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었는가? 죄란 무엇인가?”
–여덟 번째 질문에 대한 복음적 해명–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께,
지금 이 질문 앞에 선 우리는, 단순한 신학의 정의가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서 터져나온 사랑의 진실 앞에 마주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왜 죽었는가?” 이 물음은 사실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신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누구이며 왜 고통 속에 살아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질문은 각각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상처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깊은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한 위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십자가, 곧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고통 속으로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1. “죄”는 단지 ‘규칙 위반’이 아니다 – 죄의 복음적 재정의
사랑하는 여러분, 죄란 단순히 법을 어긴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은 죄를 인간의 근원적 단절,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중심의 삶으로 돌아선 존재론적 반역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6:9에서 예수님은 “죄는 곧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3:12은 "믿음 없는 악한 마음을 조심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란 행동의 목록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된 마음의 병,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존재의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죄는 단지 나쁜 짓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인해 생긴 모든 파괴와 상처의 원형입니다. 이 죄의 결과로 인간은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며, 타인을 도구화하고, 삶을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와 방어로 채워갑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존재적 고통의 뿌리입니다.
2.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값’을 갚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죄를 “대속하셨다”는 말을 복음적으로 다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죄의 ‘값’을 누군가에게 지불하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기 존재 자체인 ‘사랑’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고 의심하고 반역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죽이기까지 한 그 자리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그 절대적 사랑을 객관적으로, 우주적으로, 한 번에 드러내셨습니다.
로마서 5:8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가장 추한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증명됩니다. 십자가는 고통당하는 하나님, 저항하지 않고 용서하신 하나님,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3. ‘대속’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의 자기 내어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왜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에 법적 상환 논리로 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래보다 훨씬 더 깊고 거룩한 차원의 진실을 말합니다. “대속”은 값을 지불하여 건져낸다는 의미이지만, 그 값은 법적 대가보다 사랑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 장면처럼 보일 수 있지만, 복음은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 자신이라고. 고린도후서 5:19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값을 받아내는 신”이 아니라, 죄값을 스스로 짊어지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죄를 묻지 않고, 죄인들을 끌어안으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4.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재한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한 사건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인간이 그 사랑을 주관적으로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불신과 두려움 속에 거절할 것인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겠느냐?”
5. “믿음”이란 무엇인가 – 사랑의 초청에 대한 응답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코 억지나 강요, 판단이나 자격 조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열고,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 저는 당신을 여전히 믿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 마음을 엽니다”라고 고백하는 관계의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복음은 인간의 완전함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열린 마음을 요구합니다. 심판 앞에 벌벌 떠는 종의 두려움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자녀의 신뢰를 요청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6. 십자가는 인간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심판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의 심판을 받으셨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를 거절했고, 결국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복수하지 않으셨고,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용서하셨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한 마디는 인간의 모든 죄보다 크고, 세상의 모든 오해를 뚫고 들어오는 사랑의 칼날입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무서운 심판은, 사랑 앞에서 우리의 미움과 두려움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가장 위대한 치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끌어안기 때문입니다.
7. 죄는 죽어야 끝나고, 사랑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는 죄의 실체를 폭로합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세상, 진리를 미워한 인간, 구원을 눈앞에 두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자아 중심성,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죄는 예수를 죽였지만, 사랑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은 단순한 생명의 회복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옳았다는 하나님의 우주적 선언이며, 죄는 죽어야만 끝나지만, 사랑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는 진리의 증거입니다.
8. 복음 앞에,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사랑하는 뉴스타트 가족 여러분, 이 질문은 단순한 교리 문제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울리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더 이상 우리 인생은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면, 우리도 그 사랑에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그 길이 바로 복음의 길입니다.
결론: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복수도, 분노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곳까지 찾아오신 사랑, 가장 깊은 고통까지 스스로 기꺼이 들어가신 구원자, 심판조차 껴안고 화목을 이루시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선언하신 그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