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1

by 무아연기 posted Dec 0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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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과 심판에 관한 재림교회의 이해 (1)


한국연합회 이단/이설연구위원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교회를 향한 거센 도전과 흔들림이 있을 것에 대하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경고를 받아 왔다. 지금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로 나타나는 대쟁투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하지만 재림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끈질긴 공격과 훼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망의 닻을 진리의 반석 위에 굳건히 내리고 있으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 우리의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

최근에 한국 재림교회는 한동안 한 가족처럼 살아오던 이들이 본 교회가 믿고 가르치는 성경적 교리들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하면서 떠나가는 안타까움을 경험하였다. 진리를 대적하는 이들이 우리의 신조를 곡해하고 있지만 우리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 3:23)과 “더 확실한 예언”(벧후 1:19)으로 그러한 공격을 물리치고 그들의 주장을 반증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1. 재림교회와 엘렌 G. 화잇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가?


재림교회는 바울이 권면한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롬 8:1-2)을 굳게 믿는다. 또한 그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했을 때 그가 가졌던 확신을 우리 재림교인들은 함께 공유하고 있다.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말했고,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셨다. 재림교인들은 이 말씀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이와 똑 같은 선상에서 엘렌 G. 화잇도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분명하게 할 때 우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복음전도, 630, 강조 첨가)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또한 당연히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한편, 이 “구원의 확신”은 믿는 자의 자의적인 감정이나 자기 신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봄”(히 12:2)으로 이르러 오는 것이다. 화잇 여사는 “멸망해 가는 죄인은 … 나는 죄인이지만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바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더 이상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그분은 나의 칭의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 나를 지금 구원하실 것이다, 나는 그분의 약속하신 용서를 지금 받아들인다”(가려 뽑은 기별, 3권, 356)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혹시라도 신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믿음의 실천을 등한히 하고 영적인 성장을 포기한 채 자만과 독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다음과 같은 권면들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화잇 여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 실로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 가운데 따르는 위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대들은 선행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살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착한 행실을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믿으라. 믿기만 하면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믿음과 행함은 병행해야 하며 믿는 일과 행하는 일은 잘 혼합되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3).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존해야 함을 느끼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손을 거두며 ‘내게는 할 일이 없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예수께서 그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속성의 참여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경성하며, 기다리며, 기도하며, 일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98).

“누군가는 말한다. ‘그래, 우리는 아무런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는다. 사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충성하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것은 사망의 길에 서는 일이며, 그대는 진실로 범죄자의 한 사람이 된다.”(믿음과 행함, 71).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신 구원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동시에, 그 구원이 일단 주어지면 자동적으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니므로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넘어질까 조심하며”(고전 10:12),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 “버림이 될까 두려워”(고전 9:27)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라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죄인인 인간은 과거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을 때 이미 구원을 얻었고(롬 8:24), 현재도 그리스도 안에 살아감으로써 구원을 얻고 있으며(고전 15:2), 미래에도 인간이 죄악의 모든 권세와 영향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9). 과거에 받은 구원이 아무리 극적이었고 완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거나 진리에서 떠나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구원의 과정이 이렇게 분명하고도 확실한데,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에 기초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하면서 취하는 태도 가운데 따르는 위험이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3)라고 권면한 화잇 여사를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를 곡해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2.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의 참뜻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다 이루었다”(tetelestai, 요 19:30)와 이와 비슷한 표현인 “(다) 되었다” 또는 “(다) 이루었다”(gegonen 또는 gegonan, 계 16:17; 21:6)가 모두 3회 나온다. 첫 번째 경우(“다 이루었다”)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기 직전에 외치신 것이고, 두 번째 경우(“[다] 되었다”)는 일곱 번째 천사가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을 때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큰 음성이 말씀하신 것이며, 세 번째 경우(“[다] 이루었다”)는 천지와 만물이 새롭게 된 후에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마디의 말씀은 그것이 외쳐진 때와 경우에 따라서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그분이 죄인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어야 했던 사명을 완수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은 그분이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인 죄인을 위하여 죽는 일을 이제 이루었다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신자나 불신자나 심지어는 마귀까지도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선언을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이제는 사람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고, 전도할 필요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중보(中保) 사역과 하늘 성소 봉사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일곱 재앙 끝에 선포된 “(다) 되었다”(계 16:17)는 일곱 번에 걸친 재앙과 “아마겟돈”(계 16:16)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일곱 재앙과 “아마겟돈” 전쟁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들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들인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다 성취되었음을 선포한다.

세 번째로 인간의 구원 역사가 모두 마쳐지고 신천신지가 펼쳐질 때, 다시 한 번 “(다) 이루었도다”(계 21:6)라고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외치신다. 이 선언은 태초에 천지 창조가 끝났을 때 그 위대한 역사(役事)가 완성되었음을 선언한 창세기 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의 메아리이다. 첫 번 창조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라고 한 선언은 두 번째 창조, 즉 재창조에서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다 이루었다.”(계 21:5, 6)라는 선언으로 반향(反響)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 이루었다” 또는 “(다) 되었다”라는 선언에는 각기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것을 완성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의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에 모든 인류와 마귀의 구원까지 다 포함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선언의 취지와 목적을 크게 왜곡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일이다.


3.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 과연 심판은 없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선언만큼 그리스도교의 특징과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한 성경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른바 “대쟁투 총서”라고 일컫는 화잇 여사의 5대 저술의 첫 권(부조와 선지자)의 첫 문장과 마지막 권(각 시대의 대쟁투)의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이다. 그만큼 하나님에게 있어서 “사랑”은 참으로 중요한 속성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문자 그대로 영원하고 무한하며 위대하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이 영원하다고 해서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영원히 조치를 취하지 않는 무원칙한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랑이 무한하다고 해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없이 퍼주기만 하는 무분별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해서 우주에 들어온 죄와 악을 방치하거나 조장할 만큼 무기력한 사랑이 아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 이외에도 다른 중요한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면서(신 23:5; 33:3; 요 3:16; 요일 4:8, 16), 또한 자유의 하나님이시며(레 25:10; 요 8:32; 롬 8:21; 고전 3:17; 갈 5:1, 13), 동시에 그분은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시고(신 32:4; 33:21; 삼하 23:3; 시 37:28; 89:14; 101:1), 신실 또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며(창 19:19; 출 15:13; 만 14:19; 시 6:4; 136:1-26), 무엇보다도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레 11:44-45; 수 24:19; 삼상 6:20; 시 78:41; 사 1:4; 5:16).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14)라고 읊조렸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프로필을 묘사하면서 “은혜와 진리”(요 1:14, 17)가 공존한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은혜”는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고, “진리”는 율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랑과 더불어 공의와 진리와 율법은 하나님의 나라의 법이고 질서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정(正)과 사(邪), 의(義)와 죄(罪) 사이에 판단하시며(창 16:5; 신 32:36; 대상 16:14; 시 35:24; 50:4; 58:11; 72:2; 등등),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선악(善惡) 간에 심판하신다(창 18:25; 삿 11:27; 삼상 2:10; 욥 34:23; 시 7:8; 9:8; 50:6; 전 12:14; 히 10:30; 등등).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성경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반복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거나 죄인을 벌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단정으로서 성도들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악인에 대한 심판과 형벌은 없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다음의 성경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말해야 한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전 3:17).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미 4:3a).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 17:31a).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13).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과 형벌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원칙하고 비도덕적인 존재로 전락시키고, 성경에 수십 번 명시되고 강조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무원칙 또는 자유방임과 방종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칙 있는 사랑이요 하나님 자신께서 희생을 감수하시면서도 지키시는 원칙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하고 무한하고 위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죄인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 때문에 공의롭게 심판하신다.


4. 조사심판은 “치명적 오류”인가?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의 교리는 성경에 없는 것을 재림교회와 화잇 여사가 지어낸 교리가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심판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조사심판”도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사심판”이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지만 그 사상과 내용은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중요한 신학 개념이다.

먼저, 다니엘이 본 계시의 장면을 살펴보자.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 이 이상(異像)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성부 하나님)가 보좌에 앉아서 책들을 펴놓고 심판(재판)하는 권세를 “인자 같은 이”(성자 예수)에게 넘겨주시는 장면을 보여준다(13-14절). 다시 말해서, 앞으로 하늘에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이상이다. 다음의 성경절도 조사하는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4:17-18).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이 성경 본문들에는 심판의 한 과정으로서 조사(照査) 또는 심사(審査)하는 일이 있을 것이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심판의 과정이 예수의 재림 이전에 있게 될 것이므로 이것을 “재림 전 심판”(“pre-Advent judgment”)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심판은 성경에 이미 제시되어 있는 것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적합한 명칭을 붙인 것인데, 성경에 없는 개념을 재림교회가 지어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펴보지도 않고 문자 그대로 덮어놓고 반대하는 행위이며, 이것을 “치명적 오류”라고 일컫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그렇게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단어는 성경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런 신학이 성경에 확실하므로 그 명칭을 사용하는데, 그것을 오류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것을 온당(穩當)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천국은 의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아무런 검사나 확인의 절차 없이 살며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사소한 범죄나 혐의에 대해서도 공정한 원칙에 따라 심리를 거쳐 유죄 또는 무죄를 판정하거든 하물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심판에 조사하는 과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과 개념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짐작으로는 꼭 구원을 받을 것 같았던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심의되어야 하나님의 공의는 확인될 것이며,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도무지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보이던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이 까닭이 밝혀져야 사람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다. 특히, 사탄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공정성에 대하여 트집을 잡고 동료들을 선동했으므로 하나님은 우주 앞에 그 진상을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더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도 “조사심판”은 최후의 심판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이다.

“조사심판”은 개인의 삶에서 흠이나 티를 찾아내어 할 수만 있으면 구원을 못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는 먼지 떨기 식 심의가 아니다. 심판을 주재하는 심판장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구주시요 우리의 “대언자[보혜사]”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요일 2:1)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그 심판은 절대적으로 공정한 심판일 것이다. 하지만 공정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가차 없는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를 믿고 따라온 신자들을 옹호하는 심의요, 그들의 작은 믿음에 지극히 큰 상급인 영생을 확정하는 심판일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관건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을 구주로 믿고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이다(참고 요 3:16; 막 16:16; 행 16:31).

재림교회는 성경에서 확실하게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사상들만을 교리로 받아들이고 진리로 체계화하여 믿고 가르친다. “조사심판”도 그러한 성경적 가르침인 것이 확실하므로 앞으로도 흔들림 없이 견지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짐짓 외면하고, 단지 자신이 세운 가설에 맞지 않거나 표현이 낯설다고 해서 그것을 무작정 거절하는 것은 성경 진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