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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부족하면 응답하시지 않습니까?


눅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누가복음 18장 전체의 목적이 바로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말은,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낙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누가 보아도 구원이 주어질 수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들, 자기 스스로를 보아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곧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간곡한 호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낙망하지 말라는 호소입니다.


눅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의 처지는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전혀 희망을 걸 수 없는, 정말 가망 없는 처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간구합니다. 이 과부에게는 간구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믿음”은 오늘 이 한국의 현실에서 “그 사람, 참 믿음 좋다.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네.” 라는 그런 “가망 있는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믿음”이 아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믿음은 예수께서 오실 때에 흔해빠진 가치 없는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보시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그 과부와 같은 믿음, 즉 전혀 헌금도 못하고 봉사도 할 수가 없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부담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누가보아도 전혀 가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과부, 세리(13절), 어린아이(17절), 거지 소경,(35절), 그리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구원일지라도 그 은혜의 필요를 깊이 느끼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달리신 십자가의 구원만을 의지 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오직 간구 이외에는 할 것이 없음을 아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에서 나오는 믿음, 더 나아가서 “자주자주 부르짖는 믿음”(8절), 남들이 저지하드라도 더 크게 부르짖는 “가망 없는 그들의 그런 믿음”(39절)인 것입니다.


따라서 질문에 기록하신 명원님의 이해는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장식용으로 쓰고 있는 그런 믿음을 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큰 소리로 자주 부르짖는 것도 장식용일 수가 있지요. 과부는 필요에 의하여 자주 찾아가 호소한 것이지, 자주 찾아가면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건축헌금을 몇 억을 한 부자가 믿음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을지라도, 그리고 자신도 자기는 공로가 많으므로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부자,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 부자는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확신한 그 부자일지라도, 예수님은 그 부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24, 25절)에 제자들도 너무나 놀랍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라고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눅18: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라고 의아해 합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을 보면 제자들도 그 때까지도 구원에 대한 관념이 그 부자관원이 가졌던 세속적인 자기의 공로에 의지하여 믿음을 평가하는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자 관원은 예수께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지요. 눅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눅18:27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 곧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보혈에만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결론은 아무리 가망이 없을지라도 낙망하지 말고, 자주, 담대하게 쑥스러움을 초월한 과부, 세리, 거지소경과 같이, 그리고 순진하게 필요를 알고 떼를 쓸 줄 아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십자가에서는 이미 모두에게 주신 구원을 받아드리라는 그리스도의 호소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극소수만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눈물어린 예언입니다. 부디 우리들은 그런 믿음, 가망이 없어도 자주, 크게(자존심을 초월한) 부르짖을 만큼 스스로가 얼마나 깊이 죄인인가를 성령 하나님의 음성으로 속속들이 깨달아서 십자가의 보혈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만큼 기도로 성령을 가까이 하면, 또 그분은 더 깊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여 주시게 되면 우리는 전혀 구원의 가망이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느낄수록 십자가 보혈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되는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호소이십니다.


정말 은혜의 필요를 느낄 때에는 자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를 자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공로에만 구원을 의존하며 자만하고 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숨 쉬듯이 항상 기도할 만큼 우리 모두는 그분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임을 깨달아가면서 영적자만으로부터 계속 깨어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명원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부족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도하는 시간, 부르짖는 소리의 크기, 얼마나 자주하느냐 등도 응답받기 위한, 구원받기 위한 공로로 취급하는 그런 오해인 것입니다.

“기도를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도 기도가 부족한 모양이지” 라는 말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교회에서 보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의 영적상태이니 어찌 주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참 믿음을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이 올바로 깨닫도록 한탄이 아닌 호소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답글을 쓰면서 저 자신도 다시 느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구원은 문제없어, 그러니 별로 기도할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해주는 사단의 음성을 듣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 모순이며 거짓임을 지식적으로는 알면서도 이렇게 느끼고 있으니 더 기도해야 될 새로운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단은 우리들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들의 자존심에 밀려서 어느 듯 속아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알아도 현실에서는 계속 자만하고 있는 자신을 향하여 낙망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주님은 사랑이시므로 낙망하지 말아야지요. 구해야지요. 자만하는 자는 구할 것이 없으므로 기도하지 않겠지요.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계속 들어야만 깨어 있을 수가 있고 개어 있을수록 우리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게 되고, 그 결과 낙망이 되고, 그러나 희망은 아직도 있지요. 기도하는 한 희망은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가 없고 죽어가는 자들이 의원을 그렇게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저 자신도 끊임없는 기도로 영적자만으로부터 깨어 있지 않으면 죽어가는 자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마 명원님을 사용하시어 저 자신이 더 죄인임을 깨우쳐 주셔서 은혜의 필요성을 더 절감케 하셔서 더 기도하게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좋은 질문을 참으로 감사합니다..저 자신의 깨어남을 위하여 너무나 좋은 질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