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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그는 죽은 자들의 곳으로 내려가셨다.”
— 〈사도신경(8세기 전승)〉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누가복음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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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내려가신 사랑: 십자가는 가장 낮은 곳을 뚫고 부활을 여셨다”


1. 그분은 정말로 지옥에 내려가셨는가?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 이 고백은 수세기 동안 사도신경 속에 자리 잡아 왔으나,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에게 여전히 난제이자 신비로 남아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과연 육체적 죽음 이후에 ‘지옥’이라는 실체적 장소에 내려가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분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그리고 이 질문이 단순한 신학적 사변을 넘어, 오늘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복음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은, 그분이 단지 고통을 느끼신 것을 넘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하나님 부재의 실재 — 곧 지옥의 문턱을 스스로 통과하셨음을 드러낸다. 지옥이란 단지 불붙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완전히 부재한 관계의 파열, 하나님과의 단절, 그리고 자기중심적 절망의 순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가셨다. 누구도 감히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그 어둠 속으로, 버림받은 자들의 침묵 한가운데로.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예수께서 죽으신 그 날, 강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말씀은 예수께서 즉시 하나님의 임재 안, 곧 낙원에 들어가셨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같은 날, 그분이 동시에 ‘지옥에 내려가셨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예수는 낙원에 계셨는가, 아니면 지옥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시간의 선형적 이해를 절대화할 때 생겨난 모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물리적 차원의 연속(chronos)에 묶여 있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하나님의 시간(kairos), 즉 구속사의 깊이 속에서 작동하는 초월적 차원에 속한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24시간 안에 갇힌 날짜가 아니라, 사랑이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순간을 가리킨다.

예수의 “오늘”은 강도의 의식 안에서의 즉시적 구원 체험이자, 동시에 예수께서 사탄과 죽음의 권세 아래로 내려가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신적 사명의 시작이었다. 강도의 입장에서 ‘오늘’은 예수의 품 안에서 즉각 누린 ‘낙원’이었고, 예수의 입장에서는 ‘오늘’이 바로 지옥의 문을 부수는 첫날, 즉 사랑이 심연으로 진입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는 낙원과 하강, 쉼과 싸움, 사랑의 품과 심판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분은 동일한 사랑으로 강도를 품으시며, 동시에 지옥의 문을 부수고 계셨다. 인간의 눈에는 순서가 있고 구분이 있지만, 영원의 차원에서는 사랑의 사건이 한 덩어리로 겹쳐진다.

이것이 바로 ‘오늘 낙원’과 ‘지옥 하강’이 모순이 아니라, 같은 사건의 두 얼굴 — 즉 사랑이 한편으로는 안식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을 깨뜨리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의 “오늘”“사흘 후의 부활 사이”는 인간의 시계로 구분할 수 있는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죽음의 구조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며 통과해 간 구속사적 여정이다. 십자가, 지옥 하강, 부활은 세 장면의 연속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솟구친 단일한 호흡이다.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시간의 문제를 넘어 사랑의 방향을 말한다. 그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셨고, 끝까지 내려가셨고, 그 끝에서 다시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러므로 “지옥 하강”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낮은 곳까지 찾아가신 사건이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각자의 지옥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살아 있는 복음이다.



2. 지옥은 어디인가?

지옥은 단지 죽은 자들의 불못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부재하여 관계가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자리다. 다시 말해, 지옥은 하나님이 만든 형벌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을 거부하며 스스로 구축한 고립의 체계다. 미움이 정의로 위장하고, 수치가 인간의 언어를 삼키며, 복수가 존재의 원리가 되어버린 곳—그것이 지옥이다.

이 지옥은 사후의 세계에만 있지 않다. 인도 빈민가의 굶주림 속에서, 전쟁의 폐허 위에서 아이가 울부짖는 그 순간에도, 가정폭력의 공포 속에 침묵하는 이의 눈빛 속에도, 그리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기 혐오의 고백 속에서도 지옥은 지금 여기에 있다. 지옥은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빠져나간 인간의 내면과 사회, 그리고 역사의 구조 속에서 현현한다.

바로 그 자리로, 예수께서 내려가셨다. 그분은 안전한 거리에서 고통을 ‘관찰’하신 분이 아니라, 고통의 심연 속으로 직접 몸을 던지신 분이셨다. 간음 현장에서 수치에 짓눌린 여인 앞에 서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고,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이름을 불러 그녀의 존재를 회복시키셨으며, ‘이름 없음’으로 살아가던 귀신 들린 자에게 새 이름과 옷, 그리고 공동체를 되돌려 주셨다. 예수의 하강은 단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의 가장 낮은 어둠까지 침투하는 사건이었다.

베드로전서 3장은 “그는 죽임을 당하신 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벧전 3:19)고 기록한다. 이 ‘선포’는 단순한 복음 전도가 아니라, 사탄과 죽음의 권세 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주권 회복의 외침이다. 그 선언은 이렇게 들린다.

“나는 너희의 절망과 수치를 끌어안고 여기까지 왔다. 너희가 버림받았다고 느낀 그 자리에서조차,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는다.”

예수의 지옥 하강은 ‘형벌을 대신 받은 사건’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자기비움이다. 그분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가셨고, 그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을 안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은 단지 ‘대신’의 사랑이 아니라, ‘함께’ 내려가신 사랑이다.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들어주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이다.

이처럼 예수의 하강은 형벌의 신학을 넘어서는 관계의 복원 사건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이 만든 지옥의 질서를 안에서부터 해체한 구속의 행위다. 그분의 내려감은 단지 과거의 신비가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죄책감과 수치, 폭력과 절망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옥은 끝이 아니다. 지옥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이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의 지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너와 함께 일어난다.”




3. 지옥 이후의 복음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그곳에 갇히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망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기에 그 심장을 관통하여 ‘뚫고 나오신’ 승리의 선언이다. 지옥의 문은 사랑으로 부서졌고, 죽음은 더 이상 최후의 권세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지옥 하강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문턱이었다. 그것은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고, 생명이 사망보다 깊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절망보다 위대하다는 복음의 선언이다.

또한 이 진리는 성화(聖化)와도 깊이 연결된다. 예수의 지옥 하강과 부활은 단지 그분의 승리를 선언한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의 모형이다. 사랑은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절망을 품고,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을 일으킨다. 바로 그 사랑의 운동이 우리 안에서도 계속되어, 우리를 점점 그분의 형상으로 빚어가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성화의 본질과 관련하여 두 가지 결정적인 진술을 들려준다. 히브리서 12:14은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을 직접 뵙기 위해서는, 그분의 임재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변화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요한일서 3:2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를 볼 때 우리가 그와 같이 될 줄 아노니.” 곧, 하나님을 직접 뵙는 그 사건 자체가 인간을 완성된 거룩함의 자리로 이끌어 올리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 두 말씀을 함께 읽으면 다음과 같은 신학적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거룩함이 필요하지만, 그 거룩함의 최종적 완성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경의 전체 흐름을 보면, 인간이 죽기 전에 완전한 성화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완성은 하나님을 직접 뵙는 사건과 더불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 전체의 증언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두는 방향성이다. 곧 하나님을 뵙기 위한 “준비”란, 완성을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죽음 이후에도 사랑의 정화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어놓고 살던 이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는 있으나, 여전히 미완료 상태로 주 앞에 서게 된다. 성경은 인간이 이 땅에서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 하나님을 만나게 됨을 전제한다. 그렇기에 많은 신학자들은 성경의 흐름을 따라, 죽음을 지나 하나님을 대면하는 과정에서도 사랑의 불이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는 일이 계속될 수 있음을 “형벌이 아닌 치유의 관점”으로 이해해 왔다.

이것은 중세적 의미의 연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값을 갚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안의 잔여적 왜곡을 정결케 하여, 그분의 영광을 더 깊이 누리고 그 임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는 ‘치유의 과정’에 가깝다.

바울이 말한 “그날에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을 시험할 것이라”(고전 3:13)는 말씀처럼, 그 불은 죄인을 파멸시키는 형벌이 아니라, 자녀를 정결하게 하는 사랑의 불이다. 그리고 그 불을 통과하는 과정에도 기쁨은 있다. “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분과의 완전한 연합을 바라보며 그 사랑의 정결한 불을 기쁨으로 통과하게 된다.

복음은 단지 심판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 복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닮게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이 생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자리에서 완성으로 나아간다.



결론: 십자가는 지옥을 뚫고 내려간 사랑의 승리다

지옥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형벌의 방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을 거부하며 스스로 지어 올린 감옥이다. 예수는 그 감옥의 문을 부수기 위해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지옥 속에 함께 계신다. 우리의 고통, 죄, 수치, 절망 한가운데서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우리 안으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다시 올라가셨다.

사랑이 지옥보다 깊고, 십자가가 심판보다 무겁고, 부활이 죽음보다 크다.

그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

지옥은 더 이상 끝이 아니다. 지옥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이다.
  • ?
    벚꽃향기 2025.11.14 00:30
    “그가 ‘올라가셨다’ 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먼저 땅 아래의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려가신 그분이,
    하늘 위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는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9–10, 새번역)

    — 지옥은 더 이상 끝이 아니다.
    지옥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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