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그 아이는 왜 그렇게 죽어야 했나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시라면서요?
그런데 왜… 세상엔 이런 일들이 일어나죠?
어린 여자아이가, 미치광이에게 끌려가
강간당하고, 몸이 찢겨 죽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곳에서…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셨던 건가요?
왜 막지 않으셨나요?
왜 침묵하셨죠?
“사랑이시라면서요?”
“전능하시다면서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참혹하게 방치하신 거죠?”
누군가는 말합니다.
“그건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이야.”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기에,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셔.”
그런데 말입니다…
그건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닐까요?
그 여자아이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단지 울었고, 버텼고, 부서졌을 뿐이에요.
그 아이의 고통은, 누군가의 자유로 ‘이해’되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런 현실을 두고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지.
그건 너무 비정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신앙을 갖고 싶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싶어도,
현실은 자꾸 저를 밀어냅니다.
왜냐하면…
이해가 안 되거든요.
설명도 위로도, 다 공허하게 느껴지거든요.
그 아이는… 그렇게 죽었잖아요.
그 사실이 바뀌지 않잖아요.
그래서 묻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이 진짜 사랑이라면,
왜 그 아이를 멈추지 않으셨나요?
진심으로,
대답이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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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끝나지 않았다 – 십자가와 부활의 약속」
사랑하는 자매님께,
어떤 이론도, 어떤 변명도, 그 참혹한 질문 앞에서는 멈추고 맙니다. “왜 하나님은, 그 아이가 강간당하고 몸이 찢기도록 두셨습니까?” “왜 침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왜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이 물음은 신학적 추론이 아니라, 울부짖는 인간 존재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로 응답하십니다.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는 이 질문의 핵심을 똑바로 응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다고요? 그런데 왜 그 자유가 누군가의 고통을 이렇게나 깊게 만들도록 허락된 거죠?” “그게 무슨 자유입니까? 사랑이 있다면… 막았어야죠.”
이 질문은 곧장 복음의 심장부를 찌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없었다면, 복음은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죄와 고통, 무고한 자의 울부짖음. 그것이 바로 복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가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1. 자유가 없다면, 사랑은 없습니다.
자매님, 사랑은 언제나 선택의 자유를 전제로 합니다. 강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없이는, “사랑한다”는 고백은 공허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동시에, “나는 그를 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또한 품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유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면, 그 자유는 오용 가능성까지도 허락한 자유여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인격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는 리모컨으로 조종되는 인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왜 막지 않으셨는가? 지금, 그 순간만큼은?
가장 비통한 질문입니다. 한 아이가 당하고 있을 그 순간, “그때만은 왜 개입하지 않으셨나요?” “왜 천둥같은 심판으로 그 미치광이를 멈추지 않으셨나요?”
여기서 복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심으로, 스스로의 손을 묶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를 진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으심으로, 단 한 번도 사랑을 강제로 조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마치 리모컨을 들고 조작하듯 개입하셨다면, 그 순간 그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그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며, 그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격이 아니라, 정해진 각본의 배우일 뿐입니다.
3.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끔찍한 광경, 그 아이의 피비린내 나는 고통, 부서지는 육체와 울부짖는 영혼 앞에서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등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 자리에 함께 계셨습니다. 침묵 속에서 참으셨고, 그 고통을 함께 견디셨고, 결국, 그 아이의 고통을 자기 몸에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
거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짓밟힌 존재들의 고통, 모든 찢긴 자들의 신음, 모든 억울한 자들의 피눈물을 당신의 심장에 박아 넣으셨습니다.
“그게 사랑이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유를 허락한 대가로 자기 자신을 찢으신 사건입니다.
자매님, 우리가 다룰 질문은 한 걸음 더 깊어집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까? 정말,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유를 주셔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 자유가, 그 사랑이, 정말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질문에 직접 피로 대답합니다.
4. 자유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토양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상처받을 위험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계산된 투자입니다. 이익을 노린 조건입니다.
사랑이란, 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결정입니다.
자매님도 엄마가 되시면서 아셨을 겁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고, 그 자유가 때로는 거절과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조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도록, 그분은 스스로 통제할 권리를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처음부터 고통받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5. 하나님의 고통은 시작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한 절대군주가 아니라, 배신당한 남편, 가슴 치는 아버지, 우는 친구로 묘사합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음행하는 아내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녀는 거듭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녀들에게까지 해를 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3장, 에스겔 16장, 호세아 11장... 성경은 도망치는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울부짖는 하나님의 눈물과 기다림으로 가득합니다. 전능한 분이 연약한 인간의 반응에 상처받고, 배신에 고통을 느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6.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랑은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랑 자체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했던 모든 고통, 우리가 저질렀던 모든 죄, 우리가 짊어져야 했던 모든 심판을 그분은 대신 지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내리신 유죄 판결입니다.
“내가 네 대신 죄인이 되어 죽겠다.”
하나님은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만든 세상의 모든 고통을 스스로의 몸으로 받아내기로.
그 순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외치는 절규. 이보다 더 깊은 고통이 있을까요?
이보다 더 깊은 연대가 있을까요?
이 고통의 절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안으셨습니다.
7. 왜 그렇게까지 하셨는가? 부활이 그 대답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3일 후, 그 무덤은 비었습니다. 죽음조차 사랑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사랑은 고통보다 크다.” “자유는 반드시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너의 눈물, 너의 상처, 너의 억울함은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기억한다. 나는 회복할 것이다. 나는 다시 만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고통을 잊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의 울부짖음을 자기 살에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 그 아이를 안으실 것입니다. “그때 나는 너와 함께 울고 있었단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다시 살릴 것이다.”
자매님, 아직 우리가 다루어야 할 마지막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이미 벌어졌고, 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뜻이 사랑이었다 해도… 정말 그 고통이 의미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은 존재의 비명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복음은 마지막 고백을 꺼내어 놓습니다.
8. 고통은 잊히지 않는다 — 오히려 기억된다
하나님은 고통을 지우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는 부활하신 후에도 손과 옆구리에 상처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왜 지우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미화하거나 망각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그 상처는 영광의 표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고통은 기억되되,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세상의 모든 부당함, 학대, 억울함, 짓밟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함께 처형되었고, 부활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 아이의 절규도, 그 엄마의 울부짖음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눈물을 다 기억하고 있다.” “내가 너의 상처를 내 심장에 새겼다.” “너는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너의 고통이, 나의 영광의 자리로 변화될 것이다.”
9. 영원이라는 관점 없이, 이 모든 복음은 무너진다
만일 이 인생이 전부라면, 만일 죽음 이후가 없다면, 자매님,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은 허무한 자기위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말합니다. “이 인생은 시작일 뿐이다.”
바울은 로마서 8:18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9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다.”
그 영광이 얼마나 크기에, 바울은 고문과 투옥과 죽음조차 ‘가볍다’고 말했을까요? 그는 실제로 고통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초월하는 부활과 회복의 현실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에, 그 고통조차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10. 십자가는 복수 대신 회복을 약속한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억울하게 죽은 아이를 위해 반드시 응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하나님은 정의로우십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단순한 복수가 아닙니다. 그 정의는 “회복”입니다.
십자가는 말합니다. “나는 네 고통을 함께 겪었고,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너의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빛나는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사랑이, 결국 모든 것을 이길 것이다.”
하늘나라는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모든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응답입니다. 그곳에서 죽은 자는 살아나고, 부서진 자는 회복되며, 억울한 자는 안기고, 사랑은 완성됩니다.
11. 자매님, 우리는 이 해피엔딩을 거부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자매님께 묻고 싶습니다. 자매님 안에는, 이 이야기가 그냥 끝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설명할 수 없는 공명(共鳴)이 있지 않습니까?
죽은 아이의 울음이 그저 우연한 자연 현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존재의 외침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울림이, 하나님의 복음과 부딪혀 공명할 때,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진리로 만납니다.
자매님, 이 글을 마치며 저는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이의 고통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자신의 가슴에 새기셨고, 언젠가 그 아이를 안아 “이제 울지 말라” 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피 묻은 사랑 고백입니다.
12. 마무리하며: 그 아이는 끝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이야기,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외칩니다.
“그 아이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찢은 자도, 만약 회개한다면 십자가 아래서 눈물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마지막 충격입니다. 고통을 입은 자와, 고통을 준 자가 하나님의 부활 아래에서 함께 울고, 함께 회복되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세상은 이 사랑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랑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압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자매님의 인생에, 십자가의 사랑으로 영원히 새겨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