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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란 무엇인가?, 왜 십일조를 내어야 하나?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위의 말씀은 잘못보시면, 마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십일조를 내어보아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나 안 주시나,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고, 그 오해의 결과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부 사랑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는 십일조에 대한 오해와 복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십일 금을 내어도, 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조건 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온전한 십일조란 무엇인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소득의 10%를 당신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으실까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부터 사랑과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행17: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신,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데 왜 우리 수익의 10%를 달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데 왜 달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한 아빠와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온전한 십일조란 무엇인지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주인과 종,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답은 없지요.


무더운 여름 날 아빠와 어린 아들이 민속촌으로 즐거운 나들이를 했습니다. 물론 아빠의 자동차를 타고 가서 아빠가 입장권을 샀습니다. 너무나 더웠습니다. 귀여운 아들이 시원한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아빠를 졸랐습니다. 아빠는 쾌히 팥빙수를 시켜주었습니다. 아빠는 팥빙수를 그렇게 좋아 하지 않아서 시원한 얼음물만 한잔 시켜서 마셨습니다.


아들은 맛있게 팥빙수를 먹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은근히 한 숟갈 만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빠가 팥빙수를 좋아해서도 아닙니다. 아빠는 아들이 마음껏 맛있게 팥빙수를 먹기를 원했습니다. 아빠는 아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아들이 먹고 있는 팥빙수도 아빠 돈으로 사준, 아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네 팥빙수 한 숟갈만 아빠 좀 줄래?”라고 말했습니다.

아빠가 이렇게 요청한 이유는 그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때 그 맛과 행복감이 극치에 달한다는 것을 체험시키어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먹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누는 사랑, 곧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의 맛이 더 좋은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요.


아빠는 아들에게 팥빙수를 사주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그 사랑은 주는 사랑이지요. 그 주는 사랑의 기쁨은, 아들이 지금 알고 있는 받는 사랑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지요. 그러나 아들은 그 주는 사랑의 기쁨을 아직은 모릅니다. 아빠는 이 주는 사랑의 기쁨을 잘 압니다. 그래서 아빠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도 받는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는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달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아들이 그 주는 사랑의 기쁨을 알게 되면 앞으로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주면서 더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로 수익의 십분의 일만 달라고 요청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이러한 아빠의 사랑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싫어, 이 팥빙수는 내꺼야!”라고 말해도 아빠는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아빠는 슬쩍, “아빠가 사준 건데?”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그래도 내꺼야!”라고 우겼습니다.

아빠는 빙그레 웃으며 “그래, 네 꺼 맞아, 맛있게 먹어, 응” 이라고 말하면서 그 아들이 “주는 사랑의 기쁨”을 곧 알게 되기를 바라며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그 아빠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팥빙수를 혼자 다 먹어 치워버린 아들이 말하기를 “아빠, 고마워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기쁩니다. 아들이 나눠 먹진 않았어도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아빠는 아들을 꼬옥 껴안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네가 너무 좋아!”

아들은, “내가 팥빙수 나눠 먹지 않았는데도 내가 좋아?” 라고 물었습니다. 나누지 않았을 때에는 그 기쁨이 온전하지 못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대답하기를 “그럼, 물론이지” “받는 것도 기쁘지만 주는 것이 훨씬 기쁘단다.”

아들은 고개를 갸웃등 하며 말하기를, “진짜?, 정말?” “주는 게 진짜 기뻐?, 고짓말이지?”

아빠가 대답하기를, “정말이야” “다음에 또 아빠가 팥빙수 사 줄 테니까 그 때 아빠에게 한 숫길 줘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러면 주는 것이 더 기뻐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한번 시험해보지 그래”

아들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아빠 말대로 한번 그렇게 시험해보리라고 조용히 결심했습니다.


어느 휴일 시골 할머님 댁에 다녀오는 길에 너무 더워서 아들은 또 아빠에게 팥빙수가 먹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팥빙수를 사 주었습니다. “잘 먹어, 응”

아들은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주는 사랑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들이 사랑의 미소를 짓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빠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아빠, 고마워!”

아빠가 말했습니다. “참 맛있어 보이네, 아빠도 한 숟갈만 먹어볼 수 있겠니?”

아들은 약간 망설였습니다. 꼭 손해 볼 것만 같았습니다.

아빠는 말했습니다. “그냥 혼자 먹어도 괜찮아, 아빠는 안줘도 괜찮아, 그래도 아빠는 네가 좋아!”

아들은 한 숟갈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싱글벙글하시며 기뻐하시는 아빠가 신기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확실히 더 기뻐 보였습니다. 아들은 지난번에 아빠가 하신 말이 생각났습니다. 주는 것이 정말 더 기쁜지 한번 시험해보라는 말이 생각난 것입니다. 마침내 아들은 시험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들은 큰맘 먹고 말하기를, “아빠, 이거 한 숟갈만 먹어봐, 맛있어”

아빠는, “야 이거 너무너무 맛있네!, 이런 팥빙수는 처음이야, 너무너무 고마워!” 아빠가 자기 돈으로 팥빙수를 사주시고는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고맙다고 말하는 그 순간, 아들은 이상한, 그리고 놀라운 기쁨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아빠가 말했습니다. “줘보니까 기쁘지?”

아들은 놀랐습니다, “응, 팥빙수도 갑자기 더 맛있어졌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빠!, 다음에도 또 나눠 먹을께”라고 말하고 보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사실은 팥빙수는 자기 것이 아니라 아빠 것이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거라고 우겼던 것이 좀 무안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옷도, 책가방도, 신발도, 칫솔도 모두 아빠가 사준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아빠가 너무너무 고마워졌습니다. 그 고마움은 지금까지 미쳐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아들에게 넘치도록 가져 다 주었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빠는 날 너무 사랑해, 아빠가 너무 좋아!, 난 이제 아빠 말 잘들을 거야.” 그러고는 아빠 품에 꼬옥 안겼습니다. 아빠는 자기가 말은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빠의 품에서 아들은 참으로 편안했습니다.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했습니다.

아빠가 주시는 복(사랑)이 아들의 마음속에 쌓아 둘 곳이 없도록 넘쳐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하늘 문이 열린 것처럼 아빠의 사랑의 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아들은 아빠에게 한 숟갈 주는 것이, 그냥 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한 숟갈만 달라고 하시는 명령은 그냥 명령이 아니라 더 넘치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약속이다.(교육 126)

과연 E.G. White는 먼저 깨달으신 분입니다.


이런 진리는 어린아이들이 더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은 마침내 온전한 십일조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주는 사랑을 깨닫는 것이며,

온전한 십일조의 명령은 복을 쌓아 둘 곳이 없을 만큼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온전한 십일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임을 알게 하는 약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뜻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되면 피조물인 인간은 마침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곧 조건 없이 주시는 사랑을 더 구체적으로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기쁜 것임을 알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랑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도 당신이 느끼는 지고의 행복감, 곧 주는 행복감을 가르쳐 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주로서 인간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체험인 것입니다. 그 체험의 결과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체험적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어 마침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온전한 십일조는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나누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랑의 기쁨, 곧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모든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되겠지요. 주는 것의 행복을 즐기는 그런 성품, 말입니다.


[벧후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모든 것을 만드시고 소유하신 분이 마치 우리들이 소유주인 것처럼 “열에 하나만 주겠냐?”라고 물으시는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지요, 오직 그분의 품성으로만 그렇게 하실 수 있지요. 마치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어 우리들의 위치를 당신의 위치에 올리시어 우리들이 당신의 친구인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5: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는 우리를 그분의 친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부록]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그 당시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은 모두 다 십일조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주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도적질’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적질이라는 말씀은 10%가 되지 않고 8% 또는 9%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너무나 상식적인 이해이지요. 그러나 바리세인들이나 세리들이 10%를 다 내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주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리세인들과 부자 관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눅18: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21]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도적질’이라는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은 확실한 액수를 다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시 ‘온전한 십일조’(말 3:10)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낸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10%의 십일조를 낸 그 행위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도적질이라고 말씀하신 그 바리세인들이 드린 십일조란 과연 어떤 십일조일까요? 아마도 위에서 말씀드린 ‘온전한 십일조’는 아니었나봅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아들이 아빠에게 팥빙수 한 숟갈을 주면서 다음에 또 사 줄 거야, 안 사 줄 거야, 라고 조건을 걸었다면 아들은 아빠가 사준 팥빙수가 끝까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빠에게 한 숟갈을 주지 않으면 아빠는 다시는 팥빙수를 자기에게 사주지 않을 그런 품성을 가진 아버지로 알았던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또 다른 경우는, 아들이 아빠를 생각하기를 만약 아빠에게 팥빙수 한 숟갈을 주지 않을 경우, 아빠는 자기에게 벌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빠를 무서운 아빠로 생각하여 두려워하며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위의 경우들은 아들과 아빠의 관계가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니라 법적으로만 연결되어 있고 아들은 아빠를 생각하기를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는 독재적 아빠로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아빠와의 관계는 결국 다음과 같은 현상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아들이 아빠에게 팥빙수 한 숟갈을 주면서 자기는 아빠에게 자기의 팥빙수를 희생적으로 드려서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아들이 자기의 모든 수익인 팥빙수를 자기 힘으로 벌어드린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 그리고 자기 것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것으로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그 일부를 하나님께 주는 행위, 그리고 그런 십일조를 내고 자랑스러운 것, 이것은 절대로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더 충성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 이것은 정말 도둑질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도적질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것은 십일조를 올바로 내지 못하면서 자기의 믿음의 부족함을 느끼는 것보다 더 심각한 영적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둑질의 십일조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건적 사랑이라고 믿고 그 결과 주인과 종의 관계,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드리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고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오해하고 조건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으로 격하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건 없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축소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의 궁극적인 의미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저주를 받는다.

말3: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특별히 조심해서 읽으셔야 될 점은 “저주를 받았느니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저주를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참으로 주의하셔야 할 점은 이 “저주를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을 “저주를 (하나님께서)주셨느니라.”라고 읽지 말아야 하신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는 스스로 저주를 (사단으로부터)받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저주는 사단으로부터 오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십일조를 드리고 있는 행위자체가 사단의 유혹에 이미 빠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는 사단의 유혹을 선택한 결과이니까요. 우리는 그러한 저주를 받기를 거부하고 참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자신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십일조를 드린 경우가 있음을 회개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