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목사님께,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빛이 언제나 목사님의 사역과 가정에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목사님의 신학적 열정과 복음을 향한 갈망을 담은 글을 깊이 있게 읽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순전한 소망과 성경 해석에 대한 치열한 진지함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특히, 딸들의 이름에 복음적 진리를 새기신 고백은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오늘 이 글을 드립니다. 이 글은 비판이 아니라 간절한 요청이며, 교정이 아니라 형제된 자의 간절한 중보입니다.
1. 복음은 완결된 선언이며, 그 어떤 제도도 이를 보충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상구 박사의 복음은 초보에 불과하며, 그 이상은 성소의 연례봉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다 이루었다"는 그 마지막 선언은 결코 반(半)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속사의 정점이며, 모든 계시의 완성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은 선언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이보다 더 명확한 복음의 완성은 없습니다. 성소의 매일 봉사도, 연례 절차도, 속죄일의 상징도, 모두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실체가 임하셨고, 그림자는 물러갔습니다. 그분이 오셨는데, 왜 다시 그림자 아래로 들어가려 하십니까?
2. 아사셀 염소는 복음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아사셀 염소를 사탄으로 보시며, 죄의 최종 책임이 그에게 전가된다고 해석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감당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복음은 죄의 전가가 아니라, 사랑의 자기 감당입니다. 사탄은 유혹자이지, 대속자가 아닙니다. 죄는 그에게 넘어가지 않았고, 넘길 수도 없습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장 해제하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복음은 사단의 제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패배했습니다. 복음은 사단을 무력화한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3. 성소는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은 말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형상은 아님으로..."
성소 제도는 그 자체로 완전한 계시가 아니라,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룩한 지시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 27:51).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휘장이며,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더 이상 성소 바깥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 자들입니다(히 10:19–20). 그러므로 이제는 모형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4. 심판은 복음의 조건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심판도 복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맞지만, 그 뜻은 '복음이 심판을 보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심판을 포함한다는 것이며, 복음이 심판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복음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복음은 우리를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가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심판대 위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 심판을 지나가게 하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정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자리입니다. 심판은 공포가 아니라 옹호이며, 저주가 아니라 은혜의 법정입니다.
5. 예언은 시간표가 아니라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서의 예언, 특히 2300주야는 오랜 해석의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이 반드시 도달해야 할 중심은 시간의 숫자가 아니라 구속의 십자가입니다. '2300주야=2300년'이라는 해석은 해석적 시도일 수는 있으나,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복음은 날짜가 아니라 인격이며, 시간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입니다.
에스겔 4:6, 민수기 14:34를 모든 예언 수치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적 정직성에 어긋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2300 저녁과 아침'은 레위기의 번제 문맥에서 오는 표현일 가능성도 크며, 1150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더욱 선명히 요구합니다. 억지 해석이 아닌, 정직한 사랑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6. 조사심판 교리는 복음의 기쁨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은 다니엘 8장의 성소 정결과 1844년의 역사적 사건을 연결하려는 해석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개념이 복음의 기쁨과 확신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동반합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은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조사심판은 믿는 자도 아직 완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불안한 신학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이미 선포된 '완성'을 유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은혜의 확신 대신 구원의 조건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조사'하시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기 위해'(히 10:17) 들어가셨습니다.
7. 작은 뿔 해석은 정치적 비판이 아니라 복음의 초점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다니엘서 8장의 ‘작은 뿔’을 교황권과 로마 제국으로 해석하신 것은 역사주의 전통에 충실한 시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해석이 자칫 복음의 보편성과 구속의 중심을 정치 세력에 대한 정죄로 협소화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신약은 특정 세력이 아닌, 복음을 대적하는 모든 체제를 '짐승', '뿔', '용'으로 상징합니다. 이 상징들의 목적은 특정 세력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모든 형태의 악한 권세를 폭로하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십자가 안에서 무력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진은 정치가 아니라, 죄와 악, 그리고 복음을 가리는 인간의 자고함입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 해석은 정치적 분노가 아니라 복음적 애통으로 읽혀야 하며, 심판이 아니라 초청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8. 예언의 중심은 해석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결코 정밀한 해석을 통해 생명을 주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직 사랑 안에서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옵니다.
2300, 1260, 538, 1798, 1844... 이 모든 숫자는 해석의 대상으로 남을 수는 있어도, 복음의 본질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날짜를 세시는 분이 아니라, 눈물을 세시는 분이십니다(시 56:8).
복음은 수학이 아니라 사랑이며, 공식이 아니라 자기희생으로 찢긴 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해석에 능해도, 그 해석이 예수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해석은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하신 주님의 말씀은
“해석을 알지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니입니다.
9. 성소 해석은 예수를 가리는 장막이 아니라, 예수를 드러내는 계시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요 2:19) 하셨을 때,
자신의 몸을 성소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지성소를 향해 나아가는 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지성소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성소에 대한 모든 해석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하는 방향으로 기능해야 하며,
예수보다 앞서거나, 예수보다 복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도식으로는 절대 기능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은 시간표나 구조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죄인을 품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품은 곧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10. 조사심판은 정죄가 아니라 화해의 선언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은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고...”
심판은 하나님이 무섭게 우리를 들여다보는 조사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우리를 변호하시고, 품으시고, 화목케 하시는 자비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면서 동시에 변호인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 서셨고,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으며,
우리는 이제 심판을 이긴 자,
곧 “정죄함이 결코 없는 자들”(롬 8:1)로 서게 된 것입니다.
11. 이상구 박사의 복음은 성소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성소를 완성한 시선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상구 박사의 복음을 “초보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 복음은 오히려 성소를 지나, 휘장을 찢고, 지성소 안에 들어간 복음입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그 십자가 안에서 모든 구속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어떤 전제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나니...”
그는 이 진리를 단순하게 믿었고, 단순하게 전했습니다.
그 단순함은 얕음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가장 깊은 중심이었습니다.
12. 결론: 복음은 더 이상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
목사님, 다시 말씀드립니다.
복음은 성소 제도로 보충될 수 없으며,
조사심판으로 완성될 수 없으며,
사단의 제거로 인해 비로소 완전해지는 구조도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이 선언은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글은 목사님의 진지한 신앙 여정에 대한 감사이자,
복음의 단순함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초청입니다.
우리는 해석으로 구원받는 자들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 이미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다시 ‘ㅇ진’과 ‘ㅇ진’이 되기를 —
곧, 진리와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사랑과 존경을 담아 이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한 형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