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은 하나님-부재, 가장 완전한 사랑
1. 십자가의 질문: “정말로 버려지신 하나님인가?”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두려운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한 문장은 단순한 고통의 비명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심장부를 겨누는 질문입니다.
정말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셨는가? 만약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은 깨진 것인가? 그러나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경험이 가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교리적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십자가가 무엇을 계시하는지를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사실은 버림받은 것처럼 연기하신 것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고통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짜 마음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일종의 ‘극장’이 되어버립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실제로 하나님 부재의 심연, 지옥과 같은 하나님-부재를 경험하셨다고 말하면, 어떤 이들은 이렇게 우려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이 잠시라도 깨진 것 아닌가? 하나님은 더 이상 변함없는 사랑이 아닌가?” 바로 이 긴장 속에서, 우리는 “경험으로는 깨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 자체는 결코 깨지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게 됩니다.
2. 죄의 저주와 하나님-부재의 심연
성경은 죄의 결과를 단순히 ‘형벌 점수’나 ‘법정 판결’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죄의 가장 깊은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곧 하나님-부재의 어둠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갈 때,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이며 “저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갈 3:13)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저주”는 하나님이 화를 내며 폭력적으로 내리치는 감정적 분노라기보다, 죄 안에 본래 내재된 ‘죽음의 결과’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는 본질상 하나님 없는 상태를 지향하며, 그 끝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절대 고독, ‘지옥’과 같은 내적 붕괴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지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그 죄가 낳는 하나님-부재의 심연을 온몸으로 통과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외침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진짜 경험에서 터져 나온 비명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외침은 “지금 나는 당신의 얼굴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순간 예수는 우리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 서 계십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류의 자리를, 하나님 부재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모든 인간의 자리를, 그분이 대신 서 계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 지점에까지 내려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가까이까지는 오셨지만, 우리가 실제로 서 있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는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러나 십자가는 정반대를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끝이라 생각하는 그 지점까지, 실제로 내려오셨다.
3. 깨진 경험, 그러나 깨지지 않은 사랑: 삼위 하나님의 역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신학적 긴장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실제로 하나님-부재를 경험하셨다면,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연합은 깨진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간의 완전하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교통으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의 “버려짐”은 이 일치를 부숴버린 사건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경험의 차원”과 “존재(본질)의 차원”을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자리에 실제로 대신 서기 위해, 경험의 차원에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진 것 같은 어둠과 혼란을 그대로 통과하셨습니다. 죄가 만들어낸 하나님-부재의 심연이 그분의 의식과 감각을 짓눌렀습니다. 그 무게는 정상적인 이성이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의 압도적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차원, 곧 삼위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과 연합이 깨진 것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창세 전부터, 필요한 경우 인류를 위해 이 길을 함께 걷기로 ‘합의’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느 한 위격이 다른 위격에게 폭력적으로 가하는 사건이 아니라, 세 위격이 함께 세우신 사랑의 계획 안에서, 성자가 자발적으로 택한 자기비움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려진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깊고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부재까지도 품으시기 위해, 자신 안의 기쁨과 평안을 “의식의 차원”에서 내려놓고, 우리의 지옥 속으로 들어오기를 선택한 사랑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드는 비유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들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경험은 중단되어도, 사랑 자체는 계속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의식과 감각은 하나님-부재의 어둠에 완전히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조차,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 자체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우리 대신 그 어둠을 통과하실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경험이 깨어진 자리”가 아니라, “사랑이 자기 경험을 포기하면서까지 우리를 붙들기 위해 내려온 자리”입니다.
4. 심판하시는 사랑: 폭력이 아니라 내어주심의 진노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죽음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 “잔”은 구약 전체에서 반복되던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노는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치듯 하나님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진노가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심판 방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버려두셨으니”(롬 1장). 사람과 공동체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부할 때, 하나님은 슬픔으로 자기 보호의 손을 거두시고, 그들이 선택한 길의 결과를 스스로 감당하도록 내어주십니다. 이것이 ‘내어주시는 진노’, 혹은 ‘허용을 통한 심판’입니다. 그분은 죄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막지 않음으로써 죄가 낳는 파괴를 드러내고, 결국 죄의 실체를 폭로하십니다.
십자가에서도 성경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넘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직접 못을 박고 채찍질을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인간들과 악한 영들의 손에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 가해진 모든 폭력은 인간과 악한 권세들의 폭력이지, 아버지의 손에서 나온 폭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이자 진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의 죄의 결과 한가운데로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진노는 “사랑 없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막지 않는 고통스러운 허용”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미워해서 내어준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동시에 두 가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는 죄가 실제로 어디까지 인간과 세계를 파괴하는지, 하나님이 보호의 손을 거두실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거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깊은 증거입니다. 진노와 사랑이 모순 없이 하나가 되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5. 버려짐의 자리에서 완성된 인성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인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경험”은 전혀 ‘신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도 인간적인 경험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순간, 기도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순간, “하나님, 정말 계시긴 한 겁니까?” 하고 묻고 싶어지는 깊은 절망의 순간들. 이 경험은 철저히 우리 쪽의 경험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는 바로 그 자리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분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려진 것 같은 영적·정신적 어둠까지 함께 짊어지십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상태를 일종의 “거룩한 광기, 거룩한 혼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죄를 알지 못하신 거룩한 분이, 세상의 모든 죄의 무게를 한 몸에 받으실 때, 그 정서적·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자기 인식이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의 내적 폭풍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의 부르짖음은 완전히 진짜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질문 안에는 혼란, 고통, 하나님-부재의 체험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문장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부르짖는 대상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입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도, 그분을 향해 소리치는 이 기도 자체가, 이미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믿음의 불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외침이 시편 22편 전체를 가리키는 암시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마지막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주를 신뢰하겠다”는 희망으로 끝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런 정교한 문학 장치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셨는지, 우리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분의 외침이 가식이 아니라 진짜였다는 것, 동시에 죄 없는 순결한 신뢰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인성을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 버려진 것 같은 자리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존재. 그것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완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인내와 신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우리 자리에 함께 서셨다는 증언입니다.
6. 십자가, 성경을 여는 열쇠가 되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언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음이라”(요일 3: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십자가도 여러 계시 중 하나다”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계시를 능가하고, 모든 계시를 완성하며, 동시에 나머지 모든 계시를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죄와 심판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십자가를 통해 배웁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의 고통과 하나님-부재의 경험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은 실제로 버려지신 것처럼 느낀 것뿐이지, 사실은 내면 깊이 평안하면서 ‘천상의 삼위 사랑’을 계속 누리셨다”고 말한다면, 십자가의 고통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창이 아니라, 그냥 겉으로 보여주는 인간적 연극이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진짜 하나님’과는 거리를 둔 사건이 되고, 하나님의 본심은 여전히 우리에게 감추어진 채 남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난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하나님-부재의 어둠을 경험하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죄로 인해 빠져든 지옥의 어둠 속으로 직접 들어오실 만큼 사랑하신다.”
이때 십자가는 단지 개인 구원의 사건을 넘어,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전쟁과 파괴의 본문들을 읽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묻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강압적 폭력으로 박살내시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내어주심으로 죄를 드러내고 극복하시는가?”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과 분리된 별개의 감정인가, 아니면 사랑이 죄와 공존할 수 없기에, 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그 죄의 결과에 내어주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허용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이 서 있습니다. 이 외침에 물을 부어서 희석시키면,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선언도 함께 희미해집니다. 반대로, 이 외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더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7. 어둠 속의 하나님: 우리의 지옥 속으로 들어오신 사랑
마지막으로, 이 모든 신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옛날에 일어난 구속 사건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존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십자가 위의 그 분처럼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 왜 제 기도는 무응답입니까?”
“하나님, 왜 이 고통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정말 저를 버리신 건 아닙니까?”
이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걸 보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안 계신 게 분명해.”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진리를 선포합니다. “네가 하나님-부재를 느끼는 그 자리에서, 이미 나는 너보다 더 깊이 내려가 있었다.”
성자께서 하나님-부재의 어둠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은, 그 어느 어둠도 하나님이 모르는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버려짐의 감정, 신앙의 공허, 영혼의 무너짐, 그것들은 하나님이 “멀리 서서 구경만 하시는 영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깊은 방식으로 자신을 주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성자는 우리의 지옥으로 내려가셨고, 부활에서 성부는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으며,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느끼지 못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버려졌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이미 예수께서 먼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셨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가장 깊은 하나님-부재의 경험 속에서, 가장 완전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경험은 깨진 것 같으나, 사랑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의식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존재는 사랑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의 모든 어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고백으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신 그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아들의 하나님-부재의 외침 속으로 들어갔다. 네가 나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너를 영원히 붙들고 있다.”
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십자가를 두려움의 상징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지옥까지 따라오신 사랑의 표지, 그리고 어떤 어둠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영원한 보증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복음의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빛이 흘러나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십자가에서조차 끊어지지 않았던 사랑이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하나님-부재도
그 사랑 바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우리를 놓지 않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