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암에 걸린 꿈꾸고 취했던 행동과 존재분석적 꿈해석

by 안병선 posted Mar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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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암에 걸린 꿈을 몇번 꾸었는데 나는 그때 마다 비극감을 생생하게 느껴서 그 시기의 
잘못된 내 선택을 교정했다. 나의 예정된 잘못된 선택은 두려움, 욕심, 분노로 인한 것이었는데
비극적인 꿈을 꾸므로서 예민하게 느껴 꿈에서 깨어난 후 잘못을 교정할 수 있었다. 아래 이야기는 꿈꾼후 두려움을 용기로 극복한 예이다.   

1993년 000의원과 함께 하는 단체의 송년회에 참석했는데 모임에 참석하러 갈 때마다 첨예하게 부딪치는 남편의 반대를 미리 겁내고 이 때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밤 어떤 소아과 남자 의사가 암에 걸린 꿈을 꾸었고 잠을 깨어 한숨을 쉬자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물어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은 알지도 못하는 남자 의사가 암에 걸린 꿈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가볍게 대꾸하더니 도로 잠을 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개인의원에서 소아과 환자를 가장 많이 진료하였고 내가 사회적으로 남자처럼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소아과 남자 의사는 내 자신이라고 해석했으며 내가 가고 싶어했던 모임의 송년회에 참석하지 못하면 나는 암에 걸린 것처럼 사회적으로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해석은 남편에게 모임에 참석한 후 알려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이미 그 모임에 참석할 결심을 했고 그 송년회에 참석해서 각자 소개할 차례가 되자 앞으로 나가 위 꿈과 그 즈음에 꾸었던 또다른 꿈이야기를 했다.

"xxx씨와 000의원이 피아노 연주를 했고 조금 있으면 내 차례가 될 판인데 그만 피아노가 고장이 났었다. xxx씨는 건반 한군데가, 000 의원은 두군데가
이상이라는 둥 서로 다른 진단을 내린 꿈이었는데 곧 그 피아노가 고쳐져 내가 연주할 차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인삿말을 듣고 *** 전 과기부 장관과 서울의대 k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며 명함을 주었었다.

존재분석적 꿈해석
메다드 보스라는 스위스 정신과의사가 동양의 도를 많이 깨우쳤던 사람이며 훌륭한 정신과의사였는데 그가 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책제목은 '정신분석과 존재분석 (Psychoanalysis & Daseinsanalysis)'인데 1903년에 태어났던 보스가 1961년과 1962년 사이에 하바드, 예일, 캘리포니아, 워싱턴 대학의 정신과에 가서 많은 강연, 세미나, 토론을 하였는데 청중들이 그 내용을 출판할 것을 권유해 독일어로 쓴 그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책 내용 중 꿈해석에 대한 부분에 프로이드, 융의 해석과 다른 새롭고 유익한 태도가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다음과 같다.

인간존재의 꿈상태를 깨어있을 때의 기준으로 판단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꿈을 정신내부에 있는 이미지나 그림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부당하다. 꿈의 경험을 가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사실의 왜곡이다.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꿈상태이다. 우리는 세계를 향해 깨어있을 때의 행동양식처럼 꿈행동양식으로도 존재한다. 다른 말로 하면 꿈은 비록 행동양식이 다르지만 각성상태와 동등하게 자율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존재분석가는 환자의 꿈세계라는 현상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게 놓아 두고 가설적인 왜곡인 '꿈의 작업'이라는 복잡한 기전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꿈이라는 현상은 항상 뿜어 나오는 그대로이다; 꿈은 정신적인 내용을 드러내고 있지 결코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분석가는 꿈 상태를 인간 존재의 한 자율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환자의 꿈행동을 각성시 세계와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과 꼭같이 다룬다. 즉 그가 환자의 꿈행동과 감각의 양식을 엄격한 '저항 분석'으로 분석한다.

분석의는 꿈을 치료적으로 다룰 때 꿈 세계 내에서 꿈꾸는 사람의 자유로운 관계를 제한하는 불안, 부끄러움, 혐오감이라는 장벽의 필요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한다.

존재분석과 정신분석 경험이 일치하는 바는 인간이 각성시에 인식하지 못했던 (최소한 적절하거나 충분하지 않게) 인간 세계의 영역이 꿈이라는 존재의 빛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꿈이라는 현상에 무한한 가치를 주는 것이며 낡은 정신분석적 꿈 이론이 점점 부적절하게 보인다해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래 몇가지 실제적인 예가 꿈의 존재분석적 이용의 특징을 명확히 해줄 것이다.

1. 28세된 남자가 그의 고향에 있는 동물원에 갔는데 그곳에 특별히 좋고 큰 호랑이와 사자들이 있었다. 그 동물원 감독과 그가 나아가 우리의 무거운 문을 열었다; 그가 들어가 동물들에게 매우 큰 생고기 덩어리를 먹였다. 동물들이 흥분하게 되었다.

그는 동물원 감독이 문을 열어둔 채로 떠나버렸고 단단한 철로 보였던 우리의 가로봉이 철이 아니라 단지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점점 공포로 질리게 되었다. 왜냐면 감독이 도착했을 때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와 얼음 우리가 급속히 녹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빨리 도망쳤으며 숨을 헐떡이다가 깨어났다.

분명히 이것은 아주 흔한 꿈이다. 프로이드는 비슷한 꿈을 융이 나중에 '개관적인' 꿈의 해석이라 부른 방식과 소위 '주관적인' 방식으로 토론했다. 그러나 이 꿈경험에서 우리의 말이 정당한 단 한가지는 안전하게 갇혀 있던 살아 있는 것이 -이 꿈에선 호랑이와 사자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이제 꿈꾼 사람을 뛰쫒아와 그를 파괴하고 잡아먹으려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호랑이와 사자를 그토록 두려워해야만 하는가? 그것들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는가?" 즉시 꿈꾼 사람이 응수했다. "그런 상황에 처해있었다면 당신도 역시 공포에 질렸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분석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연 생명력의 정수가 당신에겐 왜 꼭 위험하고 거친 동물만으로 꿈에 나타날 수 있는가가 실질적인 질문이다. 생명력의 위험하고 공격적인 면에만 당신의 존재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생명력에 대한 당신의 불안일 것이다.

모든 가능한 자연과 생명 현상 중에서 사자와 호랑이만이 당신 꿈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 만이 당신 존재의 개방성을 제한하는 불안에 조응하기 때문이다. 겁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은 꿈에서 애인을 즐겁게 만나 진실된 마음으로 포옹함으로써 자연 생명력의 정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 30세된 남자가 관에 그의 형제가 누워있는 꿈을 꾸었다. 그 형제는 결혼식 날 저녁에 자동차 사고에서 죽었다. 꿈꾼 사람은 그 사고에 다소 관련되었다. 그가 가장 가깝게 느꼈던 사랑하는 형제의 상실에 그는 극도로 슬펐다.

소위 객관적인 꿈해석을 하는 정신분석가들은 아마도 그의 형제가 죽기를 바라는 소망이 터져나온 것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여기서 존재분석가들은 어떻게 그런 가정(추측)이 정당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꿈에선 실제로 형제의 죽음을 바라는 어떤 양상도 없다. 반대로 꿈꾼 사람은 형제의 죽음에 아주 슬퍼하고 있다. 이 슬픔을 공격적인 죽음 소망이 모습을 바꾸어 반대로 나타난 전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독단이다.

이런 환상적인 해석을 환자에게 해주는 것은 치료에 있어서 또한 재앙을 초래하는 실수을 하는 것이다. 이 꿈꾼 사람을 그 형제에 대한 죽음 소망으로 비난하는 것은 완전히 정당화 되지 않는 나쁜 양심의 고통을 불러일으켜 부담을 증가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치료적인 해방과는 반대되는 결과인 정서적인 움츠러듬과 폐쇄가 초래될 것이다.

이 때 분석가에게 저항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분석되어 사라질 저항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충분히 정당한 것이며 정신분석을 모두다 중지하지 않는다해도 정신분석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주관적인 꿈해석에선 형제는 꿈꾼 사람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투사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은 사실상 각성시에 너무 지나친 지적, 합리적, 이기적인 사업생활을 하고 있어서 인간성이 완전히 죽어 없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는 발기불능과 정서적인 비인간화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꿈속의 형제가 단지 정신적인 내용의 투사된 심볼일 뿐이다라는 가정은 모두다 틀리다. 이 남자의 꿈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사랑하는 형제가 결혼식 날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가 이 상실로 깊은 슬픔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존재가 낮게 조율되어 극단에 이를 정도로 폐쇄적이라는 것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꿈상태에서 조차 그는 무모한 사업세계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의 의미에만 그의 존재가 열려있다. 그것도 그가 처음엔 사랑할 수 있었던 가장 가까운 형제에 대해서만 열려있다.

그러므로 치료할 때 처음엔 이 환자의 주의를 이 상태에 돌리게 해야 한다. 다음엔 다음과 같은 합법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당신 존재의 개방성이 심히 제한되어 죽음의 의미만이 꿈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우리는 그에게 물었다. 곧 그 환자는 그가 각성시와 꿈생활에서 순전히 기계적이고 인정이 없는 것이 그 존재의 위축과 관련되었음을 이해했다.

동시에 그는 세계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다른 가능성, 즉 더 넓고 인간적인 방식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환자에게 꿈의 의미에 대한 이 간단한 질문이 도움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형제가 그 환자의 꿈세계에서 다시 살아나 활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