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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8 06:34

참 하나님, 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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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우주의 창조주가 떨리는 인간의 숨을 쉬며, 시간과 역사 한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으로 서 계신다.

이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는 이 한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복음이 사랑의 역설 안에서 살아날지, 논리의 모순 속에서 무너질지를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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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하나님, 참 인간

– 모순이 아닌 사랑의 역설

(1) 역설을 피하면, 복음의 심장을 잃는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장 난해한 한 문장이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

많은 이들은 이 고백을 듣는 순간 이렇게 반응한다.

“말은 아름답지만… 이건 사실상 ‘논리적 모순’ 아닌가?”

만약 이것이 정말 “모순”이라면, 기독교 신앙 전체는 모래 위에 세운 건물에 불과하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다”(요일 4:8, 16)라고 말할 근거를 잃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그 사랑의 깊이로 알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보다 더 작게, 더 얕게 이해되고 만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이성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요구한다.

“하나님이 진리이시라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언어는 최소한 모순은 아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역설(paradox)”과 “모순(contradiction)”을 구분하지 못하면, 성육신을 오해하게 된다.

빛은 실험 조건에 따라 파동처럼(간섭·회절 같은 연속적 패턴)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조건에서는 입자처럼(에너지가 ‘묶음’으로 검출되는 광자) 보이기도 한다고 물리학은 말한다. 우리는 이것이 한 번에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 직관적으로 “양립 불가”처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파동”이라는 말 속에 “따라서 입자일 수 없다”라는 논리적 부정이 들어 있지 않고, “입자(광자)”라는 말 속에도 “따라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없다”라는 논리적 부정이 들어 있지 않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논리적 모순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역설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결혼한 독신자”, “네모난 원”은 어떤가?

“독신자”라는 말 속에는 이미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 들어 있고,

“결혼했다”는 말 속에는 “더 이상 독신이 아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다.

 “원”이라는 말 속에는 “경계가 곡선이고 꼭짓점이 없다”는 뜻이 들어 있고,

“네모”라는 말 속에는 “경계가 네 개의 직선이고 꼭짓점이 네 개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이 정의들을 한 사람, 한 도형에 동시에 적용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결혼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결혼했다.”

“꼭짓점이 없으면서 동시에 꼭짓점이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아니라, 의미가 서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진술 — 곧 A이면서 동시에 not-A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모순이다.

질문은 이제 이렇게 바뀐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다”라는 고백은

빛의 파동-입자 이중성 같은 역설인가,

아니면 결혼한 독신자 같은 모순인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말하게 된다.

(2) “참 하나님, 참 인간”

– 모순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 속에 “결코 인간일 수 없다”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또 “인간”이라는 말의 뜻 속에 “결코 하나님일 수 없다”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면,

성육신 교리는 곧바로 “결혼한 독신자”가 된다. 그때 그 고백은 더 이상 신비로운 진리가 아니라, 비문(非文)이고, 의미 없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어느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을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안다.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배워야 하고, 모른다는 것을 경험하는 존재.

그러나 “하나님”이란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행하신 것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정의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하신 일을 증언하는 길을 택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 14).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이 되셨다고 선포하는 순간, 이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그 순간 거꾸로 자기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이 되셨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그래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하신 행동이 하나님을 정의한다.”

그 행동의 정점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참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십자가는 그저 한 인간의 비극일 뿐이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심장이다. 그리고 성육신은 바로 이 십자가를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결단이다.

(3) 예수의 참된 인성

– “특수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

성육신 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이것이다.

“어차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니,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지 사실은 항상 전지·전능·편재하셨겠지.”

이 생각이 옳다면, 예수의 생애는 일종의 “신이 인간 연기를 한 연극”이 된다.

그는 배고픔을 느끼는 척 했고, 피곤한 척 잤으며, 유혹을 받는 척 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졌다(눅 2:52).

→ 자라났다는 말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는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5:8-9; 2:10).

→ “배웠다”는 것은, 처음에는 그 상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이렇게 기도하신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 이것이 진심이라면, 그는 정말로 다른 길이 가능한지 “모른 상태”에서 기도하신 것이다.

예수는 “그 날과 그 때는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고 말씀하신다.

→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셨다.

이 모든 증언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예수는 실제로 우리와 똑같이

배워야 하고, 자라야 하고, 물어봐야 하고,

모르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참된 인간으로 사셨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예수께서 진짜 인간으로 사셨다면, 그는 그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편재를 어떻게 가지셨단 말인가?”

전통적인 답변 중 하나는 이른바 “두 마음(이중 의식)”의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는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아는 신적 의식,

다른 하나는 제한된 인간 의식.

이 설명은 일견 안전해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심각한 난점을 가진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상상해야 한다.

“마리아의 태 속에서 한 점의 수정란 상태로 있을 때에도

예수는 동시에 온 우주의 모든 분자와 별과 역사를

낱낱이 알고 계셨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일까,

아니면 “결혼한 독신자” 같은 진짜 모순일까?

만약 “하나님”이라는 말의 뜻 속에

“항상 실제로 전지·전능·편재를 행사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넣고,

또 “인간”이라는 말의 뜻 속에 “실제로 제한된 지식·능력·공간성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정의를 넣는다면,

그 두 정의를 한 인격에게 동시에 적용하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예수는 한 인격 안에서 동시에 전지하면서 전지하지 않고,

전능하면서 전능하지 않으며,

무한하면서 유한하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가 아니라,

개념이 서로를 부정하는 진술 — 곧 A이면서 동시에 not-A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참고(기적에 대하여):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기적은 “숨겨진 신성이 새어 나온 자동 실행”이라기보다, 성령과의 온전한 연합 안에서 자신을 비워 드린 한 인간의 순종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로 제시된다(눅 4:1, 14; 요 5:19).

(4) 비우심(케노시스)

– 하나님이 자기 능력을 내려놓으셨다

빌립보서 2장은 성육신을 설명하는 가장 놀라운 본문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케노시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재구성).

여기서 핵심 동사는 “비우다”이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자신을 비우고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구체화된다.

“예수는 ‘자신을 비우셨다’고 할 때

무엇을 비우신 것인가?”

만약 예수가 여전히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를 그대로 유지하셨다면,

우리는 정직하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비우셨는가?”

여기서 제시되는 한 가지 일관된 이해는 이렇다.

예수는 하나님으로서 가지셨던

전지·전능·편재의 ‘사용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으셨다.

다시 말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여전히 그분의 것이지만,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그 능력에 기대지 않기로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을 자유도 가지신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이 자기 비움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비슷한 일을 하셨다.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인간과 천사)를 창조하신 순간,

그는 자신의 전능의 행사를 스스로 제한하셨다.

누군가를 진짜로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려면,

그가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위험도 함께 허용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첫 번째 “케노시스”이다.

성육신에서 일어난 일은 이 논리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진짜로 사랑하시기에,

단지 “전능의 사용”을 제한한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편재의 행사 자체를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헌신하셨다.

이 자기 비움의 끝이 십자가이다.



(5) 그럼에도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

– 도대체 무엇이 남았는가

여기서 결정적 질문이 등장한다.

“만약 예수가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를 내려놓았다면,

그는 어떻게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정의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해왔다.

모든 것을 아시는 분(전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전능)

어디에나 계시는 분(편재)

이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지이시다 =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 하나님의 본질이다.”

성경이 “하나님은 ○○이시다”라는 형태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여기서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다.

요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요일 3:16).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붙들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적 자기 희생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편재는

사랑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 자체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왜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인지가 선명해진다.

예수는 인간이 되심으로

전지·전능·편재의 행사는 내려놓으셨다.

그러나 단 하나,

자기 자신을 끝까지 내어주는 사랑만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완벽하게 구현하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 사랑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어둠을 통과하면서도,

오히려 원수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사랑.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가 전능의 행사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본다.

(6) 십자가가 재정의하는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가리켜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스캔달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스캔들이었다.

그들은 전능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 믿었다.

그 메시아는 로마를 무너뜨리고,

원수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맞이한 “메시아”

원수의 손에 붙잡혀 조롱과 채찍과 십자가를 당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건 절대 하나님일 리 없어!”

라고 외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들은 신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apatheia),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고통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

완전한 존재로 상상했다.

그런데 십자가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도 안 되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들에게

“이건 신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

라고 여겨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한다.

그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무엇이 바뀐 것인가?

“능력”과 “지혜”에 대한 정의가 바뀐 것이다.

능력은 더 이상 “모든 것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 능력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죄와 악과 사망을 꿰뚫어 이기는 힘이다.

지혜는 더 이상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 지혜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아는 지식,

어떻게 타락한 피조물의 자유를 짓밟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선을 이룰 것인가를 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길이다.

십자가는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억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품고,

사랑으로 결국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데이터를 다 감지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넘어,

각 사람의 자유와 상처와 역사를 고려하면서도

최선의 사랑의 길을 창조해 나가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사랑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이 재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옛 철학의 전능·전지 개념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필연적으로

“논리적 모순”의 덫에 걸려버린다.

(7) “신비”라는 이름의 모순들

–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

성육신은 역설이다. 우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역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다.

그러나 모든 신학적 난제가 이렇게 건강한 역설인 것은 아니다.

때로 “신비”라는 단어가

실제로는 모순인 주장을 덮는 용도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천사의 행위를

영원 전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한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그러나 여기서 말의 뜻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자유”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그 선택이 미리 필연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철저한 예정”이라는 말 속에는

“그 선택이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면,

“완전히 예정된 선택이면서 동시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은 결국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반드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이 아니라,

의미가 서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순 — 곧 “결혼한 독신자”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빛의 이중성 같은 신비로운 역설이 아니라,

정직하게 말하면 개념의 충돌,

곧 모순이다.

성경은 수많은 신비를 말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신비는

논리를 파괴하는 신비가 아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의 깊이와

하나님의 길의 높음을 가리키는 신비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기되는 여러 신학적 주장 앞에서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역설인가,

아니면 개념상 서로를 파괴하는 모순인가?”

성육신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분명한 토대 위에 선 역설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그래도 자유다”라고 우기는 예정론은,

그 사랑의 토대를 잃어버린 채

논리의 언어만 흉내 내는 모순일 수 있다.

(8) 성육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을 처음부터 다시 쓰기

결국 성육신 교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모든 전제,

모든 개념,

모든 철학적 정의를

예수의 삶과 십자가 아래에 두고

처음부터 다시 써라.”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철학적 최고존재로 그려왔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고통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과 통제를 무엇보다 우선하는 존재.

그 후에 성육신과 십자가를

그 틀 안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 결과, 수많은 “가짜 역설”들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전지이며 비전지인 예수

동시에 전능이며 비전능인 예수

동시에 예정되고 자유로운 인간

동시에 태어났으며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

동시에 고통을 겪으시며 고통을 겪지 않으시는 분

동시에 진짜로 죽으시며 사실상 아무것도 잃지 않으신 하나님...

이 가운데에는 우리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진정한 역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그것이 역설이라는 뜻은 아니다.

역설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의 토대 위에 설 때에만 역설이다.

그 토대를 잃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라 개념이 서로를 무너뜨리는 모순이 된다.

그래서 이 중 일부는,

성육신과 십자가를 이미 정해 놓은 신 개념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가 생겨난

모순의 그늘일 뿐이다.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안한다.

먼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본다.

그분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워가고,

눈물을 흘리고, 떨며 기도하고,

결국 십자가에서 원수를 위해 죽으시는 모습을

하나님 자기 계시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이시다.

다른 모든 속성은 이 사랑의 표현 방식일 뿐이다.”

이때 비로소 성육신은 우리에게

단지 어렵고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복음의 심장이 된다.

하나님은 멀리서 우리의 고통을 관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속으로 몸을 던지신 분.

인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가

거기서부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분.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음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분.

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떤 어둠 속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울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여기에도 함께 계신다.”

이 고백이 바로

성육신 교리가 우리 삶 속에서 맺는 열매이다.

(9) 결론

– 십자가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성육신은 하나의 교리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다.

“나는 너희를 멀리서 지켜보는 신이 아니라,

너희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의 상처를 밖에서 분석하는 신이 아니라,

너희의 상처를 내 몸으로 받는 하나님이다.

나는 권력으로 너희를 휘어잡는 신이 아니라,

사랑으로 너희를 부르며 기다리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전능자를 믿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 내어주신

살아계신 사랑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성육신을 고백하는 모든 교회는

언젠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다른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니다.

바로 그 예수의 사랑이

하나님의 전부이다.”

이 고백을 붙드는 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라는 역설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논리적 함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성과 영혼을 동시에 깨우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혜와 능력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전능, 전지, 예정, 심판, 지옥, 구원…

그 모든 주제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얼굴 아래에서

처음부터 새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성육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그러면 위를 올려다보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한 인간의 얼굴을 보라.

그 얼굴에 새겨진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진짜 의미이다.”

이 고백이 심장 깊숙이 내려앉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하나님을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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