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 “간음하지 말라”의 복음적 해석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는다”는 십자가의 언약으로 다시 들릴 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출 20:14)은 단지 외적인 정결을 요구하는 도덕 규율이 아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이 간음의 개념을 언약의 배신, 곧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로 확장해왔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따르며 수없이 “영적 간음”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돌을 던지지 않고,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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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의 고멜,
예루살렘의 배신,
그리고 간음한 여인 앞에 서신 예수.
율법은 그들을 정죄하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품겠다 하셨다.
십자가는 바로 그 품음의 절정이다.
배신당한 남편이, 배신한 아내를 위해 대신 죽는 자리.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자를, 끝까지 사랑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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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선언한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은,
십자가 안에서 “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적 사랑의 외침으로 다시 들린다.
율법은 떠나지 말라 명령했지만,
복음은 네가 떠났을지라도 나는 남아 있다고 말한다.
율법은 의무를 요구했지만,
십자가는 신실함으로 사랑을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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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돌판에 새겨졌지만,
복음은 못 자국 난 손바닥에 새겨졌다.
이것이 복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사랑으로 굳게 세우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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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다.
복음은 정죄당할 자리를 대신 살아낸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인간의 배신보다 크며,
율법이 닿지 못한 곳까지 들어가
언약을 끝내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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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너의 불성실에도, 나는 신실하다.
그 십자가가 증거다.”
“나는 끝까지 너를 지킨다”는 고백으로 바뀌는 순간,
율법은 무기가 아니라 언약이 된다.
율법은 그렇게 다시 굳게 세워진다.