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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태어난 지 며칠도 안 된 아이가 아무 죄도 없이 죽습니다.
밥 한 끼 못 먹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수백만 명입니다.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엄마가 아이 손을 놓치고 울부짖습니다.
그 현장에 하나님은 계셨습니까?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왜 끊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왜 그렇게도 오래, 그렇게도 깊이, 그렇게도 무섭게 침묵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요?
그 말이 때로는 독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이라면… 왜 멈추지 않으셨죠?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단지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인생 전체가 무너진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입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진짜 대답해 주세요.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그 질문 앞에,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사랑하는 자매님께,

“왜 하나님은 지진을 막지 않으셨습니까?”
“기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왜 외면하십니까?”
이 질문은 누가 묻더라도 가볍지 않습니다. 아니, 이 질문은 가볍게 대답되어선 안 되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의 진짜 무게는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을 가만히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침묵에 있기 때문입니다.

땅이 갈라지고, 마을이 무너지고, 아이들이 굶어 죽을 때,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분이 진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리고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 말이 도리어 우리를 더 아프게 찌를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되묻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면, 왜 멈추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음은, 단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고통받으신 하나님이 직접 그 물음에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1. 고통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 자기 제한적 사랑의 우주

많은 이들이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이 모든 고통과 재해는 결국 그분의 계획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통제가 아니라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사랑의 논리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은 본질상 통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유로운 피조물을 만드셨고, 그 자유를 강제로 꺾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심”으로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통제하지 않고도 사랑을 이루심”으로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억압과 고통의 세계를 강제로 조정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처럼, 그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이 세계는 ‘고정된 각본’이 아닙니다 — 열린 미래의 창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운명적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자동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대화와 반응이 가능한 유기적 관계의 무대로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생각을 바꾸시고(출 32:14),
인간의 선택에 반응하시며(렘 18:7–10),
함께 슬퍼하시고(눅 19:41),
함께 기다리십니다(벧후 3:9).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근이 닥치기 전에 미리 다 막아버리는 ‘청사진의 관리자’가 아니라,
인류와 함께 살아가시는, 응답하고 고뇌하시는 사랑의 인격자이십니다.

바로 이 열린 미래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선택, 그리고 영적 존재들의 행동에
자신의 창조 세계를 위탁하셨습니다.
이것이 놀랍고도 위험한 사랑의 모험입니다.


3. “자연재해”는 정말 자연만의 문제인가?

기근, 지진, 홍수, 가뭄.
우리는 이것들을 “천재지변”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 고통들이 정말 자연 그 자체만의 탓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한 인간의 선택이 이 고통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모든 인류가 먹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합니다.
그러나 7%의 인구가 50%의 자원을 독점하고,
부유한 국가들의 낭비와 무관심은
기근이라는 인재(人災)를 만들어냅니다.

방글라데시의 홍수, 아프리카의 가뭄조차도,
단순히 “자연의 분노”가 아니라
복지, 인프라, 공공책임의 부재 속에 파괴력을 얻은 것입니다.

전쟁, 무기 산업, 기후 파괴.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실수가 아닙니다.
사랑 없는 선택들이 이 세계를 찢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묻는 “왜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하나님이 내 선택과 우리의 구조적 탐욕을 통제하지 않으신다는 데에 대한 원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복음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분이 지진을 막지 않으신 것이 정말 문제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오늘 고통받는 자 옆에 서기를 거부한 것이 문제입니까?”


4. 설명되지 않는 악은 존재합니다 — 그러나 방치되진 않았습니다

어떤 고통은 인간의 죄악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어떤 책임도 돌릴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호흡하지 못하는 아이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산사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전염병과 기형,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갑작스레 앗아가는 지진.

이런 고통 앞에서 우리는 더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조차도요.

그렇다면 이 질문이 다시 솟구칩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요?”

그 질문을 향해 성경은 기묘한 방식으로 응답합니다.
설명이 아니라, 사건으로.
말씀이 아니라, 십자가로.


5. 그분은 그 고통의 중심에 먼저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죄 때문에 대신 처벌받으신 사건”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훨씬 더 깊습니다. 복음은 외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의 가장 깊은 고통에 몸소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기근의 아이들과 함께 굶주리셨고,
지진으로 무너진 집 안에 깔린 자들과 함께 신음하셨으며,
불의에 의해 짓밟히는 자들과 함께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죄의 대가를 치른 장소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의미 없는 고통들이 하나님의 심장에 새겨진 자리입니다.

복음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명령하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 안에 스스로 들어가신 분이다.”

지구가 갈라질 때,
하늘이 울부짖을 때,
아이의 숨이 끊어질 때,
하나님은 그 사건의 밖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함께 숨이 끊기신 분입니다.


6.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 보이지 않는 악의 실체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나 자연의 한계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비인격적이고 무차별적인 악의 힘이 존재합니다.

정교한 증오, 비논리적인 폭력, 순전한 무의미함의 어둠—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마치 인격을 가진 ‘파괴의 의지’가 세상을 흔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은 이 실체를 “정사와 권세,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 부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에베소서 6:12)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전쟁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공기처럼 퍼져 있는 이 악은, 보이지 않지만 결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무기로 사용해 아이들을 삼키고,
지진을 틈타 하나님의 선하심을 조롱하게 만들며,
죽음의 신음 위에 하나님을 고발하는 거짓을 속삭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없다.
있다 해도, 그는 사랑이 아니다.
아니면, 무능하거나, 잔인하거나, 무관심한 자일 뿐이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 곧 총공세입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고통을 하나님을 고발하는 데 쓰임받는 증거물로 전환해왔습니다.
그는 욥의 가정, 예수의 십자가, 오늘 당신의 눈물 위에서 끊임없이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우리 마음에 이 세 문장을 심습니다:

“그분이 진짜 사랑이라면,
왜 내가 이렇게 아픈가?”
“왜 그 아이는 죽어야 했는가?”
“왜 이렇게 오래 침묵하시는가?”


이 문장들은 단순한 의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자체를 파괴하려는 전략적 유혹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어둠 한가운데서 다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정사와 권세, 악한 영들, 죽음 자체의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얼굴을 드러냈던 그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향해
“너희는 패배했다”라고 선언한 하나님의 심판대이자,
사랑이 모든 악보다 더 깊다는 것을 드러낸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그렇습니다.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결말은 십자가에서 이미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승리자의 사랑 안에서 견디며,
그 어둠을 향해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의 고발을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하나님은,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7. 고통의 한가운데서 탄식하시는 분
— 성령의 임재

우리는 여전히, 명쾌히 대답되지 않은 질문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지진은 멈추지 않았고, 기근은 사라지지 않았고,
무고한 고통은 여전히 이 땅을 뒤덮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당신이 이 고통을 혼자 견디고 있지 않다.”

성령은 지금도

병상의 숨결 위에 계시고,

폐허가 된 도시의 먼지 속에 계시며,

피를 흘리는 자녀의 눈물 속에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로마서 8:26)

여기서 성령은, 하늘 위에서 조용히 기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절망에 들어와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고통을 설명하지 않으시지만,
그 고통을 자기 심장 안으로 끌어안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탄식은 포기의 탄식이 아니라,
출산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고통을 지나서,
전혀 새로운 세상, 다시 말해 새 창조를 분만하고 계신 것입니다.


8. 부활은 약속이 아니라, 시작된 혁명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사후 보상을 보장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복음은 훨씬 더 급진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이 세계의 회복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

즉,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예외가 아니라,
다가올 전 지구적 부활의 서막입니다.

그분은 죽음을 ‘피한 자’가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여 그 구조를 부숴버리신 분입니다.

이제 성령 안에서 우리는

땅이 진동해도, 그 땅이 새롭게 될 것을 믿고,

굶주림이 있어도, 그 결핍을 채울 생명의 양식이 오고 있으며,

눈물이 흐를 때, 그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9. 아직 끝나지 않은 복음 —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자매님,
당신의 질문은 정당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지진과 기근을 막지 않으시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복음의 대답은,
더도 덜도 아닌 이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하나님은 이 고통을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고통을 자기 아들의 살과 피로 끌어안으셨고,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새 창조를 잉태하셨으며,
지금도 성령으로 함께 울고, 함께 탄식하고,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 앞에서 멍하니 서서 “왜 멈추지 않으십니까?”를 묻기보다,
이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여, 이 고통의 한가운데서
내가 무엇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탄식 가운데
복음을 살고, 십자가를 따라가고, 부활을 증언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고,
기근은 여전히 계속되며,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복음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부활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탄식의 시간이지만,
곧 노래가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은 찢김의 계절이지만,
곧 새 살이 도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우리는 아마도 여전히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주여, 왜 그러셨습니까?”


그 순간,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대신 그분은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못 박힌, 그 손으로.

우리는 그 손을 붙잡는 순간,
아마도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의 흔적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전부였다는 것을.


그러니, 사랑하는 자매님.
지금 그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응답 안에서—
세상 속의 한 줌의 빛,
한 조각의 소금,
한 방울의 성령의 눈물이 되어 주십시오.

이것이
“왜 하나님은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복음의 대답입니다.

임마누엘.
고통의 중심에 계시고,
지금도 당신과 함께 우시는 하나님,
그분이 지금,
바로 당신 곁에 계십니다.

  • ?
    벚꽃향기 2025.08.02 05:22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복음 11장 35절)

  1. 왜 막지 않으셨습니까?

  2. 어떤 이의 진짜 꿈

  3. 의미는 만들지 않는다, 발견된다

  4. 칼을 든 신인가, 칼을 맞은 하나님인가

  5. 신은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이 아니라, 우리가 못 박은 실재다

  6. 그냥 존재한다 vs 사랑이 존재케 했다

  7. 우주가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없이 해석했던 것입니다

  8. 자신을 버린 신만이 모든 종교를 품는다

  9. 도마복음이 감춘 예수, 도마가 만진 예수

  10. 바리새인의 성경 vs 예수님의 성경

  11. 하나님의 마음은 십계명보다 더 깊다

  12. 왜 죄는 오직 하나님만이 없앨 수 있으며,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으셔야만 했는가?

  13.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14. 한국은 교회가 많은데도 왜 범죄와 사회 문제가 많은가?

  15. 신은 왜 자기 존재를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는가?

  16. 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17. 문자주의를 떠나되, 복음의 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18. 개혁주의, 복음의 심장을 잃어버린 껍데기일 수 있습니다

  19. 야훼는 유대 민족의 수호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안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0.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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