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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 22:1)


“나의 하나님이여…”“어찌하여…”가 한 호흡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대개 둘 중 하나만 허용해야 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찌하여”를 삼켜야 하고,
“어찌하여”를 묻기 시작하면 더 이상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시 22편과 겟세마네, 그리고 골고다는
이 긴장을 지운 것이 아니라, 그대로 끌어안고
십자가 한가운데에 못박았습니다.

이 글은 흔들리면서도 떠나지 않는 믿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 길을 조용히 따라가 보자는 초대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
: 흔들리면서도 떠나지 않는 믿음의 길
 

(1) “의심이 없는 믿음”이라는 위험한 신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배워 왔습니다.
 
“진짜 믿음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믿음이 약한 것이다.”
 
그래서 현실이 무너질 때―병실에서, 장례식장에서, 관계의 파탄 앞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공허와 우울 속에서―우리는 두 번 무너집니다.
 
한 번은 현실 때문에, 그리고 또 한 번은 그 현실 앞에서 흔들리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두렵고 혼란스러운 걸 보니, 나는 믿음이 없는가 보다. 하나님이 나를 실망스럽게 보시겠지…”
 
그러나 성경의 중심에 서 계신 예수님의 길은, 이 ‘강철 같은 믿음’의 이미지를 조용하게 결정적으로 깨뜨립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도 얼마나 깊이 흔들리셨는지, 또 동시에 그 흔들림 속에서도 어떻게 끝까지 아버지를 붙드셨는지를 성경은 숨김없이 보여 줍니다.
 
우리가 지금 묻고 싶은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완전했다면, 왜 그렇게 절규하셔야 했는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복음이 들려주는 믿음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겟세마네: 완전한 믿음이 떨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마 26:42)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완전한 믿음을 가지신 분이, “이 계획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진지하게 묻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당연한 인간적 약함” 정도로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내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도다” (막 14:34)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4)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흔들리지 않는 영웅”이 아니라, 잔을 피하고 싶을 만큼 두렵고, 숨이 막힐 만큼 고통스러운 참 인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분을 “믿음이 부족했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도리어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5:8-9)고 증언합니다. 왜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마주합니다.
 
완전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없으셔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께 숨김없이 나아가셨기 때문에 위대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밤에 겉으로는 담대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 저는 아무 갈등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완벽히 평안합니다.”라고 말하셨다면, 그것이 진짜 믿음일까요?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피 흘리며 버티는 믿음, 떨리는 몸으로 엎드려 “아버지, 이 길 말고는 없습니까?”라고 묻는 믿음입니다.
 
그 씨름 자체가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겟세마네에서 이미 분명해집니다.
 
“믿음의 진정한 척도는 ‘얼마나 안 흔들리느냐’가 아니라, ‘흔들릴 때 어디로 나아가느냐’입니다.”
 
예수님은 그 깊은 흔들림 속에서도, 여전히 아버지께 나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겟세마네의 기도는 완전한 믿음이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고통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믿음임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의 씨름은, 십자가 위에서 더 깊은 차원으로 이어집니다.
 

(3) 십자가 위의 “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어두운 한 문장을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이것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절규 속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비밀을 압축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 (고후 5:21)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것” (갈 3:13)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려짐을 자신의 몸과 영혼 깊숙이 짊어지는 순간, 그분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이신 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진 자”의 경험을 떠안으십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질문을 던지는 메시아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만들고 싶어 하는 ‘완벽하게 평정심 있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겉으로는 아무 질문도, 아무 동요도 드러내지 않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과도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은 의심이 1도 없어야 한다. 질문이 생기면 믿음이 약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모순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그 순간 흔들렸고, 따라서 예수님은 완전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혹은, 그 절규는 진짜가 아니라 “연기”였고, 실제로는 아무 당혹감도 느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둘 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죄가 없으신 이”(히 4:15)로 선포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죄 없으시고 끝까지 순종하신 분으로 
고백해왔으며, 교회는 그분의 삶을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본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믿음이 무너졌으니, 그분이 죄를 지셨다.”
 
그러므로 남는 결론은 하나입니다.
 
믿음과 질문, 믿음과 ‘왜’라는 절규는 서로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가장 깊은 자리에서 서로를 안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라고 부르짖으면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부정하는 자의 “왜”가 아니라, 관계를 붙드는 자의 “왜”입니다.
 
이 절규는 관계를 끊어 버리는 외침이 아니라, 끊어지는 것 같은 관계 속에서도 끝까지 붙드는 외침입니다.
 
바로 여기서, 완전한 믿음과 깊은 어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4) 완전한 믿음의 정의: 확실성보다 진정성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다시 써야 합니다.
 
만일 믿음을 “심리적 확신이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느냐” 로 정의한다면,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를 외치신 예수님은 우리의 정의 안에서 ‘믿음이 부족한 분’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부정하고, 교회의 오랜 신앙고백과 충돌하며, 무엇보다 십자가의 깊이를 얕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은 그와 다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 9:24) 
“어찌하여 잠잠하십니까?”라고 외치는 시편의 수많은 탄식들(시 13, 22, 88편 등)
 
이 기도들은 모두 질문과 믿음이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의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믿음은 의심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심과 혼란까지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가져가는 관계의 진정성이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갈망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분이 이 질문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담고 겉으로만 “조용히, 의연한 척” 하셨다면, 우리는 더 경건해 보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절반만 드러낸 순종, 감정을 숨긴 채 겉모습만 지킨 경건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답만 말하는 아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는 아들”로서 계십니다.
 
바로 그 진정성이 그분의 믿음을 가장 온전하게 만듭니다.
 
완전한 믿음이란, “질문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질문을 품은 채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숨김 없이 살아내는 태도입니다.
 

(5) 우리의 싸움: 흔들리면서도 붙드는 믿음
 
이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병상에서, 수술실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자리에서, 믿었던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도무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실패와 상실의 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렇게 느낍니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정말 선하신 분이 맞습니까? 제 기도를 듣고 계신 것입니까?”
 
바로 그 순간, 옛 신화가 귓가에 속삭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너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 의심을 빨리 밀어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님께 가져가기보다 질문을 하나님에게서 숨기려 합니다.
 
기도 시간에는 ‘예쁜 말’만 골라서 올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더 경건한 것처럼 느끼며, 내면의 혼란은 스스로에게조차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겟세마네와 골고다는 우리를 다시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질문을 숨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감정을 없애는 힘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토로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믿음은 의심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끈질김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것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이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을 안고 엎드리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이해되지도 않고, 설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한 마음 그대로 다른 곳이 아니라, 당신께 가지고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겟세마네와 골고다가 보여 준 믿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의심이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억누르며 “나는 괜찮다”고 연기하는 일도, 반대로, 의심이 생겼으니 하나님을 떠나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길은, 의심과 고통을 가지고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며 하나님께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길입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이 “깨끗하고 예쁜 모양”은 잃겠지만, 그 대신 진짜 관계의 깊이를 얻을 것입니다.
 

(6) 십자가에서 드러난 믿음의 길
 
겟세마네의 기도와 십자가 위의 절규를 함께 바라볼 때,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믿음은 흔들림의 부재가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끈질김이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편이 아니라, 믿음이 품고 씨름해야 할 정직한 질문이다.
 
완전한 믿음은 심리적 확실성의 극대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성을 끝까지 지키는 태도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메시아를 ‘더 경건해 보이는 메시아’로 상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아는 우리의 현실, 우리의 눈물, 우리의 질문을 진심으로 품어 주지 못하는 메시아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대신하여 두려워하시고, 우리의 어두운 “왜?”를 대신하여 절규하시고, 우리의 혼란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을 대신하여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질문과 눈물을 그분께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겟세마네와 골고다는 이렇게 말해 줍니다.
 
“너의 믿음은, 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물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때 오히려 더 깊어진다.”
 
“너의 믿음은, 질문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품은 채로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오히려 더 순전해진다.”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믿음은 완전한 정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피 흘리는 믿음 때문에, 우리의 떨리는 믿음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때로 너무 흔들립니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주님께 가져오는 이 길 자체가 믿음의 길임을 십자가를 통해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도우사,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의심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끝까지 주님께 매달리는 믿음을 살게 하소서.”
 
이것이,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복음의 믿음, 십자가의 믿음, 완전한 믿음의 길일 것입니다.
 
  • ?
    벚꽃향기 2026.01.15 23:3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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