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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

​

이 말은 위로가 아니다.

죽음을 외면한 낙관도 아니다.

​

죽음이 가장 확실한 권력으로 군림해 온

이 세계 한가운데서,

그 권력이 이미 심문을 받았고,

그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전제로 던져진 선언이다.

​

시간은 가속하고, 인생은 벽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이 세계에서,

사랑은 정말로 패배하지 않고

끝내 승리할 수 있는가?

​

​==============================================================

​

죽음을 향해 달리는 세계에서,

사랑은 어떻게 승리하는가​

​

1. 가속하는 열차와 눈앞의 벽​

​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을수록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하루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인데, 한 해는 점점 더 빨리 지나갑니다.

열세 살 때의 여름방학은 끝도 없어 보였지만, 이제는 한 해가 어느새 금방 흘러가 버립니다.

​

마치 우리는 모두 가속하는 열차에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창밖 풍경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들판의 나무도 보이고, 먼 산의 윤곽도 보이고, 하늘의 색깔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속도가 붙기 시작합니다.

창밖의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흐릿한 선이 됩니다.

오늘이 지나면 어제가 되고, 계절이 한 번 바뀌면 벌써 해가 바뀌고,

주위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

“와, 벌써 또 한 해가 다 갔네요.”​

​

​

이 가속하는 열차의 레일 끝에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한 벽이 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 벽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열차는 멈출 줄 모르고 속도를 높이는데,

우리는 그 벽이 언젠가, 그러나 언제인지 모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만약 이 벽이 모든 것의 끝,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라면,

이 열차 여행은 그 자체로 공포입니다.

​

​

2. 가장 잔인한 이야기 – 무의미한 우주의 신화​

​

하나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는

우연한 물질의 진동에서 잠시 솟아 오른 거품 같은 존재입니다.

​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습니다.

​

목적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

우주는 그저 ‘있을 뿐’이고, 우리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입니다.

​

​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

“처음엔 아무 의미도 없었고,

끝에도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의 삶도, 너의 사랑도, 너의 눈물도, 결국 아무 의미가 없다.”​

​

​

여기서 정말 기이한 점이 있습니다.

이 무의미의 우주 속에서 태어났다는 존재가

정작 그 무의미를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

현실은 어딘가 정직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

선과 악은 그냥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정말로 무언가를 두고 싸우는 실재라고.

​

사랑, 희생, 아름다움은

단지 뇌의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존재해야 하는 가치라고.

​

​

그런데 이 냉혹한 세계관은 말합니다.

​

“그건 다 환상이다.

너의 갈망이 잘못된 것이다.”​

​

​

이 세계관은

우리가 설명을 찾는 갈망까지도

“설명되지 않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끝납니다.

​

그것은 설명을 제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설명을 조롱하는 이야기입니다.

​

​

3. 우리 안의 ‘부적합성’ – 설명을 요구하는 갈망​

​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이 이야기와 맞지 않습니다.

​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

누군가를 배신했을 때의 그 깊은 죄책감을,

​

부당한 폭력과 거짓을 볼 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

도저히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군가를 향해 느끼는 헌신적 사랑을.

​

​

이것들은 단순히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생긴

‘도움 되는 감정’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전 3:11).​

​

​

우리는 영원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 갇혀 있습니다.

​

우리는 의미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무의미를 말합니다.

​

우리는 선과 사랑의 승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결국 악과 고통의 최종적 무의미를 말합니다.

​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우주의 이야기와 잘 맞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

이 “부적합성”은 무엇을 말해줄까요?

​

만일 우리가 정말로

무의미한 우주의 완벽한 산물이라면,

우리는 그 우주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존재여야 합니다.

​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

우리는 이 우주가 말해주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 더 큰 사랑, 더 확실한 정의를 요구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지으신 어떤 분이,

의도적으로 우리 안에 이 갈망을 심어두신 것일까요?

​

​

4. 벽 뒤를 여는 틈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

여기서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 벽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

​

역사 속에서 한 분이

우리와 같은 시간, 같은 살과 피를 입고 오셨습니다.

​

그분은 우리의 열차에 직접 올라타셨고

우리와 함께 가속하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

배신과 외로움,

​

고통과 눈물,

​

불의한 재판과 모욕,

​

그리고 실제적인 죽음.

​

​

이 모든 것을 통과하신 후,

그분은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벽,

죽음의 벽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셨습니다.

​

그리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부서지셨습니다.

​

그런데 그 자리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

하나님은 그 벽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

“그가 살아나셨다” –​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기적적인 부활 이야기가 아닙니다.

​

​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우주의 새로운 문장,

새로운 결론입니다.

​

“이 이야기는 무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선은 정말로 악을 이길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너의 삶은, 너의 눈물과 사랑과 선택은,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

​

5. 십자가는 무엇을 바꾸는가 – 고통과 악, 그리고 하나님​

​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

“그렇다면 왜 지금도

악과 고통과 죽음이 가득한가?”​

​

​

십자가와 부활은,

이 질문을 지워 버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질문을 정면으로 껴안는 사건입니다.

​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

1. 하나님은 고통의 세계를 멀리서 바라보는 관찰자가 아니시다.​

​

하나님은 고통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셨다.

​

그 한 가운데서 가장 깊은 고통을 스스로 당하셨다.

​

2. 하나님은 악과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는 군주가 아니다.​

​

오히려 악과 폭력을 당하심으로,

그 힘을 안에서부터 무력화하시는 사랑이다.

​

3. 하나님은 우리의 가속하는 열차를

“어차피 벽에 부딪칠 거야”라며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다.​

​

그분은 벽을 뚫고 나가는 길을 먼저 여신 분이다.

​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벽에 첫 번째로 부딪혀 부서진 사람이 아니라,

그 벽을 처음으로 통과하신 분입니다.

​

그래서 부활은,

우리가 품고 있던 모든 갈망들 –

​

정의에 대한 갈망,

​

사랑의 승리에 대한 갈망,

​

영원한 의미에 대한 갈망 –

​

​

이 갈망들이 단지 허황된 소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

​

6. 가속하는 열차의 재해석 – 시간은 우리 편이다​

​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

부활을 믿지 않을 때,

가속하는 시간은 우리를 조이는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

“벌써 이렇게 늙어버렸구나.”​

​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

“이렇게 달려가다가는 결국 벽에 부딪혀 끝나는 거 아닌가.”​

​

​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열차의 속도를 잊기 위해

쾌락으로, 중독으로, 바쁜 일상으로

자기를 마비시키려 합니다.

​

그러나 부활을 믿을 때,

이 열차의 가속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

시간은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가는 힘입니다.

​

​

열차가 빨리 달릴수록,

우리는 목적지에 더 빨리 다가갑니다.

​

그 목적지는

모든 눈물을 닦으시는 하나님,

악과 죽음이 더 이상 이름조차 남지 않는 나라,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고통과 눈물이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되는 자리입니다.

​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

“우리는 가장 잔인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

​

7. 오늘, 이 가속 속에서 우리가 할 일​

​

그렇다면, 이 믿음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

​

1.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으로 사용하게 합니다.​

​

“어차피 끝날 인생이니 즐기자”가 아니라,

​

“영원으로 이어질 인생이니

사랑으로 심자”가 됩니다.

​

2. 작은 선택에도 영원을 봅니다.​

​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

작게나마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할 때,

​

진리를 위해 불이익을 감수할 때,

이 모든 것은 벽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열매가 됩니다.

​

3. 죽음 앞에서 다른 눈으로 서게 합니다.​

​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울 수 있습니다.

​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이것이 정말 끝은 아니다”라는

강한 소망이 함께 흐릅니다.

​

4. 가속하는 열차 안에서 ‘깨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

흐릿한 창밖을 보며 허무에 빠지는 대신,

​

그 흐릿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멀리 목적지에서 손짓만 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칸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곁에 앉아 계신 분입니다.

​

​

8. 결론 –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한 장면으로​

​

우리는 모두 같은 열차를 타고 있습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창밖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앞에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러나 복음은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말합니다.

​

“이 벽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이 벽은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문이다.”​

​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우주가 무의미한 우연의 파편이 아니라,

사랑의 작가가 쓰고 계신 이야기임을 보여줍니다.

​

그분은 우리 안에

설명되지 않는 갈망을 심어두셨습니다.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

선과 사랑의 최종 승리를 바라는 마음,

​

내 삶이 영원한 의미를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

​

​

이 모든 갈망은 허상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

그 사랑을 부활로 확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미리 맛본 결말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흐릿한 풍경을 뒤로 하고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갈 미래를 맞이하는 지금,

​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이 고백이 다시 울려 나오게 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

그래서 내 삶은, 내 눈물은, 내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다.”​

​

​

가속하는 열차는 여전히 멈추지 않지만,

이제 그것은 우리를 파괴로 몰고 가는 힘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우리 모두를 데려가는 힘이 됩니다.

​

그리고 그 결말에서,

우리는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나는 결코

가장 잔인한 이야기의 조연이 아니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직접 써 내려가시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의

소중한 한 장면이었다.”



  • ?
    벚꽃향기 2026.03.29 02: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죽음은 여전히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벽은 더 이상 끝이 아니라 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속하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의 삶과 눈물과 사랑은, 

    결코 허무로 사라지지 않고 부활의 빛 안에서 영원한 의미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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