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글을 통해 드러난 신학적 열정과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의 글이 성소 제도의 해석에 있어 복음의 본질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이탈을 드러내는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 비평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존중을 바탕으로 하되, 십자가 복음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성경적, 신학적으로 검토하고자 합니다.
1. 성소 봉사의 중심은 "사건"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목사님은 성소 봉사를 해석하면서 “매일의 봉사 = 십자가, 연례 봉사 = 하늘 성소의 심판”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성소를 하나의 제도적 그림이나 절차표로 축소시킵니다. 성경이 성소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단순한 시간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제사장의 옷을 입은 모습, 지성소 안의 언약궤, 번제단의 희생,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던 실체이십니다. 다시 말해, 성소의 중심은 공간이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소 건물 안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미 성소의 가장 바깥, 곧 죄인이 양에게 안수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던 번제단에서조차 하나님의 임재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가장 더러운 자리에서부터 함께하시며, 그 임재의 길을 성소 전체를 통해 열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임재의 절정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으신 순간에 드러났습니다. 그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마 27:51), 하나님이 더 이상 제도와 구획 안에 머무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열어젖히셨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제도 속에 갇히지 않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열어젖히셨다는 선언입니다. 지성소 안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거룩하신 분이, 이제 죄인의 한복판, 세상의 한가운데서 십자가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성소의 중심은 절차가 아니라, 예수님 그분 자신입니다.
그분의 인격이 곧 성소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성소 전체를 완성하신 사건입니다.
2. '완전한 구원'을 '부분적 구속'으로 축소시키는 재림교 해석
목사님의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구속은 완성되었지만, 죄의 원흉 사탄이 제거되기 전까지 구속은 완성될 수 없다." 이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구속의 '시작점'이 아닌 '완결점'으로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선언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4)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매일의 봉사에 해당하는 부분적 은혜가 아니라, 죄를 단번에 도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계시한 사건입니다. 그 피는 성소 휘장에 뿌려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휘장이 그분의 육체로 찢겼기 때문입니다(히 10:19–20). 이제 성소는 더 이상 지성소-성소-뜰로 나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성소이며, 그분의 죽음이 바로 모든 속죄를 영원히 성취한 것입니다.
재림교회는 그 위대한 사건을 단지 '구속의 조건 충족'으로만 이해하고, 여전히 남은 심판적 절차를 통해서만 구속이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은연중에 '불충분'한 것으로 격하시키며, 다시 의인의 행위나 사단의 제거라는 외부적 사건에 구속의 완성을 위탁하게 만듭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3장–8장에서 통렬히 비판했던 율법주의의 현대적 변형입니다.
3. 연례 봉사의 중심은 사단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비움"입니다
목사님의 해석은 아사셀 염소를 사탄으로 보고, 그에게 모든 죄의 책임을 전가하는 데 무게를 둡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극단적인 이원론(dualism)을 조장하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죄의 책임을 사탄이 짊어진다고 선언한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짊어지셨고, 그 죄의 종말은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되었습니다"
(골 2:14–15).
아사셀 염소를 사단으로 해석하는 전통은 제2성전기 외경에서나 나오는 사상이며, 십자가 중심 계시론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죄의 책임이 사단에게 넘어가는 형식을 취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유혹자이지, 대속자가 아닙니다. 사단의 멸망은 구속의 과정이 아니라, 복음이 이미 성취된 이후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드러나는 하나의 결과일 뿐입니다.
4. 이상구 박사의 복음 이해 – 개인적 구원의 본질에 충실하다
이상구 박사는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조건은 없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성경의 심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또 로마서 3장에서 피를 토하듯 외쳤던 복음의 선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나니..." (갈 2:16)
이상구 박사의 복음 이해는 철저히 이 선언에 입각해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은혜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추가 절차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는 식의 교리를 거부합니다. 이는 매우 성경적이며,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상실해온 복음의 중심 회복에 큰 기여를 해온 점입니다.
목사님은 이를 두고 "그의 복음은 성소의 절반 이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런가요? 아니면, 복음 자체를 제도화하고 시간표로 나누려는 시도야말로 오히려 성소의 목적을 절반으로 축소시키는 것 아닐까요?
5. 성소 해석을 통한 복음의 이해는 십자가를 흐릴 수 있다
목사님은 반복적으로 "성소 전 구획이 복음의 청사진"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성소는 "실체의 그림자"(히 10:1)일 뿐이며,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소 중심 해석이 복음을 돕는 선에서 멈춘다면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의 중심 자리를 대신하려 하면, 성소는 다시 휘장이 닫힌 제도적 감옥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성소입니다. 그분은 성소의 그림자들을 통해 자신을 미리 계시하신 것이며, 그 실체가 오셨기에 더 이상 그림자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신약 성도는 하늘 성소를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 성소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입니다(엡 2:6, 골 3:1–4).
6. 진정한 우주적 구속은 사랑의 생명력으로 확산된다
목사님은 구속을 "쓰레기 수거의 과정"에 비유하며, 죄의 찌꺼기를 마지막까지 정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유는 좋지만, 문제는 복음의 생명력을 '제거 절차'로 환원시키는 위험에 있습니다.
복음은 더럽혀진 것을 치우는 힘이 아니라, 죽은 것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예수의 피는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흘려졌습니다(엡 2:5–6). 이 생명은 사단이 제거되어야만 비로소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한가운데서도 능력으로 살아 역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7. 재림교회의 공로가 있다면, 복음을 더 풍성히 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목사님은 재림교회의 해석이 우주적 구속의 청사진을 드러냈다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그 부분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십자가 복음의 단순함을 오히려 덮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구속의 청사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고, 성소 제도의 모든 예표는 오직 그분 안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속의 우주적 관점을 설명하되,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고 전부임을 한순간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구조, 모든 시간표, 모든 제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가 복음의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구 박사는 십자가 복음을 단순하게 붙들었습니다. 단순함은 결코 얕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깊이는 그 단순함에서 출발합니다. 재림교회의 해석이 그 단순함을 더 풍성히 하는 방향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교회를 살리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을 흐리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정교해 보여도 인간의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논의가 단순한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아는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우리 교회 안에, 그리고 이 시대의 혼란 속에 새 생명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위의 본문은, 어떤 목사님께서 본인의 네이버 블로그에 게시하신 이상구 박사님의 2300주야와 조사심판 이해에 대한 비판글에 대해 작성한 반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