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
그가 그의 작품 '햄릿'에서 햄릿에게 말 하도록 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는 이 대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을까?
뉴스타트에서는 생명파와 사망파, 생각과 사각이라는 영(靈)이 있고 이 영(靈)들의 지도를 받아 선택을 내린 뒤의 "나" 는 참 나와 거짓 나, 진아와 자아, 군자와 소인으로 구별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생명파나 생각의 지도를 받아들이면 "나"는 참 나, 진아, 군자로, 사망파나 사각의 지도를 받으면 거짓 나, 자아, 소인으로 구별된다.
그러면 무엇이 생명파이고 무엇이 사망파인지를 알아야 하겠다. 생명파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고 사망파는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한다. 이를 위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에 적용을 해보면 한결 이해가 쉽겠다. 햄릿의 전체 줄거리를 보면 이 대사는 햄릿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복수를 하느니 차라리 편하게 자살을 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한 말이다. 그리고 이 후에 햄릿의 선택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모두 알고 있다. 복수를 하기로 한 햄릿은 자신은 물론 자신을 사랑하던 오필리아에게도 죽음을 불러들였다.
그럼 만약 햄릿이 복수 대신 자살을 선택하였을 경우는 어떻게 결말이 났을까? 내 예상으로는 햄릿이 자살을 하였다면 오필리아 또한 자살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덴마크의 왕인 형을 살해한 클로디어스(동생)는 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로 부터 희생을 강요하는 폭군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것이 생명파로 인한 선택이고 어떤 것이 사망파로 인한 선택인지를 따져야 한다.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며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했던 항목은 모두 사망파가 던져주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배신으로 침통한 분위기에 둘러 쌓인 햄릿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망파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때 햄릿이 창문을 열고 천연계의 아름다운 풍광이나 창 틀 아래 성벽에 한줌 흙에 의지해 자라는 야생초를 깊이 바라보았다면 그는 생명파가 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고 그 희망으로 제 3의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 뉴스타트를 하는 이들 모두에게도 생명파와 사망파가 전달되고 이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생명파가 나의 선택에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에게 생명이 있으니까. 그러나 햄릿과 같이 사망파가 지배해버린 상태에서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때는 사망파의 지배를 받아 사망파에 의해 선택을 하게 된다. 마음 속으로 '이건 아닌데'하면서도 선택을 하는 "나"를 보게 된다. 그러길 반복하다 보면 마음 속의 작은 외침 '다시 생각해 봐'도 결국에는 들리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망파와 사각의 지배를 받아 거짓 나, 자아, 소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천연계를 보고 진리를 깨우치고 감사를 느끼며 아름다움을 만끽할 때, 그때 마다 마음 속의 작은 외침은 다시 "나"에게 속삭인다. 그때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길 반복하면 다시 "나"에게 속삭이는 작은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나"가 생명파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이후 나의 선택은 생명파의 지도를 받아 참 나, 진아, 군자로 해탈하게 된다.
뉴스타트를 하는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글을 새로이 뉴스타트 식으로 고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선택이 "나"의 삶에 놓여질 디딤돌로서 생명으로 향하는지, 사망으로 향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결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