 안에서 담대해진다는 것은 버릇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부족함과 악함이 나타날 때에 즉시 그분께 나의 모든 연약함을 내어 보이고 드리는 담대함이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믿는 어린 아이의 담대함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부끄러워하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 너는 부끄럽지도 않니?” 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 당연한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않는 것을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거짓 예의’는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본래 예의는 아름다운 것인데 사단은 이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버리고 예의는 형식인 것처럼 세상을 속여 버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여 내가 고통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고통스럽게 해드리는 것이 예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참 하늘의 예의’는 나의 연약함, 완악함을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의 더러워진 발을 주님께 쑤-욱 내미는 것입니다. “아빠, 내 발이 또 더러워졌어요. 아빠가 씻어줘요”
우리의 더러움은 하늘 아버지만이 씻어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더러운 발을 내밀 때마다 기뻐하십니다. “오냐, 참 고맙다. 내가 가장 해주고 싶은 것이란다. 다 씻고 나면 내가 꼬옥 안아줄게”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약함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하늘의 예의이지요.

이것을 몰랐던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의 발을 씻겠다고 나섰지요. 세상의 예의를 하늘의 아버지께 지켜드리려고 했지요.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꾸짖으시지 아니하시고, 그윽하신 사랑의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요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가 그분을 씻는 신앙은 하나님께 형식적 예의를 갖추는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나를 씻어야만 그분과 나는 참으로 상관이 있는 사이가 됩니다. 참으로 그분이 나를 만드신 분이 되시고 그분이 나를 치유하시는 분이되시지요. 나의 죄를 사하심으로, 곧 나를 씻어주시므로!

자매님, 우선 마음의 평안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가능한 한 빨리 다음 답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