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아라비아에 시집을 간 한국여인

by 부자마음 posted Jul 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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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쟁이 지나간 자리..

한국은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안에 취업할 좋은 직장도 마땅하지 않았고

끽~ 해야 가발공장, 옷-재봉틀 기사, 버스 조수 등등..

그나마 그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고급 직업은 간호사였다.


전문적인 간호사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아주 초 스피드로 간호사

과정을 마치게 해서 '간호사 자격증'을 마구 남발했다.


그래서 1950년 후반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는

그나마 머리좀 돌아가는 , 그나마 정보좀 있는 사람들은

딸을 간호사로 만들어서 여기저기에 수출을 시켰다.


그중에 한곳이 '사우디 아라비아'이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그곳은 참으로 부자 나라다.


한국 사람들이 우리 백성들을 대단하게 볼지 모르지만,

사우디 아라비아 사람들이 볼 때에는 우리가 태국이나 베트남 사람

보듯 한다.


지금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아내를 4명까지 얻을 수 있지만

50년 전에는 더 심했다. 실질적으로 법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아내를 두명 이상 함께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간호사가 아니라도, 인력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한국에서는 노동자로

사우디에 많이 나갔다.

한국에서는 달러가 귀했지만 당시만 해도 큰 돈을 벌어서 왔다.


당시만 해도 숯불을 쇠그릇에 담아서 다라미로 사용하던 시절에..

전기 다리미를 사서 보내 왔는데, 그 감동은 참으로 대단했다.

연필을 칼로 깎아 쓰던 그 시절에 연필 깎는 기계를 보냈는데,

그것은 전교에 단 한개밖에 없는 기계였다.


운동화, 의복을 넘어서 사우디에서 보낸 수박씨...그것을 한국에 심었는데

흥부가 탔던 박처럼 엄청나게 컸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가난했지만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

그녀는 간호사 자격증만 걸치고, 돈을 많이 준다는 사우디로 갔다.

당연히 영어가 통할리가 없었다.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무조건 눈치, 코치를 받으면서 영어를 배웠다.

당시 필리핀은 '영어권 국가'였으며, 간호사 교육을 받아서 사우디로 취업하는

사람이 많았다.


발음은 좀 좋지 않더라도 '영어'를 사용할수 있으니, 한국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알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영어를 못하더라도) 한국 사람을 더 선호했다.


왜냐하면 필리핀 간호사는 병원용품들을 자주 훔쳤지만, 한국 사람들은

가난해도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우디에서는 대부분 바닥에 카펫트를 깔고 산다.

몇년 지나면 그 카펫트를 새것으로 교체를 하는데, 필리핀 사람이

헌 카펫트를 보면 버리기에 아까워서 그랬겠지만 사정을 해서

중고 카펫트를 포장해서 필리핀으로 보냈다.


하지만 한국은 카펫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풍토다보니 줘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카페트라면 환장을 했던 필리핀 사람에 비교하여 한국사람들은

돈은 없고 영어는 잘못해도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민족으로

각인이 되었다.


그녀는 4살 어린 의사의 강력한 프로포즈를 받아서 결국 사우디 남자와 결혼을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다른 그 어느 나라사람도 '사우디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허락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는 돈이 많으니 자국의 여인들을 뺏기지 않으려고 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사우디 남성 역시 다른 나라 여인과 혼례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자국의 피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사우디 의사와 한국 간호사가 결혼을 하고나니...

사람들이 묻는다. 몇번째 부인이냐고???

그때 그녀는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


나를 뭘로 보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보기에는 한국은 대단하지 않은 나라에 불과했다.


사우디에 문화는 한국과 상당히 다르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은 술과 돼지고기다.

술은 만들수도 없으며, 유통시키거나 먹을 경우 추방된다.


돼지고기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사우디로 반입될 수 없다.

족발과 보쌈을 그렇게 좋아했던 그녀도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친정에서 실험삼아 택배로 골발, 순대를 진공포장해서

국제 택배로 보낸 적이 있었다.


당연히 공항을 통과 못할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통과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친정에서 마구 보내게 해서

어쩌면 사우디 안에서 유일하게 순대와 족발을 마구 (숨어서) 먹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사우디에서는 여성들은 무조건 '히잡'이라는 검은 천을 머리에 써야 한다.

한국 그 여인도 당연히 히잡을 평생 쓰고 산다.

물론 여자들끼리 있을 때는 벗을 수 있다.


남자에게 얼굴을 보여 주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녀의 얼굴을 본 남성은 (신랑 가족중에서)  딱 두명에 불과하다.

시아버지와 남편 ...


시동생들도 형수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녀의 직업이 간호사인데, 병원 직원은 히잡을 쓰고 업무를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천주교 수녀와 조금 닮은 것(조금 개량된 히잡)을 얼굴에 쓴다.


즉, 이마, 머리카락 등은 공개가 안 되지만, 눈-코-입만 보름달 모양으로 공개가 된다.

그녀 이야기에 따르면..

평소에 검은색 히잡을 통해서 시동생 및 시댁 친척 남자들의 얼굴을 봐 왔으며

당연히 얼굴을 알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병원 치료를 위해서 병원에 온다고 했다.


그러면 눈,코,잎이 공개된 간호사 가운을 입은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평소 집에서는 얼굴 전체가 가려진 검은색 히잡을 쓴 모습만 봤으며

실제 얼굴을 못 보았으니, 병원에 와서 얼굴을 모두 보이는 간호사 얼굴을 보고

친척이라는 상상 자체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 입장에서 시동생을 보고, 내가 누구라고 말을 할 필요도 없으니

그냥 모른채하고 치료한다고..

21세기에 참으로 보기 힘든 재밌는 모습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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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이상구 박사를 참으로 좋아했으며, CD로 된 건강 강의를 보면서

참으로 좋아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상구 박사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드리며,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