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함을 율법으로 규정할 것인가, 십자가로 재정의할 것인가”
1. 서론: “거룩”과 “완전”은 율법의 언어인가, 사랑의 언어인가?
남 교수님께서는 이 강의에서 ‘거룩함’과 ‘완전함’을 성경 속에서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 어휘적·신학적으로 분석하시며, 청중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영적 수준을 추구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이 분석은 ‘율법 중심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오류에 빠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계시의 중심으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신학적 왜곡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글은 말하고자 합니다. 거룩과 완전은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과 자기 비움의 실체로 다시 정의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신학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는 복음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해방의 선언’으로 붙잡을 것인가의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논의입니다.
2. 핵심 비평 1: 거룩함과 완전함을 '율법적 수준'으로 환원한 오류
남 교수님은 레위기 19장 2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를 인용하며,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도덕성’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십자가 계시의 본질을 간과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초월적 도덕 완성 수준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적 사랑으로 타인을 살리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마 5:48),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라는 초청이었습니다. 거룩과 완전은 계명의 ‘기준’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의 자기 비움과 사랑의 실천입니다.
3. 핵심 비평 2: 완전함을 '결과적 상태'로 정의함으로써 발생한 신학적 독성
남 교수님은 마태복음 5:48의 '완전'이라는 표현을 하나님 수준의 '윤리적 완성'이나 '도덕적 결함 없음'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은 결국 다음과 같은 잘못된 논리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행위’를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한다.”
“완전에 이르지 못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이며, 인간을 정죄의 덫에 가두는 ‘새로운 바리새주의’일 뿐입니다. 예수는 완전함을 요구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인류를 대신하여 그 완전함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미 완전하게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 사랑 안에 거하는 만큼만 거룩하고 완전하다.”
“완전은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하는 관계이다.”
4. 핵심 비평 3: ‘도덕적 완성’ 중심의 거룩함 추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남 교수님의 강의가 위험한 이유는 단지 학문적 오류 때문이 아닙니다. 이 강의가 성도들의 영혼을 짓누르고, 복음 안에서 자유케 된 자들을 다시 ‘율법의 옥에 가두는’ 현실적 피해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남 교수님은 완전함을 도덕적 결점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며, 성도들에게 끝없는 자기 점검과 죄책감의 반복을 요구합니다. 이 구조는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자책을 반복하게 하며, 복음의 자유와 확신 대신, 불안과 두려움의 신앙을 퍼뜨리게 됩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까? 이것이 예수께서 흘리신 피의 결과입니까?
예수께서 보여주신 완전함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요 8장), 불결한 여인의 입맞춤을 받으신(눅 7장) 그 ‘관계 안의 품음’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정죄가 아닌 용납으로, 거리낌이 아닌 끌어안음으로 완성하셨습니다.
5. 성경적 재정의: 예수 안에서 ‘거룩’과 ‘완전’을 다시 읽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단지 죄와 구별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거룩한 분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진정한 거룩은 오염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오염된 자를 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는 부정한 자와 식사하셨고, 죄인들과 친구 되셨으며, 부정한 피를 흘리는 여인에게 ‘딸아’라 부르셨습니다.
이 ‘접촉’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인간의 죄와 고통을 ‘물리치는 힘’이 아니라, 삼켜서 사랑으로 이겨내는 존재 방식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완전함’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 처음 등장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이때의 완전함은 도덕적 결함 없음이 아니라, 언약적 충성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에 신뢰로 응답하는 삶입니다. 이 개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율법 준수자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 실천자이셨습니다.
복음은 ‘사랑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참된 완전함이라 선언합니다.
6. 복음적 대안: “완전하라”는 계명은 정죄가 아니라 초청이다
마태복음 5:48의 명령은,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이는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15)
완전함은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완전함은 ‘스스로 이루는 도덕’이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용서 안에서 살아가는 감사의 존재 방식’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이미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너도 용서받은 자로서, 사랑받은 자로서, 다른 이를 그렇게 품으며 살아가라.”
7. 결론: 율법적 완전에서 십자가적 완전으로
남 교수님의 강의가 가져올 수 있는 결과는 명백합니다. 사람들은 도덕적 완벽을 향한 강박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다음 두 길 중 하나에 들어섭니다:
(1)완전주의적 자기 기만 – 나는 잘하고 있다 착각하며 타인을 정죄
(2)무기력한 자기 포기 – 나는 안 된다 생각하며 복음에서 멀어짐
그러나 십자가는 이 두 길 모두를 거부합니다.
“너는 실패했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너는 부족하지만, 나는 너를 통해 나의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이룰 수 없는 완전함을 하나님 스스로 감당하신 사건이며, 이제 우리에게는 ‘완전한 사랑에 참여하라’는 은혜의 초청만이 남았습니다. 거룩과 완전은 명령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의 초대입니다.
복음은 완전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직 용서가 필요한 자, 사랑에 목마른 자, 실패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문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품었으니, 이제 너도 다른 이를 품으라”는 부르심입니다.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은,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었으니, 이제 너는 그 사랑 안에 거하여 살라”는 초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