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불가피해 보이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의 원수 사랑은 너무 이상적이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입니다.
현실이 복잡해서 예수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바꾸고 있는 것입니까?
결국 선택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폭력을 허락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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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수와 같은 분인가?
(원수를 죽이는 신인가, 원수를 위해 죽는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평화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은, 겉으로는 윤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시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라는 질문이며, 더 정확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하나님’이라는 이름 아래 수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신앙이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단어 뒤에 자신의 공포와 분노와 보복 욕구를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숨는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 폭력을 합리화하는 모든 통로를 막아버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예수의 피로 폭로해버립니다.
1. “살인”과 “정당한 죽임”의 구분은 핵심을 비켜간다
어떤 이들은 출애굽기 20장 13절 “살인하지 말라”를 붙들고 히브리어를 논합니다. “그건
kill이 아니라 murder다. 그러니 정당방위, 전쟁, 사형은 가능하다.”
그 논증이 언어학적으로 정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옳다 해도, 그것은 결정적인 질문을 회피합니다. 지금 논의의 주제는 “모세 율법이 어디까지 허용했는가”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는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최종 기준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만약 어떤 신학이 “구약의 규정”을 근거로 예수의 명령을 조정한다면, 그 신학은 이미 중심을 놓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율법을 잘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지식은 추상적인 전능의 개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서 시작합니다.
2.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폭력의 문법을 해체하시는 예수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마 5장)
이 선언은 말투가 아니라 권위의 지각변동입니다. 예수는 폭력 문제에서 단지 율법을 “부드럽게 보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의 문법 자체를 겨냥해, 그 문법을 해체하십니다.
그 대표가 동해보복의 원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24; 레 24:19-20; 신 19:21)입니다. 이것은 단지 복수를 제한하는 장치였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율법 체계 안에서 그것은 공동체가 ‘정당한 폭력’을 규범화하고, 어떤 경우에는 요구하는 원리로도 기능했습니다. “상대가 해친 만큼 응징하라.” 폭력은 “질서”와 “정의”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문법을 폐기하십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마 5:39)
여기서 “대적하지 말라”는 말은 무기력과 방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의 방식으로 악을 상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공격에는 공격으로 맞서는 보복의 체계—“폭력은 폭력으로 해결된다”는 세계의 신앙—을 끊어버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명령의 심장부를 꺼내 보이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여 너희가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4-45)
예수의 논리는 매섭도록 단순합니다.
1)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와 비를 차별 없이 주신다.
2)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 사랑을 차별 없이 흘려보내야 한다.
3)원수를 향한 사랑은 선택 과목이 아니라, “자녀 됨”의 표지다.
(“그리하여/that you may be”)
여기서 도망갈 구멍이 사라집니다. 예수는 “원수”의 범위를 좁히는 안전장치를 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해와 비의 비유로 모든 제한을 불태워버리십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원수”는 누굽니까? 로마입니다. 억압하고 착취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죽이는 제국입니다. 예수는 그 현실 한복판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장 죽이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라.”
“네가 가장 정당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폭력을 내려놓아라.”
이 명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불가능한 윤리를 던져 우리를 정죄하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그 불가능을 십자가에서 먼저 살아내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셨습니다.
3. 십자가: 하나님은 원수를 만나면 “죽이신” 것이 아니라 “당하셨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날카롭게 신학화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롬 5:10)
이 구절은 복음의 반전을 들려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호감을 살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를 만나면 칼을 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만나면 자기 몸을 내어주는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충격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도 폭력을 필요할 때 쓰신다”는 종교적 상식을 부숩니다. 십자가는 그 반대의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폭력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끝내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제거’해서 화목을 이루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해서 화목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좋은 사람의 품격”이 아니라 십자가의 모방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자신을 내주셨느니라.” (엡 5:1-2)
여기서 “본받다”는 말은, 하나님의 전능을 흉내 내라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형태를 닮으라는 뜻입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신학은 늘 “현실”을 말하지만, 십자가는 묻습니다.
“너의 현실 감각이 예수를 수정하느냐, 아니면 예수가 너의 현실을 심판하느냐?”
4. 부활: 비폭력은 패배의 미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라는 확증
그러나 누군가는 반발합니다. “그러면 악은 누가 막는가? 정의는 어디 있는가?”
복음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정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정의는 십자가로 깊어집니다.
십자가는 악을 가볍게 넘기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악을 가장 무겁게 다룹니다. 다만 방식이 다릅니다. 세상은 악을 악으로 꺾으려 하고, 십자가는 악을 자기희생의 사랑으로 꺾습니다.
그렇다면 이 방식은 결국 패배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은 단지 “죽은 뒤의 위로”가 아닙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십자가의 방식이 진짜 승리다.”
“폭력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죽임당한 사랑이 끝내 패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비폭력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부활 신앙의 현실 참여입니다. 폭력은 ‘지금 당장 이겨야 한다’는 절망에서 나오지만, 비폭력은 십자가와 부활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승리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소망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소심함이 아니라, 부활을 아는 자의 담대함입니다.
5. 가장 흔한 탈출구
: 복음서를 피하고 계시록을 ‘폭력의 증거’로 세우는 방식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으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는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으신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논점을 옮깁니다. 복음서 대신 요한계시록을 끌어옵니다.
“거기엔 피가 있고 검이 있고 심판이 있다. 그러니 예수는 폭력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계시록을 “문자 그대로의 전쟁 다큐멘터리”로 읽는 순간, 그 책은 스스로의 언어를 배반당합니다. 계시록은 처음부터 묵시(apocalyptic)라는 장르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묵시는 상징으로 말하고 과장으로 흔들며 이미지로 찌릅니다. 별이 무화과처럼 떨어지고, 또 다른 장면에서는 다시 하늘에 있고, 용의 꼬리가 별들을 끌어내립니다. 이것을 문자로 고집하면 모순의 연쇄가 되지만, 상징으로 읽으면 그것은 의도된 신호가 됩니다.
“이것은 사진이 아니라 환상이다.”
“물리학 보고서가 아니라 영적 전쟁의 폭로다.”
그리고 계시록이 폭력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의 핵심은 여기 있습니다. 계시록은 폭력 이미지를 가져오되, 그대로 복사하지 않습니다. 가져와서 뒤집어 버립니다. 그 뒤집힘의 심장이 계시록 5장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계 5:5)
“내가 보니…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 (계 5:6)
사자는 보통 “찢어 죽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자를 보여주지 않고, 사자가 “죽임 당한 어린양”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계시록의 전쟁은 “사자-전쟁”이 아니라 “어린양-전쟁”입니다.
승리는 폭력의 승리가 아니라 자기희생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폭력적 상징은 반드시 ‘유다의 사자’가 ‘죽임당한 어린양’으로 드러나는 그 전복(계 5:5–6)을 기준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열쇠를 놓치는 순간, 사람은 계시록으로 예수의 얼굴을 찢어 “제국의 신”을 만들어버립니다.
6. 계시록의 상징들은 어떻게 전복되는가: 피, 칼, 승리, 군대
첫째, 피입니다.
그리스도는 “피에 젖은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계 19:13). 고대 전사 이미지는 보통 “전쟁 후에 적의 피가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그는 싸우러 나아가며 이미 피에 젖어 있습니다. 상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피는 적의 피가 아니라, 그의 피다.
그는 원수의 피를 요구하는 전사가 아니라, 원수를 위해 자기 피를 내어주는 어린양이다.
둘째, 칼입니다.
계시록에서 칼은 손에 쥔 무기가 아닙니다. 칼은 입에서 나옵니다(계 1:16; 19:15, 21). 문자로 읽으면 우스꽝스럽지만, 상징으로 읽으면 압도적으로 명확합니다. 그것은 살육의 칼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어린양은 사람을 베어 죽이는 칼이 아니라, 거짓을 베어 죽이는 말씀으로 싸웁니다. 그 싸움의 목표는 파괴가 아니라 미혹에서의 해방입니다. 사탄은 “미혹하는 자”(계 12:9)로 규정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승리는 사람을 죽여 제거하는 승리가 아니라, 사람을 묶고 있던 거짓을 깨뜨려 자유롭게 하는 승리입니다.
셋째, “쳐서 이겼다”는 표현의 결론입니다.
계시록 21-22장에서 만국은 어린양의 빛 가운데로 다니고(계 21:24), 열방을 치유하는 잎사귀가 있습니다(계 22:2). 이것은 계시록의 최종 지향이 살육이 아니라 치유라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즉, 계시록의 “무너뜨림”은 사람 자체의 제거가 아니라, 사람을 사로잡았던 거짓 체제와 미혹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구원 행위로 읽혀야 합니다.
넷째, 군대입니다.
계시록의 군대는 제국의 군대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데로 따라가는 자들”(계 14장)이며, “어린양의 피로 옷을 희게 한 자들”(계 7:14)이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들”(계 12:11)입니다. 그들이 이긴 방식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긴 것은 ‘죽여서’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을 내려놓지 않는 어린양의 방식으로였습니다. 계시록의 반복 어휘는 살육이 아니라 “증언, 인내, 충성, 순교”입니다. 계시록은 교회에게 “때려눕혀라”가 아니라 “끝까지 어린양처럼 사랑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7. 성령
: 교회를 ‘폭력의 영’이 아니라 ‘어린양의 증인’으로 세우시는 하나님
이 지점에서 성령의 자리가 열립니다. 원수 사랑은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은 교회를 “더 강한 폭력”으로 무장시키는 분이 아니라, 교회를 어린양의 증언으로 세우는 분입니다. 성령은 교회가 제국의 방식(강압, 보복, 공포)에 감염되지 않도록, 십자가의 방식(원수 사랑, 진리 증언, 자기희생)을 끝까지 붙들게 하십니다.
성부는 해와 비처럼 사랑하시고,
성자는 십자가로 사랑을 정의하시며,
성령은 그 사랑을 교회 안에 실제로 흘려보내십니다.
이 흐름을 거슬러 폭력을 “신의 뜻”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을 “힘의 신”으로 바꾸어 놓고,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부활을 폭력의 승리로 오독하며, 성령을 제국의 연료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8. 결론: 남는 선택지는 둘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평화주의자인가?”
정확히 말하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은 분인가?”
복음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같은 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설명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결국 예수를 따르는 말이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꾸며낼 수 있는 종교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입니다.
1. 폭력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 예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조정”할 것인가?
2. 예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폭력의 세계관을 “복음으로 심판”할 것인가?
십자가는 안전한 중간지대를 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말하고 싶다면,
원수를 사랑하라.”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를 해치는 자에게도 해와 비를 흘려보내라.”
“네가 승리를 말하고 싶다면,
어린양이 이긴 방식으로 이겨라.”
이 길은 약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른 길을 찾습니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확실해 보이는 길. 그러나 복음은 “확실해 보이는 힘”이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부활은 폭력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부활은 죽임당한 사랑이 끝내 패배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부활의 생명을 교회에 부어, 교회가 제국의 방식이 아니라 어린양의 방식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논의를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에게 “정당한 폭력”은 안전한 신학적 범주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오래된 유혹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이 “원수를 죽여 이기는 분”이 아니라, 원수의 자리에 내려가 원수를 살려 이기는 분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
“검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원수까지도.”
이 부르심 앞에서 교회는 더 이상 질문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남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폭력의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십자가의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더 옳게 말했는가보다
무엇을 더 사랑하지 못했는지가 더 마음에 남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느리고, 여전히 자주 흔들리지만 —
그럼에도 이 방향만은 놓치지 않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더 많이 이기기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