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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없어도, 하나님은 오셨을 것이다




0. 성육신을 다시 묻는 이유

– ‘구조 작전’인가, 창세 전부터 준비된 혼인 언약인가


성육신을 말할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거의 자동으로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죄와 사망과 악한 영들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이끄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분명히 ‘구조 작전’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 누구도 이 구원의 실재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육신을 오직 “죄 때문에 가동된 비상 계획(Plan B)”으로만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복음의 스케일은 급격히 축소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원래는 하늘에서만 영광을 누리며 머물고 싶어 하셨는데, 인간이 큰 사고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육신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원한 꿈의 정점이 아니라, 죄 처리라는 ‘문제 해결’에 예속된 임시 조치처럼 보입니다.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성육신은 정말 ‘Plan B’였는가? 아니면 죄가 있든 없든 창세 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혼인 언약의 중심이었는가?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속죄는 이 영원한 계획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더 작게 만들려는 오해를 걷어내고, 성육신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마음의 크기를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1. 성육신을 ‘비상 구조 작전’으로 만드는 오해


1-1.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오신 하나님”이라는 그림


첫 번째 오해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하늘에만 계시려 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원 계획을 가동하셨다. 성육신은 이 비상 구조 작전의 핵심이다.”


이 이해에 따르면 성육신은 철저히 죄에 의해 촉발된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가 없었다면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실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실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림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핵심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점은 조용히 복음의 중심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한 함정을 품고 있습니다.



1-2. 하나님의 꿈을 축소시키는 ‘비상 계획’ 이해


이 ‘비상 계획’ 이해는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꿈을 축소시킵니다. 마치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우리와 거리를 둔 채 하늘의 평안과 영광만 누리시는 것”이었고, 인간이 죄를 짓는 바람에 원래 계획이 틀어져서, 어쩔 수 없이 구조 작전으로서 성육신이 추가되었다는 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셨던 영원한 열망”보다 “죄를 처리해야 하는 긴급한 문제”가 더 크게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연합’이 아니라, ‘사고 수습을 위한 고통스러운 출동’처럼 이해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가장 바라신 일—곧 우리와 하나 되심—은 중심에서 밀려나고, 성육신은 마치 죄가 없었더라면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불가피한 수습’ 정도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먼 하늘’에만 머물고 싶어 하신 분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우리와 연합하시기를 열망하신 분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중요한 진리를 붙잡았다고 생각하면서, 또 다른 방향의 오해로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모든 것이 플랜 A였다”는 오해 – 죄까지 예정된 세계관


2-1. “원래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되었다”는 진리의 반쪽 이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앞의 오해와는 반대로 중요한 진리를 붙잡고 출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엡 1장). 그러므로 성육신은 결코 

‘Plan B’가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님이 품으신 ‘Plan A’였다는 주장입니다.


여기까지는 옳은 방향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중요한 구별 하나를 놓칩니다. “성육신 그 자체”“타락 이후 성육신이 갖게 된 속죄적 의미”를 구별하지 않고 둘을 한 덩어리로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육신이 처음부터 계획된 사건이라면 그 안에서 이루어질 속죄와 고난, 그리고 그것을 초래한 죄와 반역 또한 처음부터 다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2-2. 죄와 반역까지 ‘원래 계획’으로 만들 때 생기는 문제


이때 성육신과 십자가는 단지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죄와 반역 자체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한 ‘시나리오’의 일부가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타락, 악한 영들의 반역, 십자가라는 극단적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대로 되라고 미리 짜 놓으신 플랜 A”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일종의 ‘세부 예정론’입니다. 모든 사건, 심지어 죄와 반역까지도 하나님이 직접 세부적으로 예정해 놓으셨다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낳는 신학적·윤리적 어려움은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은 선하신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직접 죄와 반역을 계획하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죄는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라고 짜 놓은 역할’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의 양심과 이성이 동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복음을 축소시키지도 않고, 죄를 예정으로 만들지도 않는 길—그러나 성경의 증언을 가장 넓게 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3. 성육신과 속죄: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두 차원


3-1. “중간 길” – 성육신은 영원한 계획, 고난은 반역 이후의 필요


여기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육신 그 자체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품으신 영원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성육신이 ‘고난과 속죄의 사건’이 된 것은 인간과 천사들의 반역 이후에 생겨난 추가적 차원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계획 자체는 창세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이 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다”는 속죄적 차원은 죄와 반역이 실제로 발생했기 때문에 그 안에 덧입혀진 것입니다. 이 구별은 복음의 크기를 지키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지 않는 길로 우리를 이끕니다.



3-2. 죄는 결코 “필연”이 아니다 – 죄의 정의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것”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진술이 하나 필요합니다. 죄는 결코 ‘필연’이 아닙니다. 죄는 정의상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죄를 “필연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사건”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사실상 죄를 하나님의 선한 뜻의 일부로 바꾸어 버리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죄는 불순종이며, 죄는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는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순은 복음을 더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을 흐리게 합니다.



3-3. “고난의 성육신”은 우발적이지만, “성육신 자체”는 영원한 계획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악을 이기고, 권세와 악한 영들을 무너뜨리며, 우리의 죄의 결과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돌려보내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를 통과하셔야 했던 것은 분명 우리의 반역 때문에 ‘필요해진’ 사건입니다. 이 고난과 속죄의 차원은 죄가 없었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차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육신 자체가 처음부터 없던 계획이었다”거나 “오직 반역 이후에 급하게 도입된 비상 조치였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육신이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니 그 안에서 이루어질 십자가와 죄와 반역도 처음부터 다 미리 짜인 각본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성육신은 영원한 계획이고, 고난의 성육신·속죄적 성육신은 반역 이후의 우발적 필요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일이, 복음을 더 깊고 더 맑게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4. “죄가 없어도 성육신은 있었을 것이다”라는 고백


4-1. 교회 역사 안의 통찰


교회 역사 속에서 여러 신학자들은 이렇게 고백해 왔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은 결국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결합시키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단지 ‘죄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존재’로 놔두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의 연합, 혼인, 친밀한 교제에 참여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은 결국 우리 안에 오시고, 우리를 당신 안으로 끌어들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을 것입니다. 성육신은 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품으신 궁극적 사랑의 형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은 ‘사후 대책’으로 축소될 수 없는 사랑의 목적을 품고 있습니다.



4-2. 창세 전부터 예정된 “그리스도 안의 인류”


성경은 반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중립적인 상태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죄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목적을 가진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언젠가 내가 인간이 되어 그들과 한 몸을 이룰 것이다”라는 계획 속에서 우리를 설계하셨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성육신을 향해 열린 존재’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붙잡을 때, 성육신은 더 이상 ‘어쩔 수 없이 내려오신 하나님’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의 깊은 의지로 드러납니다.




5. 성육신은 혼인이다 – 하나님과 인류의 결혼


5-1. “구애”와 “혼인” – 점진적으로 성숙해지는 관계


이제 여기서 중요한 비유 하나가 등장합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과 인류의 혼인이다.” 그렇다면 혼인에는 무엇이 선행될까요? 구애(연애, 약혼)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을 키우며, 서로에게 헌신을 약속하는 과정이 필요하듯,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성육신이라는 ‘혼인’을 앞두고 오랜 시간에 걸친 ‘관계의 성숙’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과 제사와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단지 “율법 시대”라는 하나의 종교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에게 구애하시는 역사—혼인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연애의 역사’였습니다. 성육신은 이 긴 구애의 역사를 통과한 후 마침내 도래하는 ‘결혼식 그 자체’입니다.



5-2. 인류를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교육 과정


하나님은 독재자로서 “내가 하나님이다. 당장 무릎 꿇어라”라고 강압적으로 다가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시대와 문화를 따라가며, 우리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고려하시면서,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 다가가고, 상처와 두려움을 고려하면서, 신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며 자신을 열어 가는 연인과도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한 집에 사는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립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혼인은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실재의 형식입니다.



6. 창조의 목적: 아름다운 혼인을 위한 세계


6-1. “세계를 만든 이유” – 혼인을 위한 집 준비


이제 질문을 한 번 바꿔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물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이 관점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와의 혼인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집을 지을 때 사람은 먼저 결혼과 가정을 꿈꾸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집, 자녀가 뛰노는 공간, 함께 식사하고 웃고 울 수 있는 장소를 마음에 품고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류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혼인,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인간이 참여하는 삶을 꿈꾸시며 이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세상은 단지 ‘시험장’이나 ‘심판 대기실’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혼인을 위해 준비된 집입니다.



6-2. 반역과 타락 – 혼인 앞에 던져진 비극적 방해물


그러나 이 집 안에서 천사들의 반역과 인간의 타락이 일어났습니다. 집 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폭력이 들어오고, 사랑의 관계를 겨냥한 파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서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애초 계획을 포기하고 이 집과 혼인을 모두 철수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집과 혼인을 끝까지 이루어낼 것인가?”


복음은 하나님이 주저 없이 두 번째 길을 택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는 이 집을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바로 이 결단의 구체적인 형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조 작전’이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고 수습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맹세가 실제 역사 속에서 몸이 된 사건입니다.




7. 한 번의 성육신, 두 가지 승리 – 혼인 완성과 악의 패배


7-1. “두 마리 새를 한 번에” – 혼인과 전쟁이 만나는 자리


하나님은 인간과 천사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한한 지혜로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동일한 한 길 안에서, 혼인의 완성과 악의 패배를 함께 이루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첫째,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혼인이 실제로 성취됩니다.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본성을 입고, 우리의 역사와 고통과 죽음을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둘째, 바로 그 동일한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악한 영들, 사망의 권세, 죄가 우리 위에 쥐고 있던 정죄의 힘이 무너집니다. 하나님과의 혼인을 가로막던 모든 권세가 무장 해제됩니다. 


이 한 번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혼인을 완성하시고, 동시에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7-2. 단지 “문제 해결”이 아닌, “원래 꿈의 완성”


이렇게 볼 때 성육신과 십자가는 단지 “문제 해결을 위한 응급조치”가 아니라, 처음부터 품으신 혼인의 꿈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완성되는 자리입니다.


죄가 없었더라도, 성육신은 여전히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사랑의 혼인, 삼위 하나님의 생명에 인간이 참여하는 사건으로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반역이 실제로 발생했기 때문에 성육신은 그 안에 속죄, 전쟁, 승리, 해방이라는 차원을 함께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추가된 차원은 원래의 꿈을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악이 던져놓은 비극 안에서조차 “결국 나의 사랑의 혼인을 더 깊고 더 강렬한 영광으로 드러내겠다”는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악이 승리한 장면이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사랑으로 싸워 이긴 자리입니다.




8. 성육신의 목표: 다시 세워진 “공동 통치자”로의 회복


8-1. 혼인의 열매 – 함께 다스리는 동반자로의 부르심


십자가가 “사랑이 끝까지 사랑으로 싸워 이긴 자리”라면, 그 승리의 열매는 단지 죄책을 덜어내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으로 이루신 일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린다”는 놀라운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창조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땅을 돌보고 생명체들을 가꾸며, 창조 세계를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와 반역은 이 소명을 왜곡하여, 돌봄의 통치를 자기 중심의 지배로 뒤틀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성육신을 통해 이 소명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성령 안에서 새 창조의 일꾼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와 함께 다스릴 공동 통치자로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혼인은 사명 없는 친밀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 책임지는 동행으로 우리를 세웁니다.



8-2.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연합된 동행자”


따라서 성육신의 복음은 우리를 단지 “간신히 용서받은 죄인”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한 존재,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동반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멀리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 같은 죄인을 겨우 참아주시는 분” 정도로만 그분을 이해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한 몸이 되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원한 사랑과 사명에 참여한다”는 자리로 초대받습니다. 


용서는 관계의 문을 여는 출발점이고, 연합은 그 관계가 향하는 목적이며, 그 연합은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는 실제 능력입니다.




9.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르심 – 성육신의 복음을 산다는 것


9-1.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성육신을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동된 비상 구조 작전”으로만 이해하는가? 아니면 성육신을 “창세 전부터 준비된 혼인 언약의 절정”으로, “죄와 반역마저 껴안고 승리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로 보는가?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달라집니다. 어떤 그림에서는 하나님이 본심은 아니었지만 사고 수습 때문에 억지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다른 그림에서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와 하나 되기를 갈망하시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혼인을 포기하지 않으신 신랑이십니다. 후자의 그림이 바로 성육신의 복음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볼 때, 두려움보다 신뢰가, 의심보다 사랑의 확신이 우리 안에 자라기 시작합니다.



9-2. 자기 이해의 변화 – 나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도 바뀌어야 합니다. 나는 단지 “어떻게든 겨우 용서받은 죄인”인가? 아니면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고, 혼인을 위해 준비된 신부”인가?


성육신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우연히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다. 너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았고, 그분과 연합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다. 죄와 반역이 이 계획을 망치지 못했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그 모든 어둠을 껴안고 더 깊은 빛으로 드러났다.”


이때 회개는 더 이상 “공포 속에서 벌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인간이 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나와 혼인하기를 포기하지 않으신 분 앞에서 뒤늦게 깨어난 사랑의 응답, 그리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자유의 선택”이 됩니다. 회개는 사랑을 향해 돌아서는 길이며, 성령 안에서 가능한 새 출발입니다.



9-3. 세상을 향한 우리의 존재 방식


마지막으로 성육신의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받는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기꺼이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의 연약함을 짊어지는 사랑으로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폭력으로가 아니라 자기비움과 십자가 사랑으로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권력과 강압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 연대와 용서로 세상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주님의 몸으로서 세상 한가운데서 이렇게 말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너와 하나 되기를 원하셨다.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사랑 때문에 그분은 인간이 되셨고,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하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으로 너를 초대하고 계신다.”




맺음말 – 성육신, 사랑의 혼인으로 다시 읽기


성육신은 단순히 “죄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 작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세 전부터 품으신 하나님의 혼인 언약의 절정이며, 죄와 반역이 없었다 하더라도 일어났을, 그러나 죄와 반역 때문에 십자가와 속죄의 깊이를 함께 품게 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성육신 안에서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시며, 죄와 악은 하나님의 계획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끝까지 싸워 이기신 대상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단지 “간신히 살려진 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함께 다스릴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의 하나님 이해를 바꾸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시선을 새롭게 하며, 세상 한가운데서 성육신의 사랑을 몸으로 살아내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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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2026.01.27 05:03

    (요한계시록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이 말은 하나님이 잠깐 구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히 살러 오신 분임을 선언합니다.
    성육신은 ‘사후 대책’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품으신 동거의 꿈, 혼인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날의 복음은 이것입니다.

    “이제, 나는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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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5 딤후3:5능력=생명 생기평강아! 2026.01.24 1
4534 딤후3:5이런 자"들"에게서=무리로 독재 생기평강아! 2026.01.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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