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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경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서에서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시는 말씀이라든지, 
신명기에서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시는 명령 같은 부분들입니다.

그런 구절들 앞에서 저는 종종 멈춰 서게 됩니다.
이게 정말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만약 이 본문들을 그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솔직히 성경 전체가 너무 폭력적으로 느껴지고, 그분이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에 대해 깊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까지 용서하셨잖아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고, 
왼뺨도 돌려 대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여쭙고 싶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잔혹한 명령들—그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명령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딘가에서 깊이 오해해왔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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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본문을 꿰뚫는 십자가의 빛 
― 구약의 폭력 계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우리는 성경을 읽다 보면 신앙의 심장부를 흔드는 장면과 맞닥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전쟁과 진멸을 명하신 듯 보이는 구절들―

“그 성읍의 남자와 여자와 아이와 늙은이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 6:21)

“부모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 (레위기 20:9)

“살아 있는 것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신명기 20:16–17)

이 본문들 앞에서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심각한 신학적 충돌을 경험합니다. 정말 이것이 자비롭고 인애하신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일까요? 만일 이러한 지시들을 곧장 하나님의 본래 의도로 수용한다면, 성경은 사랑과 은혜의 계시가 아니라 무차별적 전쟁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서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 우리 양심이 아파하며 저항하는 바로 그 자리에, 성경 해석의 결정적 열쇠가 놓여 있습니다. 그 열쇠는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1. 십자가: 폭력을 명하는 신이 아니라, 폭력에 맞아 죽은 하나님

갈보리 언덕 위에서, 하나님은 명령을 내리는 절대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를 내어주는 
사랑의 인격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전장을 지휘하는 군 사령관이 아니라, 채찍에 맞고 못에 
찔려 죽임당한 어린양이십니다.

십자가는 구약의 잔혹 본문들과 정면으로 대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가 읽은 폭력은 내 본심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너희의 왜곡된 이해가 만들어낸 
그림자다. 나는 적을 죽이는 신이 아니라, 적을 위해 죽는 하나님이다.”

십자가는 구약 본문을 정당화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신학적 거울로 세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오해하고 왜곡해 왔는지를 드러냅니다. 그 거울 속에 비친 것은 하나님을 폭력의 신으로 투사하게 만든 인간 내면의 탐욕, 두려움, 통제욕입니다.


2. 자기비움(케노시스): 왜 하나님은 즉시 반박하지 않으셨는가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폭력의 묘사들을 두고 
즉시 반박하지 않으셨는가? 왜 '그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 대답은 곧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강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간을 기다리며 상대의 내면이 준비되기를 참아줍니다. 사랑은 오해받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상대의 인격과 자율성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문화적 한계와 역사적 조건, 그리고 고대 근동의 전쟁신 패러다임을 있는 그대로 감내하시며, 그들의 언어와 사유 체계 속으로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의 인식 틀 안에서 인내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진멸이 승리’라고 믿던 시대에, 하나님은 그 믿음을 폭력적으로 뒤엎기보다, 그 길은 결국 무너지고 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그 모든 오해를 꿰뚫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전쟁의 신으로 오인했으나, 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의 칼날을 내 몸에 받아내는 하나님이다.”


3. 십자가의 빛으로 다시 읽는 성경

십자가 없이 구약을 읽으면, 성경은 서로 충돌하는 규칙과 폭력의 명령이 난무하는 조각난 파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해석의 렌즈로 삼으면, 그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며 하나의 사랑의 그림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 21:24)는 무제한 보복을 막으려는 제한적 규범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라”(마 5:39)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본래 의도, 곧 사랑과 비폭력의 완전한 윤리로 이끄셨습니다.

또한 구약의 피 묻은 제사 제도는 끝없는 반복이었지만,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어린양”(히 10:10) 예수께서 그 모든 그림자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는 완전한 희생이 나타난 것입니다.

민족 중심의 축복과 저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언약의 본래 목적이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만의 신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심이 계시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는 선언은 그 모든 구약적 전환의 결론을 압축합니다. 사랑과 비폭력의 윤리가 단순한 이상이나 도덕적 제안이 아니라,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폭력은 힘이 없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폭력을 스스로 해체시키며 역사를 뒤흔드는 참된 권능입니다.


결국 성경 전체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입니다. 율법의 차가운 요구를 지나고, 전쟁과 제국의 피비린내를 지나고, 시편의 울부짖음과 예언자들의 통곡을 지나 마침내 흘러가는 종착지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 강은 골고다 언덕, 곧 칼에 찔리신 하나님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모든 파편이 십자가라는 중심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4. 예상되는 반론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폭력 명령들은 단순한 오류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그것은 왜 성경에 포함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것이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이해와 하나님의 인내가 만나는 자리’로서의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들은 인간이 죄, 두려움, 폭력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오해 속으로까지 친히 낮아져 들어오셨다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폭력 본문은 “하나님이 폭력적이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왜곡과 한계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셨다”는 존재적 증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오해와 왜곡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해석학적 응답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해를 억지로 꺾거나 부수지 않으셨습니다. 논쟁이나 권위주의적 개입으로 자신을 입증하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폭력적 심판자로 오해하며 만들어낸 모든 왜곡과 그로 인한 폭력의 결과를 자기 몸으로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미움·저주·칼날이 쏟아지는 그 자리로 스스로 들어가셔서, 우리의 잘못된 하나님 상(像)과 그 왜곡이 낳은 폭력까지 자기 몸에 받아내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듯,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십자가는 하나님의 최종적 자기 계시이며, 가장 결정적인 반론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폭력의 신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위해 폭력에 맞아 죽은 하나님이다.”


5. 결론: 성경이 하나의 노래가 될 때

이제 우리는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여전히 폭력의 신 개념을 고수하며 성경을 두려움과 억압의 책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하나님을 통해 성경 전체를 하나의 사랑의 서사로 다시 
들을 것인가?

십자가 앞에 설 때, 구약의 잔혹 본문은 더 이상 해석 불가의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비움과 인내의 흔적이며, 인간의 눈에 하나님의 참모습이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명령하신 분이 아니라, 그 폭력을 자기 몸에 흡수하여 무력화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은 하늘을 가르는 벼락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처럼 조용히, 깊게, 세상을 치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진짜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가장 선명한 표정은 십자가 위에서조차 원수를 위해 기도하신 사랑입니다(눅 23:34).

그 사랑 앞에서, 구약의 피 묻은 페이지조차 은혜의 빛을 받아 하나의 구속 이야기로 노래됩니다. 성경은 하나의 노래가 됩니다—칼을 든 신을 넘어, 칼에 맞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번도 폭력의 신이 아니셨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셨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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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2025.09.19 01:2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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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벚꽃향기 2025.09.25 02:29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신을 두려움과 분노의 존재로 상상했습니다. 가나안과 바벨론의 신들은 인간의 제물을 받아야 분노가 풀리고 복을 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조차 그런 문화의 영향을 받아 때로는 하나님을 “전쟁을 지휘하는 진노의 신”으로 오해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이나 시편의 “원수를 부수라”는 기도에는, 하나님을 마치 다른 고대 신들처럼 칼을 든 전쟁의 신으로 투사한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오해는 단순한 과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폭력을 써도 된다”는 생각은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같은 역사의 어두운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복수하신다”는 왜곡된 하나님 상(像)을 붙잡은 채, 폭력을 신앙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에서 천둥 번개로 “나는 그런 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인간을 강제로 깨우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불의 기적을 본 뒤 “이제 모두가 하나님을 알겠지”라 기대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열왕기상 19:12). 하나님은 언제나 비폭력적 사랑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고,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 왜곡을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고발했고,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잔혹한 권력이 그 고발을 실행하며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이 모든 종교적 열심, 정치적 폭력, 인간의 미움과 저주가 예수의 몸으로 쏟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며 그 폭력을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적 하나님 상(像)을 힘이 아닌 자기희생으로 해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나는 폭력의 신이 아니다”라고 말로만 증명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미움과 왜곡, 그리고 그것이 낳은 실제 폭력을 자기 피와 죽음으로 흡수하심으로써 “나는 너희를 위해 폭력에 맞아 죽은 하나님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자기희생적 사랑 그 자체이심을—영원히 드러내는 증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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