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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정통은, 더 이상 정통이 아니다
– 정통과 이단을 넘어,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


1. 복음은 인정신문이 아니라, 무조건적 용납의 선언입니다

많은 종교적 체계는, 사람을 분별하고 자격을 가리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누가 진짜인가?”
“누가 끝까지 남을 것인가?”
“누가 기준에 부합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신앙의 언어로 위장된 인간 중심의 필터링 시스템일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네가 자격을 갖추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롬 5:8)


복음은 누가 참인지 식별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먼저 품어주신 그 사랑에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정통 여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나병환자에게 다가가셨고,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셨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어떤 자격 확인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랑만 있었습니다.


2. 복음은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팔 벌리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신학의 역사에서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언제나 ‘기준’의 언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성경관이 맞는가?"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했는가?"
"예언의 시기를 정확히 해석하는가?"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그가 예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었는가?”
“그가 은혜를 갈망하며 무너졌는가?”
“그가 사랑을 깨달아 남을 살리기 시작했는가?”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인가?”라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자격 있는 자만이 아니라, 모든 죄인을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것.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먼저 주어지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것.


3. 교리의 기준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복음의 참된 기준입니다

교회는 너무 자주 성경관, 신론, 종말론으로 이단을 정죄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종말을 잘못 예언했지만, 복음 앞에 무릎 꿇고 십자가를 붙든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영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증거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옳은 자를 식별해내는 것이 아니라,
틀린 자를 품어내는 사랑입니다.

정통은 벽돌로 성을 쌓지만,
복음은 십자가로 다리를 놓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설 것입니까?
성 안에서 자신만을 보호할 것입니까,
아니면 다리 위에서 원수조차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입니까?


4. 참된 이단 판별 기준은 “사랑을 훼손하는가”입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요이 1:9)


이 구절은 교리 체계나 철학적 정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마 22:37–40)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정통입니다.
그리스도는 심문을 통하여 공동체를 정결케 하지 않으셨고,
사랑을 통해 죄인을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오셨습니다.

사랑을 무너뜨리는 신학은, 아무리 정통처럼 보여도 복음이 아닙니다.

사랑을 세우는 자는, 설령 교리적으로 불완전할지라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결론: 복음은 정통을 선포하지 않고, 죄인을 끌어안습니다

정통과 이단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 선 긋기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선을 지우고, 죄인을 안으신 이야기입니다.

그 끌어안음 안에는
아나뱁티스트도, 세르베투스도, 이름 없는 수많은 무명의 순교자도 포함됩니다.

그들은 교리로 정통임을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교리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여야지, 정죄의 무기가 되어선 안 됩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한 구속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공동체는 외쳐야 합니다:

“교리로 이단을 정죄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십자가로 죄인을 끌어안는 복음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지금,
당신의 입술과 가슴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판단을 멈추게 하시고, 품게 하소서.
심판의 칼을 놓고, 사랑의 못을 붙잡게 하소서.
정통의 깃발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게 하소서."
  • ?
    벚꽃향기 2025.06.14 21:54
    십자가는 정통을 말하지 않았고, 오직 죄인을 끌어안았습니다.
  • profile
    이상구 8 시간 전
    심판의 칼을 놓고, 사랑의 못을 붙잡게 하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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